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다섯 살이었다.
한도의 겨울은 유리처럼 차가웠다.
제경 공작가의 훈련장, 나는 담장 옆에 서 있었다.
돌바닥은 서리로 덮여 있었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하얀 김이 흩어졌다.
발끝이 시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형과 누나가 마나를 다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큰형의 손끝에서 푸른 빛이 일었다.
빛은 검신을 따라 흘러내렸다.
누나의 발밑에서 얼음꽃이 피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유리처럼 반짝였다.
둘 다 열 살이 되기 전에 마나를 다뤘다.
공작가의 핏줄이라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교관들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니었다.
다섯 해를 살았지만, 마나의 기척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다.
손끝에 아무것도 없었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감각.
그게 어떤 것인지, 다섯 살의 나는 매일 확인하고 있었다.
"도훈아, 저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봐라."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한서연.
제경 공작가의 안주인.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는 온도가 없었다.
지난달에도 똑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눈이 아니라 비가 내렸다.
"들어와서 봐라"라는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초대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나는 다가갔다.
발이 무거웠다.
차가운 돌바닥을 걷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어머니는 나를 보지 않았다.
큰형의 검을 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항상 형이나 누나가 있었다.
나는 그 시선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잘했다. 이번 학기에도 수석이겠구나."
큰형이 웃었다.
누나도 웃었다.
나는 웃지 않았다.
웃을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의 웃음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 풍경 밖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태어난 순간부터 그랬을 것이다.
오후 3시.
훈련 교관이 목검 하나를 내밀었다.
"도훈 도련님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형식적인 물음이었다.
나는 알았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질문이라는 걸.
교관의 눈빛에는 기대가 없었다.
그저 절차였다.
셋째 도련님도 형식적으로 한 번은 쥐어봐야 한다는, 그런 절차.
목검을 쥐었다.
무거웠다.
다섯 살의 팔로는 들 수도 없는 무게였다.
목검의 손잡이는 거칠었다.
나무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 냄새가 왜인지 낯설지 않았다.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았다.
하지만 다섯 살의 기억 속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다.
나는 힘을 주었다.
손이 떨렸다.
검끝이 바닥으로 처졌다.
"쯔쯔."
누군가 혀를 찼다.
누군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주변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동정도 아니고, 조롱도 아니었다.
그저 무관심에 가까운 확인.
셋째 도련님은 역시 이 정도구나, 하는.
그 순간이었다.
손끝이 저렸다.
아니, 저렸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뭔가가 밀려들어왔다.
피 냄새.
비명.
갈라진 하늘.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제경 공작가의 훈련장이 아니었다.
어딘가 낯선 벌판이었다.
바람이 붉었다.
땅이 갈라진 자리마다 검은 김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물 떼가 지평선을 뒤덮고 있었다.
검은 이빨.
붉은 눈.
수백, 수천.
발밑에 뭔가 물컹한 것이 밟혔다.
동료의 시신이었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나는 검을 들고 있었다.
서른 살, 아니 그보다 더 나이 든 몸이었다.
손목에는 오래된 화상 흉터가 있었다.
어깨는 무거웠다.
갑옷은 이미 절반이 뜯겨나가 있었다.
동료들은 이미 쓰러졌다.
혼자 남았다.
"먼저 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기억이 흐릿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내 목소리였다.
지친 목소리였다.
더 이상 두려움도 남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던 상대는 뒤돌아 뛰었다.
나는 그 등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마물의 손톱이 가슴을 갈랐다.
숨이 막혔다.
피가 목으로 넘어왔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 어두워졌다.
"도련님!"
박덕수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훈련장 바닥이었다.
목검이 옆에 떨어져 있었다.
돌바닥의 냉기가 등을 통해 스며들었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다섯 살의 몸이 이렇게까지 뛸 수 있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노집사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걱정이 가득한 눈이었다.
그 눈만이 유일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어머니는 이미 자리를 떠난 뒤였다.
돌아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쓰러진 아들보다 큰형의 다음 수련이 더 중요했을 테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목구멍 어딘가에 아직도 그 피 맛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서른 해.
서른 해를 살았다.
평민 출신 모험가로.
무명으로.
그리고 마물 떼 앞에서 죽었다.
이름은 도훈이었다.
지금의 나도 도훈이었다.
이도훈.
같은 이름이라는 사실이 소름 끼쳤다.
우연일까.
우연이 아니라면, 이건 무엇일까.
손이 떨렸다.
다섯 살의 작은 손이었다.
그런데 그 손끝에서 서른 해의 기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박덕수가 내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 온도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 나는 얼음처럼 차가운 손을 잡았던 것 같은데.
"박덕수."
나는 겨우 그를 불렀다.
"네, 도련님."
"나 지금 몇 살이지."
"…다섯 살이십니다."
다섯 살.
숫자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서른 해를 산 것 같은데.
아니, 산 게 맞았다.
다른 삶에서.
박덕수는 나를 안아 들고 방으로 데려갔다.
걸음마다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안정된 숨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기억은 조각조각 떠올랐다.
마물과의 전투, 동료들의 얼굴, 그리고 한 사람.
선우결.
그 이름이 떠오르자 가슴이 저렸다.
삼십 년을 함께한 친구였다.
마법에 능했고,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
선우결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도훈아, 이번엔 또 무모한 짓을 했어."
잔소리 같으면서도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낯설었다.
책의 제목이 떠올랐다.
평범한 영웅.
그 책에는 내 삶이, 아니 도훈의 삶이 담겨 있었다.
영웅담이라고 부르기엔 초라했지만, 그래도 내 삶이었다.
첫 장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는 특별한 재능도, 대단한 혈통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았다."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웃음이 마지막 웃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책 속에 적힌 신체강화 마법의 서술.
그게 틀렸다는 확신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인지도 떠올랐다.
마나를 근육 표면에 얇게 덧씌운다는 서술.
선우결이 관찰한 대로 적은 것이겠지만, 그건 결과였다.
과정이 아니었다.
왜 그런 확신이 드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분명했다.
그 서술을 그대로 따라 하면, 위험했다.
몸이 먼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서른 해 동안 그 마법을 몸에 새겨온 감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처럼.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 손끝은 알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생각했다.
이 몸으로, 이 기억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다섯 살의 몸.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몸.
공작가에서 버려지듯 방치된 몸.
그런데 그 몸 안에 서른 해의 전투 경험이 들어 있었다.
수백 번의 죽음의 고비를 넘긴 감각이.
수천 번의 검을 휘두른 기억이.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나의 문제도 아니었다.
지식의 문제였다.
책이 틀렸다면, 다른 것들도 틀렸을 수 있었다.
선우결이 기록한 모든 것, 세상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이.
그렇다면 나는, 세상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되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확인해야 했다.
내가 정말 기억하는 게 맞는지.
책이 정말 틀렸는지.
방법은 하나였다.
직접 해보는 것.
다섯 살의 몸으로, 서른 해의 기억을 시험해보는 것.
위험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 위험할 것이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 확신의 근원을 모른 채로는, 하루도 편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눈송이 하나가 창틀에 앉았다가 녹아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의 차이를 생각했다.
서른 해의 삶은 사라졌다.
그런데 그 기억은 남았다.
왜 남았는지, 어떻게 남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 기억이 진짜라면, 나는 더 이상 훈련장 담장 옆에 서서 형과 누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눈은 계속 내렸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눈을 감지 않았다.
아침이 올 때까지, 나는 그 확신의 무게를 가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