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부터 나는 서고를 뒤졌다.
제경 공작가의 서고는 넓었다.
책장이 천장까지 닿았고, 그 사이로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이어졌다.
다섯 살짜리 몸으로는 위쪽 서가에 손이 닿지 않았다.
발끝을 세워도 소용없었다.
나는 사다리를 끌고 다녔다.
사서들의 눈치를 보며 서가 사이를 오갔다.
평범한 영웅이라는 책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첫째 서가.
역사서와 가문의 족보가 꽂혀 있었다.
아니었다.
둘째 서가.
마법 이론서와 학술서였다.
역시 아니었다.
셋째 서가로 넘어가기 전,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숨이 찼다.
다섯 살의 폐는 금방 지쳤다.
서른 해를 검을 쥐고 살았던 몸이 아니었다.
이 몸은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그 사실이 낯설게 다가왔다.
힘이 없다는 것.
숨이 찬다는 것.
이런 사소한 것들조차 새삼스러웠다.
오전 10시.
박덕수가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는 항상 일정했다.
서두르지 않았고, 늦지도 않았다.
이 저택에서 가장 예측 가능한 사람이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도련님."
"책 한 권."
"제목이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다섯 살짜리가 그런 책을 찾는다는 게 이상하게 보일 터였다.
하지만 숨긴다고 해서 나아질 것도 없었다.
"평범한 영웅."
박덕수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가 나를 이렇게 바라본 건 처음이었다.
평가하는 눈빛.
아니, 평가라기보다는 재는 눈빛이었다.
"그건 모험가 이야기책입니다. 아이들이 읽을 만한 게 아닙니다만."
"찾을 수 있어?"
그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다섯 살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찾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서가 안쪽에 있을 겁니다."
셋째 서가 안쪽.
그의 말대로였다.
먼지 쌓인 책들 사이에 낡은 표지 하나가 끼어 있었다.
누구도 손대지 않은 자리였다.
나는 그 책을 꺼내지 못했다.
손이 닿지 않았다.
박덕수가 대신 꺼내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가 책을 건넸다.
표지가 손끝에 닿는 순간,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무게였다.
그날 오후, 나는 그 책을 손에 넣었다.
표지는 낡았다.
가죽이 벗겨지고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누군가 여러 번 읽은 흔적이었다.
아니면 오랜 시간 방치된 흔적이었다.
손이 떨렸다.
책장을 넘겼다.
첫 페이지.
서문이었다.
선우결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뭔가가 가슴 안쪽에서 움직였다.
그리워야 하는데 그리워지지 않았다.
반가워야 하는데 반갑지 않았다.
그저 낯선 이름 같았다.
아니, 낯설지 않은데 낯선 척하는 이름 같았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내 이야기였다.
마물 떼, 동료들의 죽음, 그리고 마지막 전투.
선우결이 쓴 문장 하나하나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나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잠시 멈췄다.
여기, 이 전투.
내가 겪었던 그 전투였다.
북부 관문에서 마물 떼를 막았던 날.
동료 셋을 잃었던 날.
책은 그날을 영웅적으로 그렸다.
용감한 전사가 홀로 관문을 지켰다고.
동료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실제로는 아니었다.
나는 그날 도망치고 싶었다.
동료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검을 놓지 못했을 뿐이었다.
용기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책은 그걸 몰랐다.
선우결도 그걸 몰랐을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다르게 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나왔다.
신체강화 마법.
『마나를 단전에서 사지 끝으로 밀어낸다. 힘을 극한까지 밀어내는 순간, 육체는 한계를 넘어선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읽었을 때, 확신이 굳어졌다.
아니었다.
그건 틀렸다.
실제로는 반대였다.
사지 끝에서 단전으로 마나를 끌어당겨야 했다.
밀어내는 게 아니라, 압축하는 것이었다.
나는 왜 그걸 아는지 몰랐다.
하지만 확신했다.
서른 해를 그 방법으로 싸웠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도.
손끝에서 시작해서 단전으로.
그렇게 마나를 모으고, 압축하고, 폭발시키듯 사용했다.
밀어내는 방식으로는 힘이 흩어질 뿐이었다.
집중되지 않았다.
선우결은 왜 반대로 적었을까.
다른 마법사에게 자문을 받았던 걸까.
아니면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걸까.
기억을 더듬었다.
전장에서, 야영지에서, 선우결에게 마법을 설명해준 적이 있었던가.
말로 설명하기엔 너무 감각적인 부분이었다.
손끝의 저림, 뜨거움, 압축되는 느낌.
그런 걸 언어로 옮기는 게 애초에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답은 없었다.
다만 이 책을 따라 마법을 배우는 사람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마나를 밀어내면, 몸이 견디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 책이 세상에 얼마나 퍼졌을까.
