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청룡동 초입, 저녁 무렵이었다.
하늘이 벌써 어둑했다. 이 시간이 되면 청룡동 골목마다 밥 짓는 냄새가 퍼지고, 아이들 웃음소리가 담벼락을 넘어온다고 했다. 오늘은 아니었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세 사람의 얼굴에서, 그런 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용다인과 용재준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뒤로 용도훈이 팔짱을 낀 채 실눈을 더 가늘게 뜨고 있었다. 별명 그대로였다. 웃을 때보다 화날 때 눈이 더 안 보이는 얼굴이다. 저 눈이 저렇게 접히면, 대개 좋은 일이 없었다.
몸이 무거웠다. 걸음마다 발바닥이 땅에 붙는 느낌이었다. 용주를 잃은 뒤로 이런 상태가 계속됐다. 숨을 들이쉬면 가슴 안쪽이 텅 빈 것처럼 헐거웠고, 손끝은 늘 차가웠다. 이 골목만 지나면 집인데, 하필 이 셋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 첫 번째 천재님 오셨네." 용재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예전엔 이 놈이 화룡족 애들한테 맞고 있을 때 내가 뛰어들어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날 코피를 흘리며 고맙다고 했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저 얼굴을 보니 그 일은 저 놈 기억 속에서 이미 삭제된 모양이었다. 어쩌면 애초에 저장이 안 된 걸 수도 있고.
"용주 잃은 거 진짜야?" 용다인이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 게 아니었다. 확인하고 싶어서 묻는 거였다. 확인하고 나서 마음껏 조롱하고 싶어서. 목소리 끝이 이미 웃음을 참는 투였다.
이 애도 마법표범한테 물렸을 때 내가 구해준 적이 있었다. 다리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걸 업고 뛰었던 기억이 있다. 은혜라는 말은 애초에 저 애 사전에서 지워진 것 같았다. 아니, 사전 자체가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나가려 했다. 발을 옆으로 돌려 골목 벽 쪽으로 붙어 걸었다.
"어딜 가." 용도훈이 앞을 막았다. 실눈이 나를 훑었다. 마치 값을 매기는 상인 같은 눈이었다. 물건 상태를 확인하고, 가격을 깎을 구실을 찾는 눈.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 나는 짧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은 목소리로.
"몸이 안 좋아서?" 용도훈이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조롱하는 투로. "용주 잃으면 다들 그렇게 되나 보네. 좋은 구경이다."
"이제 네가 첫 번째 천재라는 소리, 더는 안 들리겠네." 용도훈이 말했다. "내가 그 자리 대신 채울 거니까 걱정 마."
걱정한 적 없다. 라고 속으로만 대답했다.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로 말싸움을 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다. 몸에 힘도 없는데 입까지 놀리면, 진짜로 그 자리에서 쓰러질지도 몰랐다.
"현룡경 1중이면서 벌써 그렇게 큰소리쳐도 돼?"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삼켰다. 지금은 몸을 낮춰야 할 때다. 반박 한 마디가 지금은 사치였다.
"뭐야, 반박도 안 하네." 용재준이 옆에서 킥킥거렸다. "재미없게."
용재준이 어깨를 밀었다. 세게 밀친 건 아니었다. 딱 어깨 한쪽을 툭 치는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는 게 이런 식으로 확인됐다. 다리가 버텨주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그 정도 밀침은 발밑도 흔들리지 않았을 텐데.
바닥에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팔에 힘을 줘도 그대로 미끄러졌다. 손바닥이 흙바닥에 눌려 자국이 남았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 다 그 자리에서 웃고 있었다.
"저 꼴 좀 봐." 용다인이 말했다. "첫 번째 천재가 저래."
"용주 없는 천재가 무슨 천재야." 용재준이 덧붙였다. "그냥 이름만 남은 거지."
"그러니까 조용히 있으라고." 용도훈이 팔짱을 풀며 몸을 숙였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너 이제 우리 밑이야. 알아들었으면 인사부터 다시 해봐."
창피함보다는, 그냥 견뎌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금 반응하면 더 시끄러워진다. 조용히 삼키는 게 낫다. 그렇게 정리하고 다시 일어섰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는 일단 섰다.
"인사는 관심 없고." 나는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지나갈 길 좀 비켜줄래."
용도훈이 잠깐 멈칫했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곧바로 웃음으로 덮었다.
"어이구, 성깔은 그대로네." 용도훈이 비켜서는 척하다가 다시 어깨로 살짝 밀었다. 이번엔 넘어지지 않았다. 대신 벽에 몸이 부딪혔다. 등이 찌릿했다.
세 사람은 낮게 몇 마디 더 주고받다가,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를 완전히 무시한 채로. 그게 오히려 편했다. 등 뒤에서 웃음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들으며, 나는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혼자 남았을 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괜찮다. 다들 그렇게 볼 거다. 오히려 필요했던 반응이었다. 첫 번째 천재라는 이름값이 사라져야, 아무도 나를 주목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은 조용히 지워지는 게 낫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예전엔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몸의 통증보다, 마음 어딘가가 더 아팠다. 정확히 어디가 아픈지는 몰랐지만.
땅바닥에 앉아 손바닥을 봤다. 흙이 묻어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옷에 흙 좀 묻는 걸로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텐데, 지금은 그마저도 서글펐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아프게 느껴지는 게, 이게 바로 약해졌다는 증거였다.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있었을 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야, 하진아."
