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룬석판을 다시 살펴본 건 그날 밤이었다. 소율이 청소하다 봤다는 낡은 각인을 찾으려고 사무실 구석에 방치돼 있던 판을 먼지째 끌어냈다. 먼지가 어찌나 쌓였던지 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재채기가 세 번이나 터졌다. 학과 창고 정리는 대체 몇 년째 안 한 건지, 이런 걸 보면 폐지안이 나온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표면에 옅게 새겨진 글자들이 보였다. 손끝으로 먼지를 쓸어내리자 각인선을 따라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죽은 물건치고는 묘하게 살아있는 감촉이었다.
영맥 보수용. 삼십 년 전 각인.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삼십 년 전, 영맥 시스템이 처음 왕국 전역에 깔릴 때, 이 시스템이 완전히 자동으로 돌아가도록 설계됐다는 게 공식 발표였다. 학교 다닐 때 배운 것도, 임용고시 준비하며 외운 것도 그거였다. 완전 자동. 인력 불필요. 유지비 최소화. 그 세 문장이 이 학과 예산을 삭감하는 근거로 매년 재활용됐다.
하지만 이 룬석판이 진짜라면, 애초부터 완전 자동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계속 이 시스템을 보수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교수님, 그럼 이 학과가 그동안 그 보수를 계속 해온 거예요?"
소율이 판 옆에 쭈그려 앉아 물었다. 손전등 불빛이 그 애 얼굴 아래쪽만 비춰서 표정이 반쪽만 보였다.
"모르겠다. 삼십 년 전 은퇴한 전임 교수들 얘기는 나도 들어본 게 없어. 다들 그냥 옛날 학문 좋아하는 노인네들이라고만 알았지."
말하면서도 스스로 믿기지 않았다. 나부터도 이 학과에 발령받았을 때 다른 교수들한테 그런 얘기 들은 적 없었다. 그냥 인기 없는 과목, 곧 없어질 과목, 그런 식으로만 취급받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왜 이 학과가 삼십 년 동안 폐지되지 않고 겨우겨우 명맥만 유지해왔는지. 왜 예산이 매년 깎였는데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는지. 학원 전체가 이 학과를 무시하면서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마치 언젠가 필요할 때를 위해, 최소한의 형태만 남겨둔 것처럼.
"만약 이 학과가 진짜로 영맥을 보수하는 역할이었다면, 학과를 폐지하는 순간···."
"보수가 끊긴다는 거네요."
소율이 내 말을 대신 끝냈다. 똑똑한 아이였다. 나는 그 애가 이렇게 빨리 결론에 도달하는 게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조금 무서웠다. 우리 둘 다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이제 막 알아차린 참이었다.
"그럼 이거 학원장한테 바로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증거가 이거 하나뿐이잖아. 먼지 쌓인 돌판에 흐릿한 글자 몇 줄. 오정한이 이걸 보고 뭐라고 할지 안 봐도 알 것 같은데."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오정한 학원장을 찾아갔다. 조필상이 먼저 폐지안을 제안했다는 게 사실인지 직접 확인해야 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필상이 왜 그렇게 흔들렸는지도 설명이 될 것 같았다.
학원장실은 언제나처럼 화려했다. 벽마다 자동마법으로 작동하는 조명 부적이 은은하게 빛났고, 책상 위엔 값비싼 마도구 장식품이 즐비했다. 이 방 인테리어 비용이면 우리 학과 십 년 예산은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십 년.
"학원장님, 폐지안이 진짜 학원장님 제안이었습니까?"
오정한은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안경을 고쳐 썼다. 안경알 너머로 나를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서류 한 장 더 처리해야 하는 성가심을 담고 있었다.
"한 교수, 이건 시대의 흐름입니다. 자네도 알잖아. 요즘 세상에 영맥 원리 따위 배우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게 아니라, 이 학과가 영맥을 보수하는 역할을 해왔던 건 아니신지요."
