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몇 달이 지났다. 정확히는 세지 않았지만, 뒤집기를 하고 목을 가누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감안하면 대략 그쯤이었다.
이 몸에 적응하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회사 다닐 때는 몸을 쓸 일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온몸이 근육을 새로 배우는 중이었다. 팔 하나 드는 데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서른몇 해 살아온 정신이 아기 몸에 갇혀 있으니 이런 식으로 삐걱거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펴는 데 며칠이 걸렸다. 어느 날은 왼손이 말을 안 들어서 오른손만 붙잡고 벽을 짚었는데, 그마저도 균형을 잃고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박선희가 그걸 보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나동그라진 게 뭐가 좋다고.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겉으로는 그냥 눈만 깜빡였다. 표정 관리도 근육 훈련의 일부였다.
김철웅과 박선희는 낮엔 회계일을 했다. 이 세계에도 회계라는 게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곧 이해가 됐다. 마을이 있으면 세금이 있고, 세금이 있으면 장부가 있는 법이었다. 어디를 가도 사람 사는 꼴은 다 비슷했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마을 상단이나 신전에서 맡겨온 장부를 펼쳐놓고 숫자를 맞췄다. 나는 그 옆 바닥에 깔린 담요 위에서 딸랑이를 흔들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가끔 계산이 안 맞으면 박선희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고, 그럴 때마다 나도 같이 이마를 짚어주고 싶었지만 손이 짧아서 내 얼굴에 닿는 게 고작이었다.
"이거 이월된 곡물세가 왜 두 번 잡혀 있어요?"
"상단 쪽 서기가 실수한 거지, 뭐. 우리 잘못 아니잖아."
"그래도 우리가 서명하면 우리 책임이 되는데."
이런 대화를 듣고 있으면 전생의 회의실 풍경이 겹쳐 보였다. 세계가 바뀌어도 야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똑같았다.
김철웅이 손을 뻗으면 촛불이 저절로 두 배로 밝아졌다. 처음엔 심지가 이상한 건가 했는데, 아니었다. 그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마법이었다. 별거 아닌 것처럼 손을 슥 뻗는데 방 안이 확 밝아지는 걸 보면, 이게 이 세계에서는 얼마나 흔한 재주인지 짐작이 갔다.
"여보, 도윤이도 마력 검사 한번 해봐야 하는데."
박선희가 장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신전 가면 되잖아.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래도 너무 늦으면 등록이 밀린대요. 이번 주에 가요."
마력 검사라는 게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딸랑이를 씹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검사받으면 뭐가 나올까.'
답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전생에 마법이라곤 무협지에서나 읽어본 인간이었다. 이 세계에 온 지 몇 달, 몸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손끝이 저릴 때는 있었지만 그건 마력이 아니라 그냥 자세가 불편해서였다.
다음 날, 신전에 가서 마력 검사를 받았다. 신전은 마을 중앙에 있는 회색 석조 건물이었는데, 겉보기엔 성당 같기도 하고 관공서 같기도 했다. 문 앞에는 이미 아기를 안은 부모들이 줄을 서 있었다. 등록 대기 줄이라는 게 이 세계에도 있다는 게 웃겼다. 여기도 대기표가 있었으면 딱이었을 텐데.
검사관은 젊은 드워프 여성이었고, 팔뚝이 내 몸통보다 두꺼웠다. 그녀가 내 이마에 반짝이는 수정을 갖다 댔다.
수정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 이게 왜 이러지."
검사관이 수정을 몇 번 흔들더니 다시 갖다 댔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옆줄에서 검사받던 아기는 수정이 노랗게 빛나면서 부모가 환호성을 질렀다. 나만 조용했다.
"고장인가 봐요, 새 걸로 해볼게요."
새 수정도 마찬가지였다. 검사관은 이번엔 서랍에서 더 큰 수정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그것도 그대로였다. 검사관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나는 그 표정을 보면서 확신했다. 이거 고장 아니다.
"혹시 수정 세 개가 동시에 고장 났을 수도 있나요?"
박선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사관은 곤란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확률은... 거의 없죠."
