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쾅쾅쾅.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저택 전체를 울렸다.
유리창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커튼 뒤에 숨어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남자 셋이 서 있었다.
검은 외투, 낡은 가죽 신발.
손에는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종이 끝이 아침 바람에 팔락거렸다.
"설가의 채무를 정리하러 왔소."
큰 목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두 번째 남자가 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었다.
쇠사슬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나는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듯 몸을 기울였다.
숨을 크게 쉬었는데도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아침이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도 지쳤다.
나는 여덟 살이다.
이름은 설아름.
적발에 녹안, 이 저택에서 태어난 유일한 핏줄이다.
석 달 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차 사고로 함께 세상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설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문객들의 발소리였다.
그다음엔 하인들이 하나둘 짐을 싸서 나가는 발소리였다.
지금은 채권자들의 발소리다.
소리의 종류만 바뀌었을 뿐, 저택은 늘 시끄러웠다.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죠."
한지운이 내 손을 잡았다.
스물넷의 집사, 검은 머리에 회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
키가 크고 목소리가 낮았다.
아버지 대부터 우리 집을 지킨 사람이었다.
그의 손은 늘 차가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안심이 됐다.
적어도 이 사람은 도망가지 않았으니까.
저택에 남은 하인은 이제 그 한 명뿐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한 번 더 보았다.
서류를 든 남자가 대문을 발로 걷어찼다.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무 문이 아니라 마음이 갈라지는 소리 같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남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사라질 리가 없었다. 돈을 받기 전까지는.
"저 사람들, 언제까지 저러는 거예요."
"금화 삼천 냐를 갚기 전까지는 계속 올 겁니다."
삼천.
숫자가 머릿속에서 굳었다.
우리 집 금고에는 이백도 남지 않았다.
이백.
삼천에서 이백을 빼면 이천팔백.
계산이 끝나기도 전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면 다른 방법은 없나요."
"찾고 있습니다."
한지운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스물넷 어른의 목소리에서 흔들림을 듣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때는 몰랐다.
오전 열 시.
채권자들이 돌아갔다.
발소리가 대문 밖으로 멀어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대신 종이 한 장이 대문 틈에 꽂혀 있었다.
한지운이 그것을 주워 들고 낯빛이 변했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종이 위를 두 번, 세 번 오갔다.
읽는 속도가 아니라, 읽고 싶지 않은 속도였다.
"뭐라고 적혀 있어요."
"…최종 기한이 이 주 남았습니다."
이 주.
숨을 삼켰다.
열네 일.
한 자리 숫자 두 개.
그런데 그 숫자가 내 남은 시간의 전부라는 게 이상하게 낯설었다.
"이 주가 지나면 어떻게 되나요."
"저택을 압류당합니다."
"그러면요."
"아가씨는… 친척 집으로 보내지실 겁니다."
친척.
작은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례식에서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던 사람.
검은 옷을 입고 내내 창밖만 바라보던 뒷모습.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살아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목이 잠겼다.
한지운도 그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으며 말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아가씨."
"찾아서 뭘 할 수 있는데요."
말이 뾰족하게 나갔다.
한지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가 대답하지 못할 걸 알면서 물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계단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삼천이라는 숫자가 발밑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의 방이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석 달째 그대로였다.
화장대 위에는 마르다 만 화장수 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옷장 문은 살짝 열려 있고, 그 틈으로 익숙한 향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 향을 맡으며 잠깐 멈춰 섰다.
어머니가 쓰던 향, 어머니가 웃을 때 나던 냄새.
그리고 낡은 나무 상자.
침대 밑, 늘 그 자리에 있던 상자.
나는 상자 앞에 앉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뚜껑을 잡았다.
손끝이 살짝 떨렸다.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왜 떨리는지 알 수 없었다.
뚜껑을 열자 종이 뭉치가 나왔다.
손글씨로 채워진 노트였다.
표지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상업]
어머니의 글씨였다.