누가 이걸 보고 마법을 연습했을까.
그 생각이 들자 목이 마르기 시작했다.
확인해야 했다.
나는 하루 종일 그 생각에 붙잡혀 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도, 목욕을 할 때도, 침대에 눕기 전까지도.
확인해야 했다.
내 기억이 맞는지, 이 몸으로도 그게 가능한지.
오후 9시.
모두가 잠든 시각.
저택은 조용했다.
바람 소리만 창문을 두드렸다.
낮에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려는지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나는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다섯 살짜리 발이 그 냉기에 움츠러들었다.
작은 손을 펼쳤다.
마나를 느껴보려 했다.
다섯 살 아이의 몸에 마나가 있는지도 몰랐다.
눈을 감았다.
서른 해의 감각을 떠올렸다.
손끝에서 시작되는 감각.
집중했다.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집중했다.
있었다.
마나가 있었다.
미약했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 순간의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안심이라고 하기엔 부족했다.
확신이라고 하기엔 지나쳤다.
그저 몸 안 어딘가에서 뭔가가 반응했다는 사실만 남았다.
나는 책에 적힌 대로 시도하지 않았다.
반대로 했다.
사지 끝에서 단전으로.
손끝에 의식을 모았다.
발끝에도.
그 두 지점에서 뭔가를 끌어당기듯 상상했다.
숨을 참았다.
손끝이 저렸다.
뭔가 뜨거운 것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처음엔 미미했다.
저림이 조금씩 강해졌다.
발끝에서도 비슷한 감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
단전 근처.
그리고 갑자기, 통증이 왔다.
숨이 막혔다.
가슴이 조여들었다.
다섯 살의 작은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흐름이었다.
방법은 맞았다.
방향은 맞았다.
하지만 몸이 그걸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서른 해 동안 단련된 육체와 다섯 해를 산 육체.
그 격차를 계산하지 못한 건 내 실수였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눈앞이 흐려졌다.
숨을 쉬려 했지만 폐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그 생각이 스쳤다.
두 번째로 죽는 인생이라니.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안에 계십니까."
박덕수의 목소리였다.
대답할 힘이 없었다.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신음만 나왔다.
문이 열렸다.
그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를 발견하고 곧바로 안아 올렸다.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다급함을 느꼈다.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겨우 눈을 떴다.
시야가 흔들렸다.
그의 얼굴이 두 개, 세 개로 보였다가 다시 하나로 겹쳐졌다.
"마나가… 이상했어."
"마나를 다루셨습니까? 이 나이에?"
그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섞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섯 살 아이가 마나를 다뤘다는 게, 그에게는 상식 밖의 일이었다.
"위험한 일입니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마나를 억지로 끌어올리면 명이 상할 수도 있습니다."
"알아."
"아신다면서 왜 하셨습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확인해야 했다는 말은, 이 상황에서 설명할 수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서른 해를 살았던 검사였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선우결이 쓴 책의 마법 이론이 틀렸다고, 그걸 확인하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말해도 미친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박덕수는 나를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손길이었다.
그 손은 크고 따뜻했다.
거칠었다.
검을 쥐어본 손이라는 걸, 그 감촉만으로 알 수 있었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 없어야 합니다."
"약속."
나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걸.
박덕수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뭔가 더 묻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필요한 것 이상을 캐묻지 않는 사람.
그게 오히려 더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가 방을 나갔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날 밤 통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손끝이 계속 저렸다.
발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저림 속에 뭔가가 있었다.
분명히 뭔가가 움직였다.
미약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방향은 맞았다.
속도가 문제였다.
너무 빠르게 끌어당긴 게 문제였다.
책이 틀렸다는 확신은 더 강해졌다.
다만 확신만으로는 부족했다.
증명해야 했다.
누구에게 증명할 것인가.
그 답은 아직 없었다.
어쩌면 증명할 상대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필요한 확인이었는지도 몰랐다.
창밖의 눈은 그새 그쳐 있었다.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차가운 빛이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나는 그 빛을 보며 생각했다.
다음엔 더 조심스럽게, 더 정확하게 해야 한다고.
속도를 늦추고, 흐름을 조절하고, 몸이 감당할 만큼만 끌어당겨야 한다고.
하지만 그 다음이 언제가 될지는,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박덕수의 눈은 오늘 밤 일을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던 그 짧은 순간.
분명 뭔가를 더 알아내려는 눈빛이었다.
그가 다음에 무엇을 물어올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숨길 수 있을지,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저림이 손끝을 타고 다시 올라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선우결이 적어놓은 그 틀린 문장이었다.
밀어낸다.
그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누군가 그 문장을 그대로 따라 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