거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검사관은 계속 수정을 흔들어봤다. 나는 그 손짓을 지켜보며 이 상황이 얼마나 웃긴지 실감했다. 회사 다닐 때 시스템 장애 나면 다들 "혹시 제 컴퓨터만 이런가요"부터 시작해서 결국 서버 문제였던 걸 알아내는 데 반나절씩 걸렸는데, 지금 딱 그 꼴이었다. 다만 이번엔 서버가 아니라 나였다.
결국 검사관은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아직 어려서 그런가 봐요, 나중에 다시 해보시죠"라고 말했다. 박선희와 김철웅은 그 말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났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라니.
마력이 없는 인간. 그것도 마법이 일상인 세계에서.
회사 다닐 때 프레젠테이션이 잘못돼도 이렇게까지 막막하진 않았다. 그때는 재작업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지금은 재작업이 안 되는 몸이었다. 리셋 버튼 같은 것도 없고, 매니저한테 죄송하다고 하면 끝날 문제도 아니었다.
신전을 나오는 길에 박선희가 나를 안고 계속 말이 없었다. 김철웅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뭔가를 애써 삼키는 표정이었는데, 그게 걱정인지 실망인지는 나도 구분이 안 됐다. 다만 확실한 건, 뭔가 예상했던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박선희가 나를 씻기면서 계속 콧노래를 불렀다. 평소보다 유난히 신경 써서 씻겨주는 느낌이었다. 물이 따뜻했고,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목덜미를 닦을 때도, 발가락 사이를 닦을 때도 평소보다 두 배는 느렸다.
"우리 도윤이는 특별한 애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특별하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특별하다는 건 좋은 뜻으로도 나쁜 뜻으로도 쓸 수 있는 말이었고, 지금 이 상황에서는 후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물기를 다 닦고 나서도 그녀는 한참 동안 나를 품에 안고 흔들었다. 평소라면 벌써 요람에 눕혔을 시간인데, 그날은 유난히 오래 안고 있었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것 같았다.
김철웅은 그날 저녁 술을 한 병 다 비웠다. 평소엔 안 그러던 사람이었다. 낮에 회계일을 할 때도 술은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이 저녁 밥상에서부터 병을 꺼내드는 걸 보고,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감이 왔다. 박선희가 잠든 나를 안고 방으로 들어갈 때, 그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괜찮을 거야. 아직은."
아직은. 그 두 글자가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아니라는 뜻인가. 회사에서 "일단은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꼭 다음 주에 사고가 터졌었다. 그 말버릇이 여기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 같아서 더 불안했다.
나는 마력도 없고, 이 몸은 아직 걷지도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관찰뿐이었다. 하지만 관찰만으로도 이미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줄어들었고, 밤마다 문을 잠그는 소리가 조금 더 커졌고, 창밖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음 날 아침, 마을 어귀에서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낮고 무거운 그 소리.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며칠에 한 번씩 들리는 종이었는데,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 표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박선희가 창밖을 보며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다시 아침밥을 짓기 시작했다. 냄비를 젓는 손이 아까보다 조금 세졌다.
"저 종은 뭐예요?"
김철웅이 물이라도 마시려는 듯 부엌 쪽으로 오다가 물었다. 뻔한 걸 왜 물어보나 싶었는데, 대답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도 이 세계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원래 이 세계 출신이 아니라는 걸, 나는 그 짧은 대화에서 처음으로 눈치챘다.
"몰라도 돼요. 신경 쓰지 마요."
박선희가 짧게 잘랐다. 김철웅은 더 묻지 않고 물만 마시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요람에 누운 채 그 종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마력도 없는 내가, 이 세계에서 대체 무슨 쓸모로 태어난 걸까. 그리고 저 종은 대체 뭘 알리는 종일까.
답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그 답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 이 세계에 순순히 적응한 티를 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아기는 웃고 울고 자는 것만 잘하면 됐다. 나머지는 시간이 알려줄 것이다. 시간이 알려주지 않으면 내가 알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처음 보는 여자가 집 문을 두드렸다.
박선희가 문을 열기 전에 김철웅과 눈을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눈빛에는 분명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나는 담요 위에서 딸랑이를 꽉 쥐었다.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는데, 그 순간만큼은 온 신경이 문 쪽으로 쏠렸다.
문이 열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