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영애인데 메이드가 꿈이라니

2화

강준서가 백작의 서재로 향하는 복도는 유독 길게 느껴졌다. 대리석 바닥에 깔린 낡은 카펫이 발소리를 삼켰다가 다시 뱉어내는 통에,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기억을 두드리는 것처럼 귀에 거슬렸다. 벽을 따라 늘어선 초상화들의 눈이 하나같이 그를 좇는 듯했는데, 그중 어느 하나도 그가 찾는 얼굴은 아니었다. 십오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저택 어디에도 그녀의 초상은 걸려본 적이 없었다. 서재 문을 두드리기 전, 그는 잠시 손을 멈추고 문틀에 이마를 가까이 댄 채 숨을 골랐다. 손등에 힘줄이 팽팽하게 곤두섰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그 짧은 순간, 눈앞에 떠오른 것은 서류 속 이름이 아니라 십오 년 전 어느 봄날의 정원이었다. 그날, 갓 기사 서임을 받은 강준서는 저택의 새로 들어온 메이드 윤서영을 처음 보았다. 담장을 따라 늘어선 라일락 향이 유독 짙었던 오후였는데, 그녀는 다른 하녀들과 달리 유독 조용한 걸음으로 정원을 걸어 다녔다. 그 발걸음이 마치 물뱀이 수면을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나아가는 것 같아서, 그는 오래도록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던 기억이 있었다. 바구니를 든 손끝이 조심스러웠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걷는 자세마저도 남의 눈을 피하려는 듯 조심스러웠다. 그때는 몰랐다, 그 조용한 여인이 훗날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 그리고 그 여인이 백작 도련님의 눈에 들어,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한 사랑 끝에 저택에서 조용히 사라지게 될 줄도. 그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지켜보기만 했고, 그녀가 짐을 싸서 저택을 떠나던 날에도 배웅조차 나가지 못한 채 창문 뒤에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었다. 마차가 저택 정문을 빠져나갈 때, 그는 커튼 자락을 손끝으로 움켜쥔 채 숨을 죽였다. 목구멍 안쪽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받쳐 올랐지만, 그는 끝내 그것을 소리로 내뱉지 못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겠나.* 그 생각은 오래도록 그를 갉아먹었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리움이 원망으로 변질되어갔다. 처음에는 그저 그리움이었다. 그녀의 뒷모습, 그녀가 흥얼거리던 낮은 노랫가락, 정원 벤치에 앉아 스치듯 나누었던 짧은 대화들. 그러나 세월이 그 기억들을 하나씩 갈아 없애는 대신, 그 자리에 원망이라는 딱딱한 결정체를 심어놓았다. 그녀를 떠나보낸 것이 자신의 무력함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는 그 원망의 방향을 조금씩 다른 곳으로 돌려왔다. 백작에게,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남긴 딸에게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백작 이강호는 서류에 눈을 박은 채 손짓으로 앉으라는 표시만 했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 빛이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잉크병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강준서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사실만을 담담히 전달했다. "서관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것은 저택 밖 인물입니다. 이름은 서하린, 최근 가사 일로 저택을 드나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백작은 서류를 흘깃 넘겨보며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별다른 흥미도 없다는 듯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 "사생아라고 하지 않았나. 흔한 일이지. 처벌은 규정대로 하도록." 그 말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었는데, 강준서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졌다. 사람 하나의 생사를 서류 뒤로 미뤄두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저 얼굴. 강준서는 턱에 힘을 주며 그 말을 삼켰다.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스스로에게도 낮게 들려왔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짧게 답하고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백작이 다시 펜을 놀리는 소리가 사각거리며 들려왔는데,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그의 귓속에 오래 남았다. 서재를 나서며 강준서는 자신의 손이 다시 굳어가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은 정말 모르는구나. 자신이 버린 여자의 이름조차, 그 딸의 존재조차. 십오 년 전 그 봄날, 정원을 걷던 여인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저 남자의 기억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사실에 안도해야 할지 분노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한 채 복도를 걸었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저녁 빛이 그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를 얹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이 무게를 짊어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물음에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는 복도 끝의 계단을 내려섰다. 장면은 저택에서 멀지 않은 낡은 골목의 한 셋집으로 옮겨갔다. 담벼락에 낀 이끼가 검푸르게 번져 있었고, 지붕 틈으로 스며든 저녁 빛이 방 안 벽에 희끄무레한 줄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서하린은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헝겊으로 그릇을 닦고 있었는데, 손끝의 움직임이 익숙하고 정교해서 마치 오래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보였다. 헝겊을 접어 쥐는 방식, 그릇 테두리를 문지르는 손목의 각도까지도 누군가 오래도록 가르쳐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열넷의 나이였으나 그 손끝만은 어른의 것을 닮아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지금, 하린은 하루하루를 남의 집 허드렛일로 버텨내고 있었다. 빨래며 청소며,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 모든 노동의 이면에는 하나의 오래된 다짐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메이드가 될 거야.* 그것은 단순한 생계의 방편이 아니라, 그녀가 아주 먼 곳에서부터 품고 온 꿈이었다. 여섯 살 무렵부터 어렴풋이 떠오르던 낯선 기억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을 맞이하던 어느 다른 삶의 잔상들이 그녀의 안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은쟁반에 찻잔을 받쳐 들고 긴 복도를 걷던 감각, 촛불 아래에서 식기를 정리하던 손의 온기까지도 그녀는 또렷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기억이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지어낸 꿈인지 하린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도 슬픈 눈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왜 슬퍼하느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기만 했었다. 그날 오후, 낯선 발소리가 셋집 앞에 멈추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유독 규칙적이고 절제되어 있어서, 하린은 그것이 평범한 이웃의 방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헝겊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문을 열자 짙은 갑주를 걸친 남자가 서 있었는데, 그 눈빛이 마치 먹이를 노려보는 짐승처럼 차가워서 하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갑주에 매인 문장이 오후 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서하린인가." 남자가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지만, 그 무감함이 오히려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하린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문틀을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다. "백작가에서 왔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따라오도록."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하린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조차 그녀의 귀에는 아득하게 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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