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설원에 새긴 견장

2화

게시판에 붙은 종이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몰려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일 위 강태오. 이 위 백건호. 삼 위 이하준. 나는 그 종이를 두 번 읽었다. 이름이 바뀌지는 않았다. 필기와 실기를 합산한 순위였다. 강태오가 일 위인 것도, 백건호가 이 위인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둘 다 어릴 때부터 사교육이라는 걸 받아본 사람들이었으니까. 문제는 삼 위였다. 삼 위, 이하준. 그 세 글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옆에서 누군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평민 출신이 삼 위라니."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세상 참 좋아졌네."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얼굴을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목소리였다. 상관할 가치가 없었다. 배치는 순위 발표 며칠 뒤, 임관식 당일 개별 봉투로 전달된다는 게 규정이었다. 순위와 배치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다. 실기 성적이 좋아도 뒤로 밀리는 경우, 필기 성적이 나빠도 앞으로 당겨지는 경우. 다들 소문일 뿐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생각하고 싶었다. 임관식 전날 밤, 나는 관사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며 몇 번이고 되뇌었다. 삼 위면 충분하다. 삼 위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 말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임관식은 천공궁 별관 대전에서 열렸다. 새벽부터 정복을 다려 입고, 구두를 세 번 닦았다. 광이 나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평민 출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옷차림 하나로도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붉은 융단이 대전 중앙을 길게 갈랐다. 양옆으로 황실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늘어서 있었고, 정복을 갖춰 입은 백여 명의 신임 장교들이 계급과 순위에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공기에서 향 냄새가 났다. 오래된 목재와 금속 장식이 뒤섞인 냄새였다. 나는 그 사이, 앞쪽에서 세 번째 줄에 서 있었다. 순위가 높을수록 앞줄이었다. 호명이 시작됐다. "강태오. 호위성." 예상대로였다. 강태오가 앞으로 걸어 나가 봉투를 받았다. 호위성은 황실 직속 기관이었다. 태생부터 정해진 자리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백건호. 감찰성."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 다음 이름들이 쭉 이어졌다. 상공성, 재무성, 문부성. 대부분 각자의 가문이 미리 손을 써둔 성(省)으로 흩어졌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봉투를 받아 든 얼굴들이 하나같이 여유로웠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었던 얼굴들이었다. "박용재. 상공성." 박용재. 성적표를 봤을 때 하위권이었던 이름이다. 그런데도 상공성이라는, 신임 장교치고는 과분한 자리를 받았다. 그가 봉투를 받아들고 돌아서면서 나를 향해 눈을 마주치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말은 없었다. 말이 필요 없는 웃음이었다. 저 정도는 넘어갈 수 있었다. 이 판이 원래 그런 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이하준." 내 이름이 불렸다. 순간 대전 안의 시선이 잠시 이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평민 출신에, 삼 위. 사람들 눈에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부관이 나에게 다가왔다. 손에 든 봉투는 다른 사람들에게 건넨 것과 똑같은 흰 봉투였다. 겉으로는 아무 차이가 없었다. 종이 질감도, 봉인 색깔도, 리본 매듭까지도 같았다. "확인 후 서명하십시오." 부관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이 사람도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알아도 말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나는 봉투를 받았다. 손에 쥐는 순간 알았다. 유난히 얇았다. 다른 사람들의 봉투에는 배치 통지서와 함께 부임지 자료가 몇 장 더 들어있는 게 보였다. 지도, 예산 배정표, 상급자 명단 같은 것들. 종이 두께만으로도 그 안의 무게가 짐작이 갔다. 내 것은 종이 한 장뿐인 듯했다. 무게로 알 수 있었다. 봉투를 열었다. 북방 설한지구, 설한관, 제8소대장. 짧은 문장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배치 사유란은 비어 있었다. 부임 일정도, 인수인계 대상도,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 한 장에 열두 글자.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조용해졌다는 걸 느낄 수 있을 만큼 조용해졌다. 누군가 숨죽여 웃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박용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삼 위. 설한지구. 설한지구는 제국 북방 최전선이었다. 몬스터와 이종족의 습격이 잦고, 겨울에는 손가락 하나가 얼어 떨어질 정도로 추운 곳. 