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설원에 새긴 견장

4화

그날은 그냥 넘어갔다. 박기석이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을 뿐, 실제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곽태산이 문가에서 미묘하게 자세를 바꾼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거구의 호위무사가 지켜보는 앞에서 함부로 움직일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던 거다. 박기석의 눈이 곽태산 쪽으로 한 번, 나에게 한 번, 그리고 다시 문가로 향했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저 정도 덩치를 상대로 뭘 할 수 있을지 재는 게 뻔히 보였다. 결국 그는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끼익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마저 그의 성질머리처럼 들렸다. 괜찮다. 첫날부터 다 뒤집을 생각은 없었다. 다음 며칠 동안 나는 소대 훈련 일정을 새로 짰다. 오전 체력 훈련, 오후 실전 배치 연습, 저녁에는 무기 정비. 규정대로였다. 규정대로 하는 게 오히려 반항의 명분을 없앤다는 계산이었다. 트집을 잡으려면 규정을 걸고넘어져야 하는데, 규정을 그대로 따르면 트집 잡을 구석이 없어진다. 간단한 이치였다. 소대원들은 여전히 굼뜨게 움직였다. 아침 점호에 오 분씩 늦고, 정비 시간에는 무기를 대충 훑어보고 넘겼다. 그래도 눈에 띄게 반발하지는 않았다. 몇몇은 오히려 내 쪽을 슬쩍 살피며 어느 정도까지 늦어도 되는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그 눈치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규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규정의 한계를 재는 거였으니까. 박기석만 예외였다. 그는 매번 지시 절반쯤을 무시했고, 나는 매번 그걸 기록으로 남겼다. 날짜, 시간, 무시한 지시 내용. 세 줄이면 충분했다. 세 줄이 쌓이면 나중에 서른 줄이 될 거고, 서른 줄이 쌓이면 그건 그냥 기록이 아니라 증거가 된다. 지금은 아무 소용 없어 보여도, 나중에 쓸 데가 생긴다. 알고 있다. 곽태산은 그 사이 별말 없이 내 옆을 지켰다. 훈련장에서도, 식당에서도, 그냥 서 있었다. 존재감이 워낙 커서 뭘 하지 않아도 위압이 됐다. 박기석이 대놓고 대드는 대신 뒤에서 눈치만 보는 것도 결국 저 덩치 때문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찰 임무가 떨어졌다. 설한관 북쪽 삼십 리 지점, 순찰로에서 이종족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보고였다. 최무성이 직접 나를 불러 지시했다. 그의 집무실은 좁고 서류가 쌓여 있었는데, 벽 한쪽에 걸린 지도만이 유난히 깨끗했다. 자주 들여다본다는 뜻이었다. "제8소대 데리고 가서 확인해. 실전이 어떤지 알면, 저 놈들도 정신 좀 차릴 거다." 말이 훈련이지, 사실상 나를 시험하는 거였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신참 소위 하나 실전에 던져놓고 어떻게 버티는지 보자는, 딱 그런 계산이었다. 나는 알겠다고 답했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곽태산 데려가고." 최무성이 덧붙였다. "혹시 몰라서." 혹시 몰라서, 라는 말이 신경 쓰였다. 뭘 알고 붙여주는 건지, 그냥 관례인 건지 구분이 안 됐다.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올 걸 알았다. 그냥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정찰은 순조롭게 시작됐다. 스무 명 규모로 나섰고, 곽태산이 선두에서 지형을 읽으며 길을 잡았다. 그는 눈길에서도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덩치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걸음이었다. 박기석은 뒤쪽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따라왔다. 그는 걸을 때마다 눈을 발로 걷어차듯 걸었는데, 그것도 일종의 불만 표시였을 거다. 행군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설한지구 특유의 흰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고, 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다. 소대원 몇은 벌써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신병 하나가 자꾸 뒤처졌다.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얼굴에, 장비를 메는 자세가 어설펐다. 나는 그를 눈여겨봤다. 나중에 문제가 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문제는 협곡을 지날 때 생겼다. 끼익. 끼이익.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협곡 벽의 눈더미가 순찰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그냥 눈이 쌓여서 그런가 했는데, 곽태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곽태산이 즉시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물러나. 전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더미 아래에서 하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설한지구 특유의 빙랑(氷狼)이었다. 몸집이 사람만 하고, 이빨 사이로 서리가 피어오르는 몬스터. 눈이 붉었고, 움직임이 눈밭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세 마리였다. 세 마리가 동시에 튀어나오는 걸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스무 명, 세 마리, 협곡, 좁은 지형.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소대원들이 흩어졌다. 대열이 무너졌다. "진형 유지!" 나는 소리쳤다. 아무도 듣지 않았다. 훈련 때는 다들 그럭저럭 대열을 맞췄는데, 실제 몬스터를 보자마자 그 대열이 종이처럼 흩어졌다. 겁먹은 몸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인다는 걸 그때 다시 확인했다. 세 마리 중 한 마리가 후미의 신병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눈여겨봤던 그 신병이었다. 신병이 겁에 질려 뒤로 넘어졌다. 눈밭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다. 곽태산이 먼저 움직였다. 몸을 던지듯 신병 앞을 막아섰고, 맨손으로 빙랑의 턱을 붙잡아 그대로 땅에 눌러버렸다. 우지끈.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는 그렇게 정리됐다. 곽태산은 숨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았다. 