동글동글한, 조금 흘려 쓴 글씨체.
편지를 쓸 때도 늘 이런 글씨였다.
나는 손끝으로 표지를 한 번 쓸어 보았다.
먼지는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만졌던 흔적이 여전히 선명했다.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작은 상점을 하나 운영했었다.
장사가 잘된 적은 없었지만, 늘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돈보다 먼저 마음을 팔아야 한다."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다.
마음을 어떻게 파는지, 돈이 없으면 가게는 어떻게 유지되는지.
어머니는 그런 질문에도 그냥 웃기만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웃음도 어떤 계산 위에 있었던 게 아닐까.
노트를 넘겼다.
낯선 글자들이 있었다.
레시피라고 하기엔 이상한 도형과 숫자.
원가, 마진, 회전율.
어머니가 왜 이런 걸 적었는지 알 수 없었다.
몇 장을 더 넘겼다.
손님 이름과 취향이 적힌 목록이 있었다.
어떤 이름 옆에는 별표가 세 개, 어떤 이름 옆에는 물음표가 하나.
장부라기엔 너무 사적이고, 일기라기엔 너무 정확했다.
그 순간이었다.
노트를 쥔 손끝이 뜨거워졌다.
아니, 뜨거운 게 아니었다.
뭔가가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그리고 무언가가 쏟아졌다.
모니터, 계약서, 회의실.
낯선 도시의 야경, 낯선 언어로 쓰인 보고서.
나는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살았던 삶이었다.
전생.
다른 세상에서 나는 사업을 했다.
작은 회사를 키워 큰 회사로 만든 적이 있었다.
숫자를 읽는 법, 사람을 읽는 법, 시장을 읽는 법.
그 모든 것이 머릿속에 한 번에 들어찼다.
회의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더미가 보였다.
누군가 마이크를 잡고 발표를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며 숫자를 제시하던 감각.
계약서 마지막 줄에 서명하던 손의 무게.
투자자 앞에서 웃음기 없이 손익 그래프를 짚던 목소리.
숨이 막혔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노트가 손에서 떨어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뭔가가 계속 재배열되고 있었다.
서른 몇 해의 기억이, 여덟 살의 몸속으로 구겨져 들어오는 느낌.
관절이 저릿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해졌다.
지금 이 상황이, 이 숫자들이, 이 절박함이 낯설지 않았다.
삼천 냐.
이백 냐.
이 주.
세 개의 숫자가 머릿속에서 다시 정렬됐다.
전에는 그냥 무서운 숫자였다.
지금은, 풀어야 할 방정식처럼 보였다.
나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 여덟 살의 손.
손톱은 짧고, 손등에는 아직 어린아이의 부드러운 살이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노랗지도, 하얗지도 않았다.
투명한 것에 가까웠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놓칠 만큼 약했다.
"이게 뭐지."
나는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게 낮게 나왔다.
빛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손끝에 남은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손끝을 쥐었다 펴보았다.
따뜻한 게 남아 있는 것도 아닌데, 뭔가가 거기 있다는 느낌이 계속됐다.
마치 방금 뭔가를 만지고 온 것처럼.
무언가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
이것이 설가를 구할 방법이라는 것.
나는 떨어진 노트를 다시 주워 들었다.
표지의 글자를 다시 읽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상업]
이번엔 그 문장이 다르게 읽혔다.
단순한 다짐이 아니라, 방법론처럼 보였다.
문이 열렸다.
한지운이었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하십니까."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닥에 앉은 채로, 노트를 품에 안은 채로.
숨은 아직 다 가라앉지 않았다.
"집사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눈은 또렷했다.
"나,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한지운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몇 걸음 다가와 무릎을 굽히고 내 눈높이에 맞췄다.
그리고 그는 내 손끝에 남은 희미한 빛의 잔상을 보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한 방 안이었다.
"아가씨, 그 손이…"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나는 내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빛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것을 본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