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얼굴 없는 마녀

2화

은퇴 선언을 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최강의 마녀 노릇을 계속하면 몸이 남아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왼쪽 눈, 미각. 이미 그 두 가지를 잃었다. 남들은 다치면 회복 마법으로 낫는다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쓰는 힘은 대가가 반드시 몸으로 돌아왔다. 정직하다고 해야 할지, 지독하다고 해야 할지. '세상에 공짜 없다는 걸 이렇게 몸으로 배울 줄이야.' '대한민국 최강의 마녀'라는 별명은 화려했지만, 그 값은 늘 나 혼자 치렀다. 인터뷰 한 번 없이, 시상식 한 번 없이. 그냥 조용히 눈 하나, 혀 하나 갖다 바치고 끝. '가성비 최악의 커리어였네, 진짜.' 소하가 내려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맛이 안 났다. 당연했다. 혀는 이미 감각을 다 잃은 지 오래니까. 그래도 뜨겁다는 건 느껴져서, 그거 하나로 위안을 삼았다. '뜨겁다는 감각만 남았어도 다행이지.' 나는 셀프로 위로했다. 컵을 감싸 쥔 손바닥으로 온기가 스몄다. 그 온기만으로 향을 상상해봤다. '아마 원두는 좋은 걸 썼을 거야. 소하 걔가 대충 하는 성격은 아니니까.' 맛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게 좀 슬프긴 했다. 소하도 미각이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국립마법연구소에서 태어난 인공 마녀, 그게 소하의 진짜 정체였다. 배양조에서 눈을 뜬 첫날부터 몸의 절반은 이미 '기능'으로만 채워져 있었다고 했다. 미각도 그중 하나. 그녀는 그걸 별거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저는 원래 이런 거니까요. 사장님이랑은 다르죠." 그 말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원래 이런 거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게, 나한테는 더 아팠다. 그녀는 모른다. 자기가 게임 속 주인공이라는 것도, 자기 미래가 정해진 배드엔드 다발이라는 것도. 나만 알고 있었다. 그게 제일 잔인한 부분이었다. 카운터 너머로 소하가 컵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달그락, 달그락. 평범한 오후였다. 이 평범함이 3일짜리 시한부라는 걸 저 애는 모른다. [경고: '잊혀진 마녀의 잔재' 진행 중] [경고: 3일 내 대응 실패 시 배드엔드 확정] 메시지가 다시 뜨자, 나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3일. 무슨 배달 음식 재촉하듯 마감 시간을 준다. '배달 앱이었으면 진작 별점 테러 당했지, 이 시스템은.' 예전 이 게임 할 때도 이런 식이었다. 선택지 하나 잘못 고르면 순식간에 캐릭터가 죽어나가던, 그 우울하기로 유명한 게임. 친구들끼리는 그 게임을 '멘탈 파괴 시뮬레이터'라고 불렀다. 엔딩 하나 보려고 밤새워서 선택지를 되돌리던 게 몇 번이었는지. 그때는 세이브 파일 몇 백 개 돌리면서 최선의 루트를 찾으면 됐다. 파일 이름도 다 기억난다. '진짜최종', '이거아니면진짜', '제발이거로되라'.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 파일명들. 지금은 세이브가 없다. 죽으면 그냥 진짜 죽는다. '다시 시작하기 버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구나.' 리셋 버튼 하나 그리워서 이렇게 손이 떨릴 줄은 몰랐다. 나는 앞치마 끈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카운터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게 뒷방으로 들어가 낡은 상자를 꺼냈다. 나무 상자는 겉보기엔 평범한 잡동사니 통 같았다. 먼지도 일부러 안 닦았다. 누가 봐도 그냥 창고 짐짝처럼 보이게, 그렇게 위장해뒀다. 안에는 오래전에 스스로 봉인해 둔 마법진이 들어 있었다. 