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무도회 당일, 대연회장은 황금빛 샹들리에 불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아래 화려한 드레스를 두른 귀족 자제들이 삼삼오오 모여 웃음소리를 흩뿌렸다. 천장에 매달린 수백 개의 크리스털 조각들이 불빛을 받아 잘게 부서지듯 반짝였고, 그 아래로 흘러내리는 빛은 마치 황금가루가 공중에 흩날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악단의 선율이 높은 천장을 타고 울려 퍼지며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물들였는데, 현악기의 낮은 울림과 손님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숨결처럼 회장을 채우고 있었다. 그 화려함 속에서 하린은 벽을 등지고 서서 손님들에게 음료를 나르는 임시 메이드 중 하나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앞치마 자락을 단정히 여미고 은쟁반을 든 그녀의 걸음걸이는 다른 임시 메이드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시선을 정면보다 살짝 낮춘 채, 손님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는 그 동작이 마치 오래도록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누군가에게 배운 적 없어도 이미 몸이 알고 있는 자세였는데, 그것이 어디서 온 습관인지 그녀 자신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몇몇 손님들이 그 매끄러운 서빙에 시선을 던졌고, 그중 한 귀부인이 낮게 감탄하며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
"저 아이 손놀림이 제법이군요. 저런 아이가 왜 저런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옆 사람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야 임시로 부린 아이니까요. 정식 하녀도 아닐 텐데요."
그 말이 하린의 귀에까지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다음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시선쯤은 이미 익숙했다. 놀라움과 무시가 동시에 담긴 말들, 칭찬처럼 들리지만 결국 자신을 이 자리에 속하지 못할 존재로 규정짓는 말들.
하지만 그 평온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연회장 한쪽에서 서빙을 돕던 나이 든 하녀 하나가 하린을 향해 일부러 발을 뻗었고, 그 순간 은쟁반 위 유리잔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챙, 하는 얇은 유리 마찰음이 짧게 울렸고, 주위의 몇몇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하린은 순간적으로 무릎을 굽히며 쟁반의 균형을 잡아냈고, 잔 하나가 미끄러지려는 것을 손끝으로 붙잡아 세웠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다시 허리를 세우고 걸음을 옮겼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을 감출 만큼의 훈련은 이미 몸에 배어 있었다.
넘어지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오늘 밤은 아직 지켜낼 수 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몇몇 손님들 사이에서 낮은 감탄이 흘렀고, 그중 한 청년이 흥미로운 듯 웃으며 옆 사람에게 물었다.
"저 메이드는 어디서 데려온 아이인가.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데. 저런 위기에서도 잔 하나 떨어뜨리지 않다니."
그 말에 답을 하려던 다른 하녀가 입을 열려는 찰나, 저 멀리서 서늘한 시선이 하린을 향해 던져지고 있었다.
강준서였다. 그는 벽 한쪽에 기대선 채 연회장을 감시하듯 살피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하린을 향할 때마다 미묘하게 길어졌다.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마치 얼어붙은 호수 같은 눈빛이었다. 나이 든 하녀가 다시 한번 짜증 섞인 눈빛으로 다가와 하린의 팔을 붙잡으며 낮게 위협했다.
"네가 여기서 잘난 척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어차피 곧 쫓겨날 사생아 주제에. 그런 자세로 서 있어봐야, 결국 여긴 네 자리가 아니야."
그 말에 하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녀는 팔을 조용히 빼내며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손아귀에서 팔을 빼내는 그 짧은 동작 속에는, 더는 밀리지 않겠다는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강준서가 무심한 듯 그쪽으로 걸어와 나이 든 하녀에게 짧게 말을 던졌다.
"그쪽은 다른 자리로 가서 손님을 살피도록."
그 말에는 명령의 무게가 실려 있었기에, 하녀는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하린을 향해 흘긴 눈빛에는 여전히 앙심이 섞여 있었지만, 강준서 앞에서는 그 이상의 말을 뱉지 못했다. 강준서는 그 이상의 말을 덧붙이지 않은 채 다시 벽 쪽으로 돌아섰고, 하린은 그 뒷모습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으나 그는 이미 시선을 돌린 뒤였다.
그 짧은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린은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도운 것인지, 그저 눈앞의 소란이 성가셨던 것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 작은 도움 덕분인지, 이후 연회장 안에서 하린을 향한 노골적인 텃세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다른 하녀들도 더는 그녀의 앞을 막아서지 않았고, 몇몇 손님들은 그녀가 나르는 음료를 받아 들며 짧은 감사의 말을 건넸다. 유리잔을 내려놓을 때마다 가벼운 목례가 돌아왔고, 그것만으로도 하린의 어깨는 조금씩 가벼워지는 듯했다.
그중 한 젊은 영애는 하린의 손놀림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나지막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니? 서빙하는 자세가 참 곱구나. 어디서 배운 거니?"
하린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밝히자, 그 영애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린이라, 좋은 이름이네."
별다른 뜻 없이 건넨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았다. 그 순간만큼은, 저택 안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사생아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메이드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하린의 가슴을 스쳤다. 은쟁반을 든 손에 힘이 조금 풀렸고, 등을 짓누르던 무언가도 잠시 가벼워지는 듯했다.
*이대로라면, 나도 이곳에서 무언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고,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는 사람이 있고, 실수를 눈감아 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하린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었다.
그 짧은 안도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연회장 입구 쪽에서 갑작스러운 술렁임이 일었다. 악단의 선율이 잠시 흐트러지고,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쏠렸다.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퍼져나가며 연회장 전체를 훑고 지나갔고, 몇몇 이들은 발끝을 세워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하린도 은쟁반을 든 채 그쪽을 돌아보았는데, 화려한 청록빛 드레스를 두른 소녀가 계단 위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드레스 자락이 계단을 따라 물처럼 흘러내렸고, 목에 걸린 보석이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그 걸음걸이는 우아하면서도 확고했고, 마치 애초부터 이 자리의 중심이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주위를 압도하는 기품이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연회장의 공기를 바꾸어놓는 듯했다.
"이서윤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낭독하는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울려 퍼지자, 손님들 사이에서 일제히 낮은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몇몇 이들은 몸을 숙여 예를 표했고, 몇몇은 감탄 어린 눈빛으로 그녀의 걸음 하나하나를 좇았다.
하린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손끝에서 쟁반이 미끄러질 듯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백작의 적녀. 자신과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태어난 존재가, 지금 눈앞의 계단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같은 핏줄에서 나왔으되, 하나는 빛 속에서 태어나 환대를 받고, 하나는 그늘 속에서 태어나 이름조차 함부로 불리는 처지였다.
그 순간 강준서의 시선도 그쪽을 향해 굳어졌고, 하린은 자신이 서 있던 자리가 갑자기 한없이 좁아지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방금 전까지 조금씩 부풀어 오르던 안도감이, 그 이름 하나에 순식간에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연회장 안의 모든 시선이 계단 위 그 소녀에게 쏠린 가운데, 하린만이 여전히 은쟁반을 손에 든 채, 그 화려한 등장이 자신의 존재를 어디까지 지워버릴지 알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계단을 내려온 이서윤의 시선이, 마치 우연인 듯, 잠시 연회장 한쪽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눈길이 정확히 어디에 머물렀는지, 하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만이, 그 시선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