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용주는 내가 되찾는다

1화

청룡동의 아침은 늘 안개로 시작됐다. 절벽 사이로 흘러드는 백색 안개는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하는 일은 같았다. 시야를 지우고, 소리를 삼키고, 검을 쥔 손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 나는 그 안에서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삼백 번째였다. 숨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했다. 팔의 근육이 뻐근했지만 그건 익숙한 통증이었고, 익숙한 통증은 더 이상 통증이 아니었다. 그냥 몸이 하는 말이었다. 아직 더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검을 내려칠 때마다 안개가 갈라졌다가 다시 붙었다. 그 반복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를 자르고 있다는 감각, 그리고 자른 자리가 곧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메워진다는 감각. 세상이 나를 봐주지 않아도 검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또 삼백 번인가."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부인 노용 어른이었다. 나는 검을 거두고 돌아섰다. 사부는 새벽부터 연무장에 나온 사람답지 않게 옷매무새가 흐트러짐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잠도 안 자는 사람 같았다. "오늘은 사백 번을 채울 생각이었습니다." 사부는 혀를 찼다. 짧고 건조한 소리였다. "현룡경 3중에 이른 놈이 아직도 삼백 번씩 검을 긋는다. 남들은 그 나이에 백 번만 채워도 자랑스러워하는데." 칭찬인지 잔소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말투였다. 사부의 말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끝까지 안 알려주고 등을 돌렸다. 나는 그냥 웃었다. 웃는 것도 습관이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배운 것 중 몇 가지는, 굳이 배우려고 한 게 아니라 살다 보니 몸에 붙은 것들이었다. 웃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전생이었다면 고등학교 1학년 나이였다. 그때는 야간자율학습을 째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먹는 게 반항의 전부였다. 참치마요와 불닭 중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게 그 시절 내가 짊어진 가장 큰 선택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새벽부터 검을 삼백 번씩 긋는 게 일상이었다. 가끔은 그 차이가 어이없어서 웃음이 났다. 지금도 그랬다. 사부는 내가 웃는 걸 보고 한 번 더 혀를 찼다. "웃을 힘이 남았으면 검을 더 그어라."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에 대고 잠깐 인사를 하고, 다시 검을 들었다. 삼백한 번째부터는 세지 않았다. 세는 것도 지겨워질 때가 있었다. 청룡동에서 나는 '첫 번째 천재'라 불렸다. 열여섯에 현룡경 3중이라는 경지는, 청룡족 역사를 다 뒤져도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그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 다시 읊었다. 처음엔 낯설었고, 나중엔 무감해졌다. 칭찬도 반복되면 그냥 소음이 됐다. 아버지, 청룡동의 족장 용태산은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표정을 굳혔다. 자랑스러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그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내가 강해질 때마다 조금씩 더 어두워졌다. 마치 내 재능이 자랑이 아니라 어떤 청구서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다. 지금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가 도룡가와의 전쟁에 참전하러 떠나던 날,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있었다. "하진아." 아버지는 갑주를 걸치며 나를 불렀다.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무게가 있었다. 갑주의 쇠고리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철컥. 철컥.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명심해라. 이 세상에 함부로 믿을 자는 없다. 피를 나눈 형제라도, 뼈를 맞댄 벗이라도, 결국은 각자의 이해를 좇는다." 나는 그 말이 지나치게 냉소적이라고 생각했다. 전쟁터로 나가는 사람이 아들에게 남기는 말이 고작 그거라니. 좀 더 따뜻한 말을 기대했다면 내가 순진했던 걸까. 대답 대신 고개만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명심할 생각이 없었다. 세상 모든 걸 의심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피곤한 삶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갔다. 눈빛에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갑주 소리가 안개 속으로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그 경고를 마음 한구석에 그냥 접어두었다. 접어두었다는 건 결국 잊었다는 뜻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금서아를 만났다. 황금용족의 왕녀이자 나의 정혼녀. 금서아는 청룡동 연무장 끝에 서서 검을 다루고 있었다. 금빛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흘러내렸고, 동작 하나하나가 흐트러짐 없이 매끄러웠다.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옷자락이 따라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조차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청룡족의 검술과는 다른 결이었다. 청룡족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쪽이라면, 그녀의 검은 물처럼 흐르다가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식이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보고 있는 거 알아요." 그녀가 검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실례했습니다." 