최강의 마녀 시절, 마지막으로 썼던 필살 마법. 한 번 풀면 되돌릴 수 없는 대가를 요구하는, 진짜 최후의 카드였다. 왼쪽 눈과 미각. 그게 이미 지불한 값이고, 이걸 다시 쓰면 또 뭘 잃을지 몰랐다. 청각일 수도, 팔일 수도, 어쩌면 이번엔 목숨 자체가 이자로 붙을 수도 있었다. '솔직히 이제 잃을 것도 별로 없긴 한데.' 자조가 절로 나왔다. 눈 하나, 혀 하나 떼어주고 나니까 오히려 마음은 편해졌다는 게 웃긴 부분이었다. '더 잃어봐야 뭐 얼마나 아프겠어.' 라는 만용도 살짝 섞였다. 하지만 봉인을 완전히 풀 생각은 없었다. 소하와 백주희, 두 사람을 배드엔드에서 건져낼 정도로만. 그 이상은 쓰지 않기로 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첫째, 세계를 통제하려는 순간 세계는 반드시 더 큰 값을 요구한다. 둘째, 나는 이미 그 값을 두 번 치렀고, 세 번째는 아마 목숨일 것이다. 셋째, 목숨을 걸 거면 최소한 확실한 순간에만 걸어야 한다. 세 가지를 하나씩 손가락으로 접으며 되새겼다. 마치 시험 전날 암기 카드 넘기듯이. '하나, 둘, 셋. 오케이, 외웠다.' 그러니까 지금은, 최소한만 움직이기로 했다. [히든 스킬: '가면의 계약' 일부 해제 가능] 메시지가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예전 별명, '가면 마녀'.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후드와 가면, 목소리까지 다르게 만드는 은폐 마법. 남자인 내가 여자 최강 마녀로 활동할 수 있었던 비밀이 그거였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도 내가 여자인 줄 안다. 방송에서도, 협회 기록에서도, 심지어 팬클럽 이름까지 '마녀님 팬카페'였다. '뭐, 딱히 정정해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얼굴도 안 보여줬으니 성별이고 나발이고 알 방법도 없었을 거다. 목소리 변조 마법이 아니었으면 진작 들켰을지도 모르지만. '그땐 그게 최선이었다고 치자.' 솔직히 말하면 편한 점도 있었다. 여자 마녀 콘셉트로 나가니까 사람들이 은근히 더 신비하게 봐주더라. '남자 마녀였으면 그냥 아저씨 마법사 취급받았겠지.' 상자 속 마법진을 손끝으로 쓸었다. 따끔한 감각이 손가락 끝을 타고 올라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이었다. 이 마법진, 마지막으로 만졌던 게 몇 년 전인지 기억도 안 났다. 먼지가 아니라 시간이 쌓여있던 상자였다. '좋아, 최소한만.' 나는 결심했다. 소하와 주희를 구한다. 딱 거기까지만 개입한다. 그 이상은 세계가 나를 다시 집어삼킬 테니까. 세계라는 놈은 원래 그런 식이었다. 손가락 하나 내밀면 손목을 물고, 손목을 내밀면 팔을 씹어 삼키는. '적당히가 제일 어려운 거였지, 항상.' 결심을 마치자, 가게 앞쪽에서 소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저기..."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장난스럽게 사장님을 놀리던 애가, 저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상자를 얼른 원래대로 덮어놓고 뒷방 문을 열었다. 뒷방 문을 열고 나가자, 소하가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골목 한복판에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무 빠르게, 너무 진하게. 마치 누가 스모그 머신 전원을 최대로 틀어놓은 것 같았다. 다만 이건 콘서트장 특수효과가 아니라 진짜 재앙의 서곡이라는 게 문제였다. [경고: '잊혀진 마녀의 잔재' 임계점 도달] 메시지가 급하게 점멸했다. 3일 준다더니, 사실 3분도 안 됐잖아. 게임이 원래 이렇게 신뢰가 없었나. '환불 요청 게시판이라도 있으면 도배를 해버렸을 텐데.' 소하가 나를 돌아봤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사장님, 저거... 뭔가요?" 나는 대답 대신 앞치마를 벗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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