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로맨스, 제가 막겠습니다

2화

손끝에 닿은 팔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살갗 아래로 핏줄이 파랗게 도드라져 있었다. 마치 냉동실에서 막 꺼낸 고기 같은 촉감이었다. 체온이 정상 범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리고 맥박은 지나치게 빨랐다.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을 때 느껴진 그 박동은, 마치 미친 듯이 두드리는 북소리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두근두근― 정상적인 인간의 몸이 낼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이거 마나 역류예요. 게임 지식이지만.] 하필 이럴 때 도움이 되는 정보였다. 『반짝반짝 학원 파라다이스』의 세계관 설정상, 윤아리는 특이하게 높은 마력 친화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그 마력을 몸이 완전히 소화하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이걸 게임에서는 그냥 '몸이 약한 여주인공'이라는 클리셰로 처리했다. 일러스트만 보면 그냥 창백하고 예쁜 병약 미소녀였다. 배경음악까지 애잔하게 흘러나오는 그런 컷. 실제로는 마나가 혈관 속에서 역류하며 신경계를 태우고 있는 상태였다. 창백한 게 아니라, 몸속에서 불이 나고 있는 거였다. 웃기지도 않지, 이걸 감성적인 병약 설정이라고 팔았다니. 원작 제작진 나와라. 이거 그냥 응급실 갈 상황이었잖아. 주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며 뭐라 뭐라 소리를 질렀지만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 저 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그녀의 명치 위쪽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게 느껴졌다. 상급 연금술사 자격, 상급 치유마법사 자격, 그리고― 【복합 마법 시전: 마나 정화, 신경 안정, 체온 조절】 세 가지를 동시에 걸었다. 손바닥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따뜻한 감각이 손끝에서 팔뚝까지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세 가지 마법을 유지한다는 건 뇌를 세 갈래로 쪼개서 각각 다른 방향으로 굴리는 느낌이었다. 뒤통수가 뻐근하게 당겨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나에게 쏠렸다. 웅성, 웅성. "저게 뭐지?" "동시에 세 개를 쓰는 게 가능해?" "저런 마법 처음 보는데……" 수십 개의 시선이 등에 꽂히는 느낌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마치 벌거벗은 채로 무대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윤아리의 몸에서 이상한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입술 색도 조금씩 돌아왔다. 손목의 맥박도 정상 범위로, 아주 천천히 내려앉았다. [사용 자격증만 벌써 세 개째네요. 이러다 신원 조회 들어가겠는데요.] 알아. 나도 안다고. 지금 그 소리 하나도 도움 안 되니까 조용히 좀 해. 하지만 사람이 눈앞에서 쓰러지는데 자격증 개수 세고 있을 여유가 있나. 그럴 거면 그냥 팔짱 끼고 서서 신원조회 서류 걱정하며 사람 죽는 거 구경했겠지. 윤아리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초점이 흐릿하다가 점점 또렷해졌다. 긴 속눈썹이 몇 번 깜박였다. "……괜찮으세요?" 내 물음에 그녀가 나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놀람도, 감사도 아니고 뭔가 확인하는 듯한 눈빛. 마치 내 얼굴을 처음 보는 게 아니라, 어디선가 봤던 얼굴을 다시 대조하는 것 같은 시선. "당신, 지금……" 그녀가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아리!" 왕세자 이헌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그는 상황을 보고 잠시 멈춰 섰다. 얼굴에 곤란함이 스쳤다. 원래 자기가 안아 올려야 했을 사람을, 웬 하프엘프 교사 후보가 마법으로 먼저 살려 놓았으니 당연하다. 원작대로였다면 지금 이 장면은 왕세자가 여주인공을 품에 안고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지는, 삽화로 그려질 만한 명장면이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늦게 도착한 남자 한 명이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 나름 원작에서 인기 캐릭터였는데. 지금은 그냥 늦은 사람.] 야, 그런 코멘트는 필요 없어. 안 그래도 분위기 싸한데 부채질하지 말고. 이헌은 나를 한 번 훑어보고, 다시 윤아리를 봤다. 