‹ 목록으로 그 로맨스, 제가 막겠습니다

1화

던전 최하층은 늘 그렇듯 습했다. 곰팡이 냄새, 젖은 돌 냄새, 그리고 아까 잡은 놈의 체액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코어 파괴 완료. 던전 붕괴까지 03:00 남았습니다.】 시스템 알림이 눈앞에 뜬 순간 나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3분이면 충분하다. 나는 다인 왕국 소속 S급 모험가고, 이런 던전은 이번 달만 벌써 다섯 번째다. "슬슬 나가야겠는데." 등 뒤로 균열이 쩍쩍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지직. 돌바닥이 갈라지며 검은 안개가 새어 나왔다. 던전이 죽어가는 소리였다. 발밑으로 진동이 올라왔다. 던전이 무너질 때 특유의 리듬이 있다. 처음엔 낮게, 그다음엔 빠르게, 마지막엔 한꺼번에. 나는 그 박자를 지금까지 수백 번은 들었다. 순간이동 마법진은 던전 입구 근처에 미리 새겨 두었다. 왕실 소속 마법사들이 관리하는 정식 좌표였고, 나는 그 위에 발을 딱 맞춰 섰다. 발밑의 마법진이 은은하게 빛을 뿜었다. 평소 같으면 옅은 푸른빛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색이 탁했다. 뭐, 어차피 이 나라 마법사들 관리 상태가 개판인 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예산 삭감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은 게 벌써 세 번째 갱신 시기였으니까. "귀환." 짧게 발동어를 뱉었다. [여기서 좌표가 두 개로 겹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저도 몰라요.] ···누구세요. 갑자기 머릿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튀어나온 것 같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실제로는 찌푸릴 표정 근육도 제대로 안 움직였을 거다. 나는 표정이 거의 죽어 있는 사람이니까. 동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얼굴 근육 화석화됐냐고. 하지만 그 순간에는 확실히 위화감을 느꼈다. 마법진의 빛이 평소보다 붉었다. 삐이이익.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던전 붕괴의 여파가 좌표를 흔든 모양이었다. 이런 경우는 매뉴얼에 없었다. 아니, 있었나? 순간이동 중 좌표 간섭 발생 시 대응 매뉴얼 3장 어디쯤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걸 떠올릴 정신이 없었다. 순간이동 마법진 위로 시야가 뒤틀렸다. 마치 유리창에 물을 부은 것처럼, 세상이 액체처럼 늘어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기억이었다. 서른 해. 정확히 서른 해어치의 기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머리가 두 개로 나뉘어서 서로 다른 걸 저장하려고 싸우는 느낌이었다. 관자놀이가 뻐근했다. 한국이라는 나라. 야근. 라면. 편의점 삼각김밥. 그리고 침대에 누워 밤새 즐겼던 수많은 게임들. 그 기억들 사이, 유독 선명한 하나가 있었다. 『반짝반짝 학원 파라다이스~진실한 사랑이 세상을 구한다~』. ···망했다. 제목부터 이렇게 부끄러운 게임이 있었나. 아니, 있었다. 내가 세 번이나 클리어했으니까. 심지어 세 번째는 트루엔딩 보겠다고 밤을 새운 기억까지 선명했다. 그 게임의 무대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마법진의 빛이 잦아들고 시야가 초점을 잡았을 때, 나는 낯선 홀 한복판에 서 있었다. 대리석 바닥, 높은 천장,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 그리고 그 빛을 받으며 도열해 있는 새하얀 교복 차림의 신입생들. 다인 마법학원. 입학식장. 주변 공기부터 달랐다. 던전 특유의 습한 곰팡이 냄새 대신, 향긋한 꽃향과 값비싼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금까지 몬스터 체액을 뒤집어쓰고 있던 사람 입장에서는 좀 어지러운 온도차였다. [이거 완전 낯설죠? 저도 그래요.] 그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서 울렸다. 정확히는 목소리라기보다, 게임 지식이 저절로 떠오르는 감각이었다. 마치 위키를 검색하지 않아도 답이 튀어나오는 느낌. 나는 왜 여기 있지. 아, 맞다. 오늘 일정. 던전 토벌 끝나면 곧바로 다인 마법학원 입학식 경호 지원. 