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로맨스, 제가 막겠습니다

3화

입학식이 끝난 뒤 나는 학원장실로 안내되었다. 안내라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호송이었다. 교두단 두 명이 양옆에 딱 붙어 걸었는데, 어깨 너비가 나보다 두 배는 넓어서 도망칠 틈 자체가 없었다. 문 앞에는 왕실 소속 조사관이 서 있었다. 조사관이라는 명칭이 붙었지만 사실상 감시자였다. 학원장실 안은 서늘했다. 벽마다 걸린 마법 등불이 푸른빛을 뿜었고, 그 빛이 바닥 대리석에 반사되어 방 전체가 얼음 창고처럼 느껴졌다. 향은 오래된 종이와 약초 냄새가 섞여 있었는데, 그게 또 묘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신원 확인 절차 개시: 대상 - 한서준. 종족 - 하프엘프. 특이사항 - 다중 상급 자격 보유.】 시스템 알림이 눈앞에 떴다. 조사관이 마법 기록구를 켠 모양이었다. 기록구는 손바닥만 한 크리스탈이었는데, 표면에 은은한 빛이 돌면서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문자로 옮겨 적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조사관이 존댓말로 말했지만 눈빛은 전혀 감사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오히려 먹잇감을 앞에 둔 눈빛에 더 가까웠다. [협조가 아니라 그냥 취조입니다.] 그럴 줄 알았지. 존댓말 쓴다고 취조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 "질문 몇 가지 드리겠습니다. 상급 연금술사 자격은 어디서 취득하셨습니까." "왕국 남부 연금술 협회입니다." "상급 치유마법사 자격은요." "동부 신전 부속 시설에서." "기사 자격은 확인상 3급 이상으로 나오는데, 이건 또 어디서." "…던전에서 자연스럽게." 조사관의 손이 잠시 멈췄다. 기록구 표면의 빛도 잠깐 흔들렸다. "던전에서 기사 자격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나도 모르겠다. 30년 전생 기억이 밀려온 지금 돌이켜 봐도, 이 세계의 나는 그냥 재능이 넘쳐서 이것저것 다 배웠고 다 통과했다. 효율적인 삶이었지만 남들 눈엔 비상식적인 삶이었던 모양이다. 조사관이 종이를 넘기며 다음 항목을 확인했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사각, 사각. 그 소리마다 내 심장이 한 번씩 쪼그라들었다. "정원사 자격증도 있으시군요." "취미입니다." "건축사 자격도." "이것도 취미입니다." "…목공 자격도 있는데, 이건." "이것도 취미입니다." 조사관이 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잠깐 쳐다봤다. 그 눈빛이 딱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야, 취미가 몇 개야, 사람이. 나도 궁금하다고. 그거. 조사관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취미가 이렇게 많은 사람은 대체 잠을 언제 자는 걸까요.] 나도 몰라. 물어보지 마. 나도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라고. "요리사 자격도 3급이시네요." "…이것도 취미입니다." "이건 취미가 아니라 그냥 스펙 수집 아닙니까." 정확한 지적이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헛기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시간쯤 그렇게 이어진 뒤, 조사관이 서류를 덮고 학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류 뭉치가 꽤 두꺼워져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종이가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자격 자체는 전부 진본입니다. 다만 이렇게 많은 자격을 한 사람이 동시에 보유한 사례는 왕국 역사상 없습니다." 학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팔짱을 낀 채 앉아 있었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하프엘프치고 인간의 기록 체계에 이렇게 익숙한 것도 이례적이군요." 그 말에 심장이 살짝 내려앉았다. 전생 기억 때문에 아는 게 너무 많다는 걸 들킬 뻔했다. 왕국 문서 양식, 행정 절차, 심지어 세금 계산법까지 줄줄 꿰고 있는 하프엘프라니. 나 같아도 의심하겠다. [혼혈이라서 잘 아는 척했다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 타이밍 맞춰서 좀 말해주라, 미리. "어머니가 인간 사회 기록 체계를 따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절반은 사실이었다. 진짜 이유는 아니었지만. 학장이 나를 오래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얼굴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마치 값을 매기는 감정사 같은 눈빛이었다. 의심이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조사가 끝났다는 뜻으로 서류를 덮었다. 책상 위에 서류가 탁, 하고 놓이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만 한서준 님, 겸임교사 임명은 아직 확정된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속으로는 임명 안 되면 오히려 편하겠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지만, 겉으로는 최대한 예의 바른 표정을 유지했다. 방을 나서자 복도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대리석 바닥에 길게 늘어져 있었고, 그 그림자 끝에서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왕세자 이헌. "오랜만이네, 한서준." 반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전생 기억이 밀려들며, 나는 이헌과 이전에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왕실 행사, 던전 토벌 지원 요청, 그리고 정확히는 게임 속에서도 이 캐릭터를 몇 번이나 봤다. 게임 속 이헌은 항상 화면 가득 잘생긴 얼굴로 등장해서 여주인공을 구해주는 역할이었다. 실물로 보니 그림보다 조각 같은 느낌이 더 강했는데, 지금은 그 사실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전하께서 여기까진 왜." "아리가 걱정돼서." 그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순간 이 사람이 정말 게임 속 로맨스 주인공이라는 걸 실감했다. 대사 톤까지 완벽하게 정석이었다. 마치 대본이 있는 것처럼. [이 사람, 지금 안 그래도 여주인공 걱정하는 대사 하나 쳤는데요. 딱 클리셰예요.] 닥쳐 좀. 나도 알아. 안 그래도 신경 쓰이니까 조용히 좀 해. 이헌은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자세만 봐도 여유로워 보였지만, 눈동자는 계속 내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뭔가를 캐내려는 눈빛이었다. "전하,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복도에는 우리 둘뿐이었지만, 그래도 벽에 귀가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 뭔가 이상한 걸 느끼신 적 없습니까." 이헌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방금까지의 여유로운 표정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뜻이지." "예를 들면, 특정 사건들이 정해진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 오늘 아리 영애가 쓰러진 것도, 정확히 어떤 각본이 있는 것처럼." 이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 빠졌다. 그 변화가 너무 뚜렷해서, 나는 오히려 내가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넌…… 그것도 아는 건가." 그것도, 라는 표현이 걸렸다. 그것도 라니. 다른 것도 안다는 전제가 붙은 말이었다. "뭘 안다는 겁니까." 이헌이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짧게 대답했다. 복도 끝, 창문 밖으로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사라질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녀의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세계가 원래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곧 끝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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