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전마도 최후사범

2화

조필상 재무대신은 왕국에서 두 번째로 바쁜 사람이라고 자칭한다. 첫 번째는 국왕이고 자기가 두 번째라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더 바쁘게 다른 사람 예산을 깎으러 돌아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궁정 서기관들 사이에서는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예산이 반토막 난다고 해서 '가위손'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는 소문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땐 웃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을 일이 아니었다. 그가 학과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제일 좋은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최선을 다한 접대였지만, 그 최선이라는 게 세탁한 지 삼 년 된 로브를 다시 다림질한 정도였으니 별로 인상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도 내야 하나 고민했지만 찻잎이 다 떨어진 지 오래였다. 물이라도 끓여야 하나 싶었는데, 그가 문을 여는 소리에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한서준 교수." "대신님, 이런 초라한 곳까지 직접 오시고, 영광입니다." 존댓말이 술술 나왔다. 밥그릇이 걸린 일에는 누구든 예의가 몸에 붙는 법이다. 평소 같으면 대신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다. 대신이 직접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좋은 신호가 아니라는 뜻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학과 운영 실태를 보고받았습니다. 학생이 한 명뿐이더군요." "정예 교육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정예요?" 조필상이 피식 웃었다. 웃음에 존중이 하나도 안 담겨 있는 게 보기 좋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가 사무실 안을 한 번 훑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먼지 쌓인 서가, 낡은 책상, 벽에 걸린 삼십 년 전 학과 현판까지, 하나하나 값어치를 매기는 눈빛이었다. "교수, 영맥 시스템이 정착된 지 벌써 삼십 년이 지났습니다. 요즘 마법사들은 부적 한 장으로 이 학과 전체가 십 년 배워도 못 할 걸 해냅니다. 그런데 이 학과에 매년 예산이 들어가는 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낭비입니다." 돌직구였다. 이럴 땐 반박보다 흥정이 빠르다. 반박은 감정싸움이 되고 흥정은 숫자싸움이 되는데, 숫자싸움에선 그래도 내가 덜 불리했다. "예산을 절반으로 더 줄이면 어떻겠습니까? 지금도 충분히 적지만, 더 줄여도 저는 버틸 수 있습니다." "삼분의 일로 줄이면요." "그, 그건 좀···." "보십시오, 벌써 흥정을 시작하시는군요." 이런 미친. 내가 먼저 흥정을 걸었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상대가 저렇게 냉소적으로 되받아치니 더 할 말이 없어졌다. "예산 문제가 아닙니다, 교수." 그가 서류철을 꺼내 탁자에 내려놨다. 왕실 인장이 찍힌 두꺼운 종이였다. 인장이 찍힌 서류라는 게 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등골이 살짝 서늘해졌다. 이런 서류는 대체로 좋은 소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걸 삼십 년 궁정 물을 먹은 몸이 먼저 알아챘다. "학과 폐지 결의안입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가, 곧바로 계산기가 돌아갔다. 폐지되면 나는 실직이다. 실직하면 밥을 못 먹는다. 밥을 못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 순서가 아주 논리적이었다. 그 논리 사이사이에 소율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저 애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건 좀··· 성급하신 것 아닙니까?" "성급하다니요. 삼십 년 방치한 학과입니다. 오히려 늦었다고 봐야죠." "학생이 있습니다. 배우고 있는 학생이." "한 명이요? 그 한 명 때문에 매년 예산이 나간다는 게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된다는 걸 나도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말이 된다고 우겨야 밥줄이 붙어 있으니 우기는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말이 안 되는 일을 말이 되게 만드는 게 어른의 일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아마 나였을 것이다, 방금 지어낸 말이니까. "영맥 시스템이라는 게··· 완벽합니까, 대신님?" "완벽하죠. 지금까지 삼십 년간 단 한 번도 오류가 없었습니다." "만약 오류가 나면요." 조필상이 눈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순간 짧게, 정말 짧게 흔들렸다. "그런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영맥은 왕국 전역에 깔린 마력 관로를 통해 자동으로 계산하고 보정하는 시스템입니다. 지진이 나든 전쟁이 나든 절대 멈추지 않습니다." "보정이요? 그 보정 로직을 누가 짜고, 누가 유지보수합니까?" 순간 조필상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흔들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흔들림이라는 게 워낙 미묘해서, 어쩌면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는데, 그가 손끝으로 서류철 모서리를 두 번 톡톡 두드리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저 사람도 지금 뭔가를 감추고 있다. "···그건 이 학과와 무관한 이야기입니다." 무관하지 않다는 뜻으로 들렸다. 오히려 관련이 아주 깊다는 뜻으로. "보수 인력이 부족한 겁니까? 그래서 이 학과를 정리하시려는 게···." "교수,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결의안에 서명하십시오. 대신 퇴직금은 규정대로 지급될 겁니다." 퇴직금이라는 말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다. 사람이 밥그릇 얘기에 흔들리는 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방금 그의 표정에서 본 흔들림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퇴직금과 진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내가 우습기도 했다. "서명은 며칠 시간을 주십시오. 학원장님과 상의도 해야 하고···." "학원장은 이미 동의했습니다." "···벌써요?" "오정한 학원장이 먼저 제안한 건입니다, 이 폐지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세게. 오정한은 그래도 삼십 년 전 내가 학생이던 시절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무능하지만 야박하지는 않았던, 그런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술자리에서 몇 번 내 학비 걱정까지 해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와서 내 밥줄을 먼저 끊자고 제안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조필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동작조차 절도가 있어서, 이 사람은 정말로 하루에 몇 명의 밥줄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고 다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흘 드리죠. 사흘 뒤에 서명하십시오. 서명하지 않으면 강제 집행됩니다. 어차피 결과는 같습니다." 말은 정중했지만 내용은 협박에 가까웠다. 정중한 협박이라는 게 있다면 딱 이런 거겠다. 그가 나가고 나서, 나는 서류철을 다시 펼쳐 결의안 조항을 하나하나 읽었다. 대부분 예산 관련 상투적인 문구였는데, 마지막 부칙 하나가 눈에 걸렸다. 제7조. 학과 폐지와 동시에, 학과 소속 유물 및 시설 일체는 왕실 관리로 귀속되며 왕궁 지하 관리소로 이송한다. 유물이라니. 이 학과에 남은 거라곤 낡은 두루마리랑 다 부서진 룬석판 몇 개뿐인데, 그걸 왜 왕궁 지하로 옮긴다는 건지. 재활용도 안 될 폐품을 굳이 왕실 인장까지 찍어서 관리하겠다는 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낡은 걸레짝을 국보처럼 다루겠다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소율이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문틈으로 상황을 엿듣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굳이 그걸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교수님, 어떻게 됐어요?" "학과가 없어질 것 같다." "네에?"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학과 유일한 학생인 소율은, 나만큼이나 여기 목숨줄이 걸려 있는 사람이니 저런 반응이 당연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게 있어." 나는 서류를 소율에게 보여줬다. 제7조를 짚었다. "왜 이 낡아빠진 룬석판을 왕궁 지하로 옮기겠다는 걸까. 심지어 이건 삼십 년 전에 이미 폐기 처분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소율이 서류를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생각난 표정이었는데, 그 표정이 좋은 쪽의 생각은 아닌 것 같아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교수님, 저 룬석판··· 지난주에 제가 청소하다가 봤는데요. 밑에 뭔가 새겨져 있었어요." "뭐가?" "영맥 보수용, 이라고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그제야 조필상이 흔들렸던 그 짧은 순간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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