그 시선 이동 속도가 묘하게 부자연스러웠다. "아리, 어디 다친 데는……"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윤아리가 급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목소리에 미묘한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또렷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이헌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윤아리는 살짝 그 손을 피하며 스스로 일어섰다. 그 작은 동작에도 이헌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식장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가, 곧 학원 관계자들이 몰려나오며 정리에 나섰다. 안내 요원들이 사람들을 뒤로 물리고, 누군가 물을 가져오고, 또 누군가는 의자를 끌고 왔다. 그 중심에 학장이 있었다. 다인 마법학원의 학장은 백발을 단정히 틀어 올린 노년의 인물이었다. 눈매가 유난히 깊었고, 지금 그 눈은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는 감사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뭔가를 캐내려는 듬직한 압박감만 있었다. "방금 그 시전, 다시 한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존댓말이었지만 명령이었다. [교장선생님, 아니 학장님이 벌써 의심 시작했어요.] 알아, 안다고. 조용히 좀 해. "영애가 급했던 상황이라 즉흥적으로 처치를 좀 했습니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등줄기로는 식은땀이 한 줄기 흘렀다. 연금술사, 치유마법사, 여기에 아까 순간이동으로 들어왔으니 마법진 관련 자격도 노출된 셈이고. 세 개도 아니고 사실상 네 개째 정체를 흘리고 다니는 셈이었다. 이러다 이력서 다 까발려지겠는데. [상급 자격증이 세 개인데 '즉흥적'이라고 하면 학장님이 믿을까요?] 안 믿겠지. 나도 안 믿겠다. 나라도 저 나이 먹고 저런 눈으로 나를 봤으면 절대 안 믿었을 거다. 학장의 시선이 내 명찰로 옮겨 갔다. 오래도록, 마치 글자 하나하나를 씹어 삼키듯 천천히. 왕실에서 배포한 임시 경호 명찰. 거기엔 '한서준, S급 모험가, 학원 겸임교사 후보'라고 적혀 있었다. "한서준 님." 학장이 내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마치 신원조회 서류를 읽는 사람처럼, 한 글자씩 끊어서. "하프엘프시군요. 게다가 겸임교사 후보라니,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아침 왕실 쪽에서 급히 결정된 사안이라고 들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안다고 했지, 나도 오늘 처음 들은 이야기라는 말은 안 했을 뿐이다. 세부적인 거짓말은 안 했으니 반칙은 아니지. 학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치 내 말 속에서 빈틈을 찾아내려는 것처럼.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 세 종류의 상급 마법을 동시에 시전하는 방식은, 왕국 마법사 협회에서도 아직 정식 인증되지 않은 기술입니다." [아, 이제 협회까지 나오네요. 슬슬 커지는데.] 나는 속으로만 한숨을 쉬었다. 입학식 하나 참석하러 왔다가 신원조사 시작될 판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뒷줄에 숨어서 조용히 졸다가 나올 걸 그랬나. 아니, 그럼 아까 윤아리는 그대로 쓰러진 채로 뒀어야 하나? 머릿속에서 두 가지 선택지가 부딪부딪 부딪쳤다. 답은 늘 하나뿐이었지만. "규정을 어긴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규정을 어긴 건 아니지요. 다만 규정에도 없는 수준이라, 저희로서는 확인이 필요합니다." 학장의 목소리가 담담했지만 그 뒤에 숨은 의도는 명확했다. 너를 붙잡아 두고 싶다는 뜻이었다. 주변 관계자들도 은근슬쩍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몇몇은 대놓고 나를 쳐다봤고, 몇몇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며 눈치를 봤다. 이거 완전 스포트라이트인데. 조용히 학원 생활하려던 계획이 첫날부터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다. 식장 한쪽에서 이헌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경계심과 호기심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마치 처음 보는 벌레를 관찰하는 듯한, 그런 눈빛. 윤아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시선은 유독 오래 내게 머물렀다. 방금까지 정신을 잃었던 사람의 눈빛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하고, 집요했다. 마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그 눈빛이 조금씩 더 짙어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