걸음 소리가 무거웠다. 몸무게가 있는 사람 특유의 발소리였다. 쿵. 쿵. 규칙적으로 땅을 누르는 소리.
용태웅이었다.
뚱뚱한 체형에 늘 뭘 먹고 있던 얼굴. '돼지 먹는 용'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 얼굴이, 지금은 웃음기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평소라면 어묵이나 만두 같은 거라도 들고 다녔을 텐데, 오늘은 빈손이었다.
"괜찮냐." 용태웅이 물었다.
괜찮지 않다는 게 눈에 다 보일 텐데도 묻는 건, 그냥 형식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걸 알았다. 형식적인 질문이었다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나갔을 테니까.
"응." 나는 짧게 대답했다.
"저 새끼들이 그런 거야?" 용태웅이 골목 끝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미 세 사람이 사라진 방향이었다. "또 시작이네."
"괜찮아." 나는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더 힘을 줘서.
용태웅이 옆에 주저앉았다. 큰 몸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흙바닥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작고 붉은 알갱이. 응결혈단이었다.
"이거 먹어." 용태웅이 내 손에 그걸 쥐어줬다.
손바닥 위에서 알갱이가 미세하게 온기를 냈다. 만지기만 해도 그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이거…"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응결혈단이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청룡동에서 이걸 구하려면 몇 달치 수련 성과를 팔아야 할 정도였다. 아무리 봐도 용태웅 형편에 있을 물건이 아니었다.
"말 마." 용태웅이 손을 내저었다. "내가 몰래 모아둔 거야. 너 이런 상태로 계속 있으면 진짜 죽어. 이거라도 먹어야 몸이 좀 버틸 거 아냐."
"너, 이거 어디서 구했어?" 물었다.
"묻지 마." 용태웅이 대답을 피했다. 표정을 보니, 대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뭔가를 팔았거나, 뭔가를 빚졌거나. 손목에 낡은 시계가 없었다. 예전에 자기 아버지가 물려준 거라며 자랑하던 그 시계였다.
"그 시계…" 나는 그의 손목을 봤다.
"신경 쓰지 마." 용태웅이 손목을 감추듯 소매를 끌어내렸다. "그거 팔아봤자 어차피 안 어울렸어."
거짓말이었다. 그 시계, 아버지가 물려준 거라고 몇 번이나 자랑했었다. 그걸 팔아서 이걸 구했다는 뜻이었다.
"다들 너 피하는데, 넌 왜 안 그래?" 나는 물었다.
용태웅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씩 웃으며 말했다.
"넌 나 안 피했잖아. 예전에 애들이 나 먹는 것만 갖고 놀렸을 때, 너만 안 그랬어."
기억이 났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냥 다른 애들이 하는 게 유치해 보여서 안 어울렸던 것뿐인데. 그런데 저쪽에겐 그게 그렇게 큰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걸로 이 귀한 걸 나한테 준다고?" 나는 물었다.
"그런 걸로도 충분해." 용태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너한테 필요한 건 이거잖아. 계산이나 은혜 갚기 같은 거, 나 그런 거 복잡하게 생각 안 해."
"먹어." 용태웅이 다시 말했다. "지금 먹어야 효과가 좋아."
손안의 알갱이를 봤다. 삼켰다.
몸속으로 뜨거운 기운이 확 퍼졌다. 손끝까지 감돌던 냉기가 조금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숨쉬는 게 조금 편해진 정도의 변화였다. 가슴 안쪽 텅 빈 자리에도 아주 얇게나마 뭔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나았다.
"어때." 용태웅이 물었다.
"낫다." 나는 대답했다. "많이."
"다행이네." 용태웅이 씩 웃었다. 그 웃음에는 진짜 안도가 섞여 있었다.
"고맙다."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고맙긴." 용태웅이 손을 흔들었다. "대신 나중에 뭐든 잘되면, 나 잊지 마라."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에 웃은 것 같았다. 얼굴 근육이 이상하게 뻣뻣했다. 웃는 법을 잊은 것도 아닌데, 웃음이 이렇게 낯설 수 있나 싶었다.
"안 잊어." 나는 대답했다.
"진짜지?" 용태웅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나 이거 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진짜 시계까지 팔았…"
"안 팔았다고 했잖아." 나는 끼어들었다.
"아 그거… 들었냐." 용태웅이 뒤통수를 긁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용태웅이 몸을 일으켰다. 무릎에 손을 짚고 낑낑거리며 일어서는 모습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걸어가려다가,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근데 하진아." 용태웅이 말했다. "너, 진짜 완전히 끝난 거 맞아?"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눈치였다. 나를 살피는 시선이 평소보다 조금 오래 머물렀다.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훑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런 걸 묻는데?" 나는 되물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아니, 그냥." 용태웅이 어깨를 으쓱했다. "눈빛이 좀 다르길래."
그 한 마디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겉으로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손끝만 미세하게 떨렸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말했다.
"그런가." 용태웅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투로 손을 흔들었다. "간다. 내일 또 보자."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놀랐다.
이 놈, 생각보다 눈치가 빠른가.
몸속에 남은 응결혈단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가는 걸 느끼며, 나는 골목 벽에 등을 대고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용태웅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그 마지막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눈빛이 다르다. 그 말이 계속 귓가에서 맴돌았다.
지금 나는, 몸도 마음도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그건 나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저렇게 스치듯 지나가는 눈빛만으로 알아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조금 무서웠다.
앞으로 조심해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