왕실에서 요청한 임시 임무였다. S급 모험가가 얼굴 도장 한 번 찍어 주면 왕실 체면도 서고, 학원 입장에서도 안전 홍보가 되는 거니까. 효율적인 배치였다. 나는 늘 효율적인 걸 좋아했다. 문제는 지금 머릿속이 30년치 기억으로 가득 차서 터질 것 같다는 거였다. 몬스터 체액 냄새가 아직 옷에 남아 있는데, 눈앞엔 순백의 교복과 반짝이는 배지들이 도열해 있었다. 누가 봐도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나는 슬쩍 내 옷깃을 내려다봤다. 갑옷 곳곳에 말라붙은 검붉은 자국. 아무도 눈치 못 챈 게 다행이었다. 식장 앞쪽, 단상 근처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하늘색 머리를 곱게 늘어뜨린 소녀. 교복 위에 걸친 공작가 문장 배지. 표정은 웃고 있는데 입술 색이 하얬다. 윤아리. 게임 속 여주인공 후보. 왕세자의 약혼자. 그리고― [3번째 챕터, '입학식의 비극' 이벤트 발생 조건 충족.] 내면에서 그 문구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게임을 세 번이나 돌렸으니 대사 하나까지 외우고 있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윤아리가 갑작스러운 병약 증세로 쓰러지고 왕세자 이헌이 달려와 안아 올리는 로맨틱한 오프닝이었다. 오타쿠 게임 특유의 뻔한 클리셰. 나는 그때 침대에 누워서 이 장면 보고 실소를 흘렸던 기억이 있다. 대체 왜 병약 여주가 하필 입학식 날, 하필 왕세자 앞에서, 하필 카메라 앵글 좋은 위치에서 쓰러지는 건지. 각본가가 대놓고 '여기 보세요' 하는 티가 났었다. 지금 실제로 보니 웃기지가 않았다. 윤아리의 무릎이 서서히 꺾이고 있었다. 그녀는 웃음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이미 게임 스크립트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 아파서 짓는 표정이었다. 이마엔 식은땀이 배어 있었다. 입술은 그냥 하얀 게 아니라 파랬다. 저건 연출이 아니다. 진짜 아픈 사람 몸이다. [HP 게이지 시각화 안 되는 게 아쉽네요.] 지금 이 상황에 그런 농담이 나오나. 나는 인파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정확히는, 발이 먼저 움직였다. 주변 신입생들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정면만 보고 있었다. 입학식 안내 담당인지 마법사 복장을 한 사람이 단상 위에서 뭔가 낭독하는 중이었고, 그 목소리가 홀 전체에 웅웅 울려 퍼졌다. 아무도 이 작은 이상 신호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만 봤다. 아니, 정확히는 게임 지식 덕분에 미리 알았다. 윤아리의 몸이 완전히 균형을 잃었다. 주변에서 누군가 짧게 숨을 삼켰다. "아, 어……" 왕세자 이헌은 아직 두 걸음이나 떨어져 있었다. 이대로면 늦는다. 타이밍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게임 속 스크립트대로면 이헌이 지금 정확히 도착해서 극적으로 받아 안았어야 했는데. 내 계산으로는, 원작 대사 타이밍상 이헌의 발걸음은 이미 세 번째 스텝을 밟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두 번째 스텝에서 멈춰 있었다. 뭔가 어긋났다. 마법진 오류의 여파인지, 아니면 내가 개입해서 흐름이 틀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원작에는 없던 변수였다. 윤아리의 몸이 대리석 바닥으로 쏟아지기 직전. 나는 이미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손끝에 닿은 팔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건 단순한 빈혈이 아니다. 몸속 어딘가가 완전히 잘못됐다는 신호였다.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수백 개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꽂히는 감각. 몬스터 체액 냄새를 풍기는 낯선 모험가가, 입학식 한복판에서 공작가의 영애를 붙잡고 있는 그림.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손안에서 점점 무겁게 늘어지는 그녀의 몸을 느끼며 생각했다. 이거, 각본대로 안 굴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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