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심문실은 지난번 미나가 앉았던 그 자리와 다르지 않았으나, 하린에게는 그곳이 마치 처음 보는 낯선 세계처럼 느껴졌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 안에는 등불 하나가 낮게 걸려 있었고, 그 빛이 벽에 드리운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흔들리며 방 안의 정적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하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겁을 먹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최대한 작게 만들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이 자꾸만 척추를 곧게 세우려 했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시선을 바닥에 붙박아 두었다.
강준서는 책상 너머에서 서류를 뒤적이며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종이 위로 미끄러지는 그의 손끝은 능숙했지만, 그 시선이 하린의 얼굴에 머무는 순간만큼은 미세하게 멈칫거렸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는 어떤 익숙한 감정이 명치 아래에서 뒤틀리는 것을 느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굳이 이름 붙이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의 눈매가, 조용히 내려앉은 속눈썹의 그림자가 낯설지 않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마치 오래전 어딘가에서 스쳤던 얼굴을, 세월이 흐른 뒤 우연히 다시 마주한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보름 전 밤, 서관 응접실에 들어간 적이 있는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건조했으나, 그 안에는 답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한 냉정함이 배어 있었다.
하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가사 일로 잠시 저택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관에는...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 잠시 지나쳤을 뿐입니다. 그곳에서 이상한 걸 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만진 적이 없습니다."
"이상한 문양이 벽에 타들어가 있었고, 유리가 깨져 있었다. 촛대는 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그 누구의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그 말에 하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발자국이 없었다는 말이 어째서인지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그녀는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모릅니다." 하린은 그렇게 답했지만, 그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짓을 말하는 자의 떨림이 아니라,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무언가에 대한 불안의 떨림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 응접실을 지나던 순간 손끝에서 이상하게 뜨거운 기운이 스쳤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마치 불씨가 손바닥 안에서 잠시 숨을 쉬었다가 사라진 듯한, 설명할 수 없는 온기였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므로.
강준서는 그 침묵의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모른다면서 왜 목소리가 흔들리는가."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두 손을 책상 위에 겹쳐 얹었다. 그 동작이 마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하겠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하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두려움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억눌린 억울함도 함께 섞여 있었다. 입술이 몇 번이나 열렸다가 다시 다물어졌고, 그 사이 목구멍 안쪽이 타는 듯 뜨거워졌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만 이렇게 심문을 받는 건가요. 다른 하녀들도 그날 밤 저택 안팎을 오갔을 텐데, 유독 저만... 저는 그저 백작님의... 사생아일 뿐인데."
그 말이 스스로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하린은 목덜미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단어를, 남의 입을 통해 들은 적은 있어도 자신을 지칭하는 그 낙인 같은 말을 이토록 또렷하게 제 입으로 소리 내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오래도록 목구멍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 있던 것을 억지로 뽑아낸 듯한 기분이었고, 뽑아낸 자리에서는 여전히 피가 배어나는 듯한 통증이 남았다.
강준서는 그 말에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그녀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다시 냉정한 표정 뒤로 감춰졌다. 손가락 하나가 책상 위를 가볍게 두드리다 멈췄고, 그 짧은 정지의 순간 동안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물러가도 좋다. 다만 저택 밖으로 함부로 나다니지 말도록. 다시 부를 것이다."
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무릎이 후들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겨우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며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로 그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뒤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셋집으로 돌아온 하린은 낡은 나무 서랍 안쪽에 넣어두었던 작은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 중 하나였는데, 금이 간 표면에 은박이 벗겨져 있어 얼굴이 온전히 비치지 않았지만 그 흐릿함마저 익숙했다. 방 안에는 촛불 하나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벽에 길게 늘어뜨렸고, 창밖에서 스며드는 밤바람이 커튼을 흔들 때마다 그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짙은 밤색 눈동자와 살짝 위로 치켜올라간 눈매, 그리고 어머니와는 확연히 다른 콧대의 선. 어머니는 언젠가 술기운을 빌려 딱 한 번, 하린의 생부가 은빛 머리카락과 짙은 남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순간에는 흘려들었던 말이었는데, 지금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자신의 이목구비 곳곳에서 그 낯선 얼굴의 조각들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마치 두 개의 그림을 겹쳐 놓은 듯, 자신의 얼굴 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의 얼굴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생각이 들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민의 딸이라 부르기에는 낯선 이목구비를 지녔고, 귀족의 딸이라 부르기에는 너무도 가난한 삶을 살아왔다. 그 사이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붙박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 속에서 흐릿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심문실에서 내뱉었던 그 말이 다시 귓가에 맴돌았다. *사생아.* 스스로 내뱉었으면서도 여전히 낯설고 아픈 그 단어가, 이제는 거울 속 얼굴에도 덧씌워진 듯했다.
하린은 거울을 내려놓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는 메이드가 될 거야. 귀족도 사생아도 아닌, 그냥 나로.*
그 다짐과 함께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저택 정문에 붙어 있던 낡은 공고문이었다. 며칠 전 저택을 나서던 길에 우연히 보았던 그 종이에는, 곧 열릴 백작가의 사교계 데뷔 무도회를 위해 임시 메이드를 모집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글자들을 떠올리는 순간, 이상하게도 손끝에 남아 있던 서늘한 긴장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하린의 손끝이 다시 그 거울 위를 스쳤다. 그 순간 금이 간 거울 속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더니, 얼굴도 형체도 분간할 수 없는 신비한 존재의 그림자가 떠올랐다. 하린이 놀라 손을 떼기도 전에 낯선 목소리가 귓가가 아닌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잠든 불씨를 깨워, 네가 걸어갈 길을 밝히리라." 빛이 손끝으로 스며드는 순간 뜨거운 기운이 팔을 타고 심장까지 번졌고, 손바닥 위에는 작은 불꽃을 닮은 문양이 잠시 떠올랐다. 그것이 축복이라는 사실을 하린은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존재와 문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처음으로 어떤 결심으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 응접실의 문양이, 그리고 자신의 손끝에서 스쳤던 그 뜨거운 기운과 신비한 존재가 남긴 축복이, 앞으로 자신을 얼마나 깊은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들일지를. 촛불이 마지막으로 크게 흔들리며 방 안의 그림자를 한 번 더 길게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는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듯 하린의 등 뒤에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