오정한의 손이 잠깐 멈췄다. 서류 위로 펜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짧은 정지가 어떤 확신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었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그러니까 사실이군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안경을 벗었다. 콧대를 지그시 누르는 손가락이 피곤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삼십 년 전 영맥을 설계한 사람들이 남긴 안전장치였네. 만일에 대비한. 하지만 그건 삼십 년 전 얘기고, 그동안 단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어. 재무대신 말대로, 이제는 낭비되는 예산일 뿐이야."
"안전장치를 없애는 게 왜 낭비입니까? 화재경보기가 삼십 년간 안 울렸다고 떼어내는 사람은 없잖아요."
"화재경보기 유지비랑 이 학과 유지비를 비교하는 건 좀 무리 아닌가."
"그럼 학과 예산을 반으로 줄이든가, 룬석판 관리 인력만 남기든가 방법이 있었을 텐데요."
"그런 절충안이 회의에서 안 나왔을 것 같나? 이미 다 논의된 얘기야."
"삼십 년간 문제가 없었으면 앞으로도 없을 거라는 게 이 나라 대다수 관료들 논리야, 한 교수. 나도 여기까지 오르는 데 그 논리를 거스르진 못했어."
"학원장님도 아시잖습니까. 이건 도박입니다."
"그래서 자네가 뭘 어쩔 건데."
말투가 갑자기 딱딱해졌다. 지금까지의 피곤한 어조와는 결이 달랐다.
"한 교수, 자네 교사 자격도 이번 결의안에 포함돼 있어. 폐지 학과 소속 교사는 자격이 자동 박탈된다는 규정이 있네. 사흘 뒤 서명이 이뤄지면, 자네는 더 이상 이 학원 사람이 아니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들으니 속이 뒤틀렸다. 뒤틀린다는 표현도 사실 부족했다. 뭔가가 명치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밀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제 자격이 아니라, 왕국 전체가 걸린 문제라니까요."
"증거 있나?"
증거. 낡은 룬석판에 새겨진 흐릿한 각인 몇 줄이 전부였다. 오정한 앞에 내놓기엔 너무 초라했다. 그 각인을 이 사람 책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오정한은 십 초도 안 돼서 "이게 다야?"라고 물을 게 뻔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 얘기 끝났네. 나가보게."
오정한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대화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나는 몇 초 더 서 있었지만, 그가 다시 나를 볼 생각이 없다는 게 분명해서 결국 몸을 돌렸다.
그 등 뒤로, 나는 조필상이 흔들리던 순간의 눈빛과 이 사람의 무심한 등이 겹쳐 보였다. 둘 다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무게를 감당하기 싫어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었다. 조필상은 최소한 흔들리기라도 했지, 오정한은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 태연했다.
밖으로 나와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발밑이 이상하게 울렸다. 처음엔 그냥 지진인가 싶었다. 요즘 지진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벽을 짚었는데, 손바닥에 닿은 벽면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건물 자체가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곧 벽에 걸린 조명 부적들이 하나둘 깜빡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하나, 그다음엔 계단 전체를 따라 순차적으로. 불빛이 꺼지고 켜지는 리듬이 마치 뭔가가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교수님!"
소율이 계단 아래에서 뛰어 올라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고, 뛰어오느라 숨이 가빴다.
"영맥이··· 뭔가 이상해요. 학원 정문 인식석이 갑자기 다 꺼졌어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흘도 아니고, 폐지 결의안에 서명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산이 안 맞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학과 폐지 결정만으로 이런 반응이 나온다고?"
"그런 것 같아요. 룬석판이··· 스스로 봉인되기 시작했어요. 사무실 가보니까 표면에 새겨진 글자들이 전부 검게 변해 있었어요."
"검게? 그게 무슨···."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율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손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창밖으로 학원 곳곳의 불빛이 하나씩 꺼져가는 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하나씩 내리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순서대로. 그 규칙성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그리고 그 순간, 학원 본관 쪽에서 폭음이 터졌다.
쩌엉, 하는 소리가 유리창을 흔들었다. 소율과 나는 동시에 몸을 낮췄고, 계단 창문 너머로 본관 지붕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삼십 년간 조용히 버텨온 뭔가가, 이제 막 서명도 안 된 종이 한 장 때문에 본격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