그녀는 그제야 검을 내리고 나를 돌아봤다. 웃음이 얼굴에 걸려 있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웃음이었다. 마치 거울 앞에서 몇 번이고 연습한 것 같은, 흠 하나 없는 각도였다. "실례라니. 정혼자끼리 그런 말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그 말에 별생각 없이 웃었다. 그녀와의 정혼은 두 부족 간의 정치적 합의로 정해진 것이었지만, 나는 언젠가부터 그걸 순수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경고가 무색하게, 나는 금서아를 믿고 있었다. 아니, 믿고 싶어 했다. 그녀와 마주 앉을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청룡동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재능과 경지를 먼저 봤지만, 금서아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그 척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게 맞을 것이다. "수련은 어떠세요." 나는 물었다. 그녀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미세한 표정 변화였지만, 나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놓치지 않은 게 아니라 잘못 읽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쉽지 않아요. 혈룡경 진입 문턱에서 벌써 반년째 정체 중이에요." 그녀의 목소리에 짙은 갈증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갈증을 안타깝게 여겼다. 재능이 있는 사람이 벽에 막히는 걸 보는 건 나로서도 답답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갈증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몰랐던 게 문제였다. 갈증은 사람을 갈증 그 자체로 만든다. 남는 게 없어질 때까지. "제가 도울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했다. 그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그 반짝임의 성질을 나는 읽지 못했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계산하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는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르지 않았다. 고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요?" 그녀가 다가서며 물었다. 목소리가 한 톤 낮아져 있었다. 나는 그 변화가 그저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순진했다고 해도 좋다. 그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이 다가올 때 목소리가 낮아지는 건 그냥 그런 거라고, 나는 어디서 배운 적도 없는 그 공식을 마음대로 믿고 있었다. "제게는 회복에 관한 재능이 있습니다." 나는 어깨를 조금 펴며 말했다. 자랑스러운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순간엔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것처럼 느껴졌다. "용주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손상된 기맥을 복구시킬 수 있어요. 청룡족 안에서도 극히 드문 재능이라고 사부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금서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몇 초쯤 이어졌는데, 나는 그걸 그녀가 감동해서 그런 거라고 해석했다.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자연스럽게 웃었다. "그럼 저를 도와줄 수 있다는 거네요." 그녀의 손이 내 손목을 살짝 잡았다. 따뜻했다. 손가락이 얇고 길었고, 잡는 힘은 부드러웠다. 그날은 그 온기가 진심이라고 믿었다. 온기라는 게 원래 진심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걸 몰랐던 나이였다. "당연하죠." 나는 대답했다. 그때의 나는, 그 대답이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미는 첫걸음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방 안에서 홀로 검을 손질하며 낮의 대화를 떠올렸다. 숫돌에 검날을 문지르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스으윽. 스으윽. 일정한 리듬이었다. 그 리듬 사이로 금서아의 눈빛이 반짝이던 순간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고 싶었다. 나쁜 의미로 해석할 이유가 없었다. 정혼녀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이는 게 뭐가 이상한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검날이 불빛을 받아 흐릿하게 빛났다. 나는 손질을 마치고 검을 검집에 넣었다. 손끝에 남은 기름 냄새가 낯설지 않았다. 이 세계에 온 뒤로 매일 밤 반복한 일이었으니까.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달칵. 달칵. 별것 아닌 소리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겼다. 그냥 바람이 세게 부는 밤이었다. 절벽 사이의 청룡동은 원래 밤바람이 유난히 사나웠다.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는 그 소리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깼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익숙해서 오히려 자장가처럼 들릴 정도였다. 아버지의 경고는 이미 마음속에서 반쯤 접혀 있었고, 그 접힌 부분은 곧 완전히 펴지지 않을 만큼 낡아갈 것이었다. 그날 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으면서, 나는 내일 새벽에도 검을 삼백 번, 아니 사백 번 그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사부의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그 정도는 채워야 했다. 그런 사소한 계획들로 머릿속을 채우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게 내가 그 밤에 한 마지막 평범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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