훈련소 교관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그곳에 자원해서 가는 사람은 없다고. 그리고 그곳에 배치되는 이유는 대개 하나였다. 좌천. 괜찮다. 예상했던 일이다.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정리했다. 심장이 뛰는 속도까지는 정리가 안 됐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삼 위라는 성적은 평민 출신에게는 오히려 위협이었다. 강태오나 백건호처럼 태생부터 자리를 보장받은 이들에게 삼 위는 그냥 삼 위였지만, 나에게 삼 위는 다른 의미였다. 능력을 증명한 평민이 중앙에 자리를 잡는다는 건, 귀족들에게는 선례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선례는 위협이 된다. 위협은 치워야 한다. 치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조용하고 가장 합법적인 방법은 서류 한 장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실력에 대한 처벌이었다.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종이를 다시 접었다. 접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추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대전 안은 춥지 않았다. "이하준!" 관람석 쪽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서지아였다. 문관 시험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그녀는 임관식 참관 자격으로 와 있었다. 정복 대신 문관 예복을 입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왔다. 안내 요원이 제지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내 앞까지 와 있었다. "이거 뭐야." 그녀가 봉투를 낚아채듯 들여다봤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설한지구라니. 이게 말이 돼?" "목소리 낮춰." 나는 낮게 말했다. "여기 지금 백 명 넘게 있어." "그게 지금 중요해?" 그녀의 목소리가 낮아지긴 했지만 떨림은 그대로였다. "이의 제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배치가 이상하잖아. 삼 위한테 이런 자리를 주는 게 어디 있어." "규정상 배치는 불가역이야." 나는 서류를 접어 넣으며 답했다. 손이 움직이는 동안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서명하지 않으면 예비역으로 편입되고. 그건 사실상 이력이 끝나는 거지."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그녀를 보며 말을 끊었다.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더 말하려다가 삼킨 얼굴이었다. "어차피 중앙에 남아도 견제만 받을 자리였어. 최전선이면 적어도 실적으로 말할 수 있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손에 든 봉투에서, 내 얼굴로, 다시 봉투로 옮겨 다녔다. 뭔가를 찾고 있는 눈빛이었다. 위로가 될 만한 말이든, 반박할 구실이든.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부관이 서명란을 가리켰다.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잠시 그 종이를 내려다봤다. 서명 하나로 삼 년의 삶이 달라질 자리였다. 설한지구, 삼 년. 몬스터 습격, 동상, 어쩌면 그보다 더 나쁜 일들. 서명하지 않으면 예비역. 평민 출신 예비역 장교 이력서가 어디에 쓸모가 있을지는 뻔했다. 망설임은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선택지가 넓은 인생은 아니었으니까. 펜을 들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서명했다. 부관이 서류를 접수하며 마지막 봉인 종이를 뜯었다. 규정상 배치가 확정된 뒤에야 확인할 수 있는 부속 서류였다. 형식적인 절차라고 생각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부임지 지도나 숙소 배정표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을 부분이었다. 봉투 안에서 종이 한 장이 더 나왔다. 다른 인원의 봉투에는 없는 것이었다. 부관이 그걸 내게 건넬 때, 표정이 아주 잠깐 흔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 종이를 폈다. 제8소대, 최근 삼 년간 소대장 세 명 연속 부상 전출. 조장 박기석, 명령 불복종 다수 기록. 글자를 눈으로 좇는 동안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자꾸 겹쳤다. 삼 년. 세 명. 소대장 세 명이 연속으로 부상 전출을 당했다는 건, 그 자리가 사람을 갈아 넣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조장이라는 사람의 이름 옆에 붙은 '명령 불복종 다수 기록'이라는 문구. 종이를 든 손끝이 잠시 멈췄다. 옆에서 서지아가 그 종이를 보려고 목을 뺐다. 나는 반사적으로 종이를 접어 넣었다. 그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당장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뭐야, 뭔데 그래." 그녀가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이건, 배치가 아니라 시험이었다. 누가 낸 시험인지, 통과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설한지구로 가는 그 순간부터, 나는 시험대 위에 서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시험대에는, 이미 세 사람이 실패하고 사라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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