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무 사랑받는 제물

5화

다음 방문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최은주는 열흘도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왔다. 서류철도 없이, 빈손으로. 빈손이라는 게 오히려 불길했다. 서류를 들고 오는 최은주는 그래도 사무적인 최은주였다. 서류 없이 오는 최은주는, 감정만 들고 오는 최은주였다. "이렇게 넘어갈 순 없어요." 문을 열자마자 그녀가 던진 첫 말이었다. 박선희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표정 근육이 통째로 얼어버린 것처럼, 웃던 얼굴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은주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애 앞이라서 상관없다는 거예요, 아니면 애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예요?" 최은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틀을 붙잡은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저 손아귀 힘이면 문틀에 자국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지금 상황에 전혀 쓸모없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나는 그때 마침 바닥에 배를 대고 기어다니는 연습을 하던 중이었다. 요즘엔 걷기 전 단계로 열심히 기고 있었다. 팔꿈치로 바닥을 밀고 무릎을 끌어당기는 동작이 제법 손에 익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방을 가로지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자세로 고개만 들어 대화를 지켜봤다. 목이 아팠지만 참을 만했다. "들어와서 얘기해요." 김철웅이 문을 닫으며 말했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의 그 사람 목소리가 아니었다. 최은주는 신발도 벗지 않고 안으로 들어섰다. 신발장이 바로 옆인데도 그걸 지나쳤다는 게, 지금 이 방문이 얼마나 격식을 벗어난 방문인지 보여줬다. "신전에서 결정이 내려왔어요. 다음 생贄 후보 명단에 이 집 아이가 올라갔대요." 방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나는 기어가던 자세로 그대로 멈췄다. 팔꿈치 하나는 바닥에, 하나는 반쯤 든 채로. 생贄. 그 단어를 처음 들은 게 태어나던 날이었다. 사람을 뭔가에게 바치는 풍습. 산모의 배 위에서, 산파가 흘리듯 중얼거린 그 단어를 나는 여태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명단에 내가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게, 무슨..." 박선희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 반응이 이상했다. 놀란 척은 했지만,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눈이 커지지도 않았고, 숨이 멈추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사람이 짓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이 몸으로 살아온 몇 달 동안 사람 얼굴 읽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어서 지겹도록 관찰했던 그 경험으로 곧바로 알아챘다. 최은주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박선희의 얼굴 위에서 뭔가를 찾듯 움직였다. "두 분은 이미 알고 있었죠."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김철웅은 시선을 벽 쪽으로 돌렸고, 박선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으면서 왜 저한테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저는 서류에서 아이 이름을 보고서야 알았어요. 회계 서류에요! 생贄 후보 명단이 왜 회계 서류에 끼어 있는지 아세요? 신전이 생贄 가족한테 지급하는 보상금 항목이 있어서요. 지원금 명단이요!" 최은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다시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들썩이는 게, 저번처럼 과호흡으로 넘어갈까 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호흡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는 그걸 보고 두 분이... 벌써 알면서도 저한테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서류를 넘기시는 걸 보고, 그게 너무..."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엔 과호흡까지 가지 않았다. 분노가 슬픔을 앞섰기 때문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훔치는 그 동작이 거칠었다. "미안해요, 은주 씨." 박선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눈물이 섞여 있었다. "도윤이 태어났을 때부터 알았어요. 마력이 없는 아이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지 백 년 만에 처음이래요. 마력 없이 태어난 애들은 신전에서 특별하게 분류돼요. 생贄 자격이 있는 아이라고요." 생贄 자격. 그 표현이 마치 상장이나 자격증처럼 들려서 더 끔찍했다. 백일장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태어난 순간부터 무슨 시험을 통과한 것도 아닌데, 자격이라는 단어가 붙는다는 게 우스웠다. 우습다고 생각하는 내가 더 우스웠다. "왜 마력이 없으면 생贄가 되는 거예요?" 최은주가 물었다. 그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눈치였다. 눈물로 젖은 얼굴에 순간적으로 스치는 그 표정은, 분노보다 순수한 궁금증에 가까웠다. "신전 사제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마력이 없는 아이는 마족한테 바쳤을 때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제물이 된다고... 마력이 있으면 마족이 그 힘을 흡수하면서 뭔가 오염이 생긴다나. 근데 마력이 전혀 없으면 순수하게, 완전하게 흡수된다고요." 박선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마치 목소리를 줄이면 그 말의 무게도 줄어들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김철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벽에 기대 서서 바닥만 보고 있었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말이 없어지는 건 처음 봤다. 평소엔 실없는 소리라도 던지던 사람이었는데. "그러니까..." 최은주가 숨을 몰아쉬며 다시 물었다. "완전하게 흡수된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에요? 죽는다는 거예요? 아니면 그것보다 더 심한 거예요?" 박선희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나는 기어가던 자세 그대로 얼어붙은 채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아기의 얼굴로는 표정을 감출 필요도 없었다. 이 상황에서 아기가 지어야 할 표정은 없었으니까. 세상 어떤 육아 책에도 '생贄 후보 명단에 오른 아기의 표정 관리법' 같은 챕터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속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마력이 없다는 게 약점이 아니라 사형선고였다는 것. 이 부모가 처음부터 그걸 알면서도 나를 이렇게 키웠다는 것. 그 애정이, 그 수염 포옹이, 그 콧노래가, 전부 알면서도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매일 밤 나를 재우며 흥얼거리던 그 노래가, 사실은 사형선고를 받은 아이에게 불러주는 자장가였다는 것.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나를 이렇게까지 키운 걸까. 어차피 제물로 바칠 거면, 정을 붙이지 않는 게 서로에게 나았을 텐데. 아니면 그 반대인가. 정을 붙여서라도 마지막까지 사람답게 키워주고 싶었던 걸까. 어느 쪽이든 지금 내 목숨줄이 걸려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언제예요?" 최은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명단에 올라간 게 언제예요? 의식은 언제 치러지는데요?" 박선희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술만 몇 번 움직이다 다시 다물었다. 대신 김철웅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신전에서 절차가 남아 있대요. 사제님이 직접 진단을 해야 확정된다고..." 진단이라는 말이 걸렸다. 병원 건강검진처럼 들리는 그 단어가, 사람 목숨을 결정하는 절차의 이름으로 쓰인다는 게 소름 끼쳤다. 진단 결과에 따라 살고 죽는다는 건데, 그 진단이라는 게 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아직 아무도 나에게 설명해준 적이 없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 무게감 있는 소리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한 노크였다. 문 두께를 뚫고 들어오는 그 소리에는 어딘가 서두르지 않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여유롭다는 것 자체가 상대가 이쪽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박선희와 김철웅의 얼굴이 동시에 하얗게 변했다. 방금까지 최은주 앞에서 짓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최은주 앞에서는 죄책감이었지만, 지금은 순수한 공포였다. "사제님이세요." 김철웅이 낮게 중얼거리며 문 쪽을 바라봤다.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이 방 안의 누구보다도 그가 더 겁먹었다는 게 드러났다. 최은주는 입을 틀어막았고, 박선희는 나를 향해 몸을 돌리며 반사적으로 안아 들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나를 숨길 수 있다는 것처럼. 팔에 안기는 그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가 내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숨긴다고 숨겨질 리가 없었다. 명단에 이름이 이미 올라갔다면, 사제라는 사람은 이 집에 아기가 있다는 걸 진작에 알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아 드는 그 팔의 힘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순전히 본능이었다. 그 본능이 조금 우습기도 하고,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문 너머에서 다시 한 번, 이번엔 조금 더 크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세 번째 노크였다. 저쪽에서 문을 두드리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은 손님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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