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5년 만에 찾은 친구가 용사라니

2화

고양이 귀를 가진 그 사람은 짐승이 나가떨어진 자리를 흘긋 확인하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한 번 털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짐승은 몸통이 내 키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회색 늑대 같은 것이었는데, 방금까지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던 그 커다란 몸뚱이가 지금은 몇 미터 밖에 나가떨어져 꿈틀거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그 광경을 목격한 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는 벌써 다음 할 일을 고민하는 표정으로 손등을 툭툭 털고 있었다. "어라, 사람이잖아? 이 근처에 인간 마을 없는데." 목소리는 밝고 가벼웠는데, 그 가벼움이 방금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의 태도치고는 너무 태연해서 나는 순간 이 세계에서는 짐승 한 마리 때려눕히는 게 출근길 벌레 잡는 것만큼 흔한 일인가 싶었다. '전투력 인플레이션이 심하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는데, 심장은 아직도 방금 전의 그 짐승 눈빛을 기억하는지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손끝은 덜덜 떨려서 흙바닥을 짚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녀는 그런 나를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마치 처음 보는 동물의 종을 감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 소야. 근처 용병단 소속이고, 지금은 순찰 중. 당신은?" 가까이서 보니 그녀의 고양이 귀는 진짜였다. 머리카락 사이에서 삐죽 솟은 그 귀가 소리에 따라 미세하게 움찔거렸는데, 나는 그 사실이 신기해서 잠깐 대답을 잊고 멍하니 쳐다봤다. 이 세계는 확실히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나는 순간 이름을 밝혀야 할지, 아니면 여기가 정말 위험한 곳이라면 신분을 숨기는 게 나을지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이 세계에서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냥 순순히 이름을 말했다. "오서윤이에요." 소야는 이름을 듣고도 별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옷차림을 다시 위아래로 살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후드티에 청바지, 발목에 걸리는 흰 운동화까지, 누가 봐도 이 세계 사람 같지 않은 차림새였을 것이다. "복장 보니까 딱 전이자네. 요즘 이쪽으로 자꾸 넘어오더라, 특이한 시기다 싶었는데." 전이자라는 말이 이렇게 익숙하게 튀어나오는 걸 보니, 나 같은 케이스가 흔한 일이라는 뜻 같아서 마음이 조금 놓였다. '적어도 나만 특이 케이스는 아니구나.' 뭔가 대단한 특별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잔뜩 겁을 먹었었는데, 알고 보니 이 세계에서는 나 같은 뜨내기가 심심하면 하나씩 툭툭 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취업 시장에 신입 하나 더 들어온 것 정도의 반응이랄까, 그런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났다. 소야는 손을 내밀어 나를 일으켜 세워주면서, 이 근처는 몬스터가 자주 출몰하는 위험 지역이니 마을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이 호의가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잠깐 경계했는데, 낯선 사람의 호의라는 건 늘 뒤에 뭔가 붙어 있기 마련이라는 걸 사회생활 몇 년 하면서 배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계산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길고양이 한 마리 주워온 듯한 순수한 오지랖의 냄새만 풍겼다. "고마워요, 정말."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는데, 혹시나 이 세계 어딘가에 하연이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순간에 넘어왔다면, 같은 세계 어딘가에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아니, 애초에 이 세계라는 게 하나뿐이라는 보장도 없었지만, 나는 그런 희망이라도 붙잡고 있어야 다리가 움직였다. 소야는 걸으면서 이런저런 걸 물어봤는데,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전이 전에 뭘 했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질문들이었다. 나는 대충 대학생이었다고만 답했다. 정확히는 취업 준비생에 가까웠지만, 그걸 설명하려면 이 세계에도 존재하는지 모를 '스펙'이니 '자소서'니 하는 단어들을 늘어놓아야 했으므로 그냥 편한 대로 뭉뚱그렸다. "대학생이면 여기서 살긴 힘들겠다. 여기는 힘이 곧 서열이라, 아무 힘도 없으면 진짜 위험해." 그 말이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나는 잠깐 씁쓸했지만, 곧 이 세계에서도 어차피 서열 싸움은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취업 시장이나 여기나 결국 약자한테 가혹하구나.' 적어도 여기서는 서류 탈락 대신 몬스터한테 물려 죽는다는 차이 정도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애매했다. "근데 왜 도와준 거예요? 저 그쪽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묻자 소야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지나가다 사람이 죽게 생겼으면 도와주는 거지, 뭐 특별한 이유가 있나. 여기서는 그런 거 따지다가 아무도 안 돕게 돼." 그 대답이 너무 단순해서 나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대가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최소한 지금 당장 위험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렇게 삼십 분쯤 걸었을까, 발밑의 흙길이 조금씩 다져진 돌길로 바뀌기 시작했고, 나무들 사이로 성벽 같은 게 보이기 시작했다. 회색빛 돌을 쌓아 올려 만든 것 같은 그 벽은 높이가 상당했는데, 벽 앞에는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를 논의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갑옷을 걸친 사람도 있었고, 지도 같은 걸 펼쳐놓고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야는 그쪽을 보더니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기 있는 사람들 우리 파티 리더님이랑 동료들이야. 인사해두면 좋을걸. 우리 리더님이 좀 무섭게 생기긴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 아니니까 겁먹지 말고."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별생각이 없었다. 리더가 무섭게 생겼든 말든,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이 낯선 세계에서 하루라도 무사히 버티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성벽 앞에 서 있던 인물들 중 하나가, 마치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천천히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혀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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