저 덩치를 붙여준 이유를 알겠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남은 두 마리가 나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끝이 저렸다. 벽라를 풀려고 손목의 봉인문을 눌렀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흩뜨렸다. 푸른 실을 어디에 어떻게 펼칠지 의지를 모으지 못했다. 손목이 그냥 얼어붙은 것처럼 뻣뻣했다. 망했다. 빙랑 한 마리가 뛰어올랐다. 나는 몸을 굴려 피했다. 어깨가 얼어붙은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통증이 늦게 왔다. 늦게 오는 통증이 더 무섭다는 걸 그때 알았다. 처음엔 그냥 놀랐고, 그다음에야 어깨가 타는 듯 아팠다. 빙랑은 물러나지 않았다. 다시 자세를 잡고 나를 겨눴다. 눈이 붉게 빛났고, 이빨 사이로 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저게 나를 먹잇감으로 봤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손목을 다시 눌렀다. 봉인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시 눌렀다. 하지만 벽라를 어디에 어떻게 펼칠지 생각을 모으지 못했다. 이러다 그냥 죽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손은 봉인문을 누르고 있었지만, 공포에 휩쓸린 머리는 벽라에 제대로 명령을 전달하지 못했다. 훈련장에서 되던 조작을 실전에서는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 빙랑이 신병 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곽태산이 첫 번째 빙랑을 처리하고 아직 자세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틈이었다. 그 순간, 신병이 넘어진 채 팔로 얼굴을 가리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는 얼굴이었다. 뺨에 여드름 자국이 있었고, 손이 떨리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그 순간 해야 할 일이 하나로 좁혀졌다. 저 신병을 막아야 했다. 흩어졌던 생각이 한곳으로 모였다. 나는 손목의 봉인문을 움켜쥐고 푸른 실을 끌어냈다. 푸른 그물이 손끝에서 뿜어져 나와 빙랑을 향해 날았다. 이번엔 벽라가 명령대로 움직였다. 정확하고, 빨랐다. 그물이 빙랑의 다리를 휘감아 통째로 넘어뜨렸다. 눈밭에 빙랑이 나뒹굴었고, 그물이 다리 사이를 조여들었다. 곽태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 마무리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협곡에 남은 건 눈에 파묻힌 빙랑 세 마리의 사체와, 숨을 몰아쉬는 소대원들뿐이었다. 바람 소리만 남았다.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고,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피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손목의 봉인문을 내려다봤다. 아까는 열지 못했는데 왜 지금은 열 수 있었지. 손목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냥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문양일 뿐이었다. 그런데 조작의 결과가 갈렸다. 처음엔 공포에 휩쓸려 명령을 전달하지 못했고, 나중엔 의지를 모아 정확하게 조종했다. 곽태산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바닥이 두껍고 거칠었다. 나를 일으켜 세우며 그가 낮게 말했다. "소위님, 아까 처음엔 안 됐잖습니까." "그랬습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근데 저 신병을 막으려 하니까 바로 풀렸고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곽태산의 말이 맞았다. 처음 두 마리가 나를 향했을 때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생각이 흩어졌다. 신병을 지켜야 한다고 마음먹은 순간, 목적과 조작 방향이 선명해졌다. 보호하려는 의지가 벽라를 다루는 집중력을 높이는지는 아직 확인이 더 필요했다. 괜찮다. 적어도 확인해볼 가설은 생겼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겠군요." 나는 말했다. 목소리가 담담하게 나왔다는 게 다행이었다. 속으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지만, 겉으로 그걸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곽태산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신병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그의 손길이 의외로 조심스러웠다. 저 덩치에 저런 손길이 나온다는 게 낯설었다. 돌아오는 길, 소대원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두려움과 어색함이 뒤섞인 눈이었다. 몇몇은 나를 힐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돌렸고, 몇몇은 오히려 조금 더 오래 눈을 마주쳤다. 신병은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리는 채로 나에게 짧게 목례를 했다. 말은 없었지만 그 목례가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았다. 박기석만 그 흐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대열 끝에서 팔짱을 낀 채, 나와 곽태산을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그거, 신참 목숨 하나 구했다고 대단한 것처럼 굴 일은 아니지. 곽 씨가 다 해준 거잖아. 소위님은 그냥 운 좋게 그물 한번 던진 거고." 소대원 몇이 그 말에 다시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가 다시 흔들렸다. 아까 조금 풀렸던 긴장이 순식간에 다시 팽팽해지는 게 느껴졌다. 저 인간은 꼭 이런 타이밍에 입을 연다. "운이었을 수도 있죠." 나는 차분하게 답했다.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확인은 뭘로 할 건데. 또 몬스터 나올 때까지 기다려?" 박기석이 비웃었다. "아니면 나한테 시험이라도 해보시겠나. 소위님 그 마봉, 진짜 별거 아니라는 거, 이번에 확실히 보여주지." 그가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눈을 밟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뒤에서 곽태산이 자세를 바꾸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이번엔 조금 늦은 것 같았다. 박기석의 손이 검자루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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