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성벽 안쪽 마을에서 며칠을 머무는 동안 나는 소야와 백설아의 배려로 숙소와 식사를 제공받았는데, 처음엔 그 호의가 부담스러워서 몇 번이나 사양하려 했다. 하지만 백설아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여기서 공짜밥 먹는 놈은 없어. 일 시킬 거니까 걱정 마" 라고 못을 박았고, 나는 그 말에 오히려 안심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지.' 이세계라고 해서 자본주의적 등가교환의 법칙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위안이 됐다.
내가 맡은 일은 빨래를 널거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말하자면 잡부의 영역이었는데 대학 시절 반지하 자취방에서 물이 안 나올 때마다 페트병을 들고 옆 건물 화장실까지 왕복했던 경험에 비하면 이건 거의 리조트 생활에 가까웠다. 빨래를 너는 손끝에 마을 특유의 향긋한 풀 냄새가 배어들었고, 우물물은 서울 수돗물보다 훨씬 차갑고 맑았다. '이 정도면 워라밸이 나쁘지 않은데.' 나는 속으로 그런 실없는 평가를 내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광장 시장에서 야채를 사러 나갔다가 나는 다시 그 용사를 마주쳤다. 좌판에 늘어선 붉은 무와 이름 모를 이파리 채소들 사이를 지나던 참이었는데, 골목 어귀 그늘에 앉은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번엔 파티원 없이 혼자서 대검을 무릎에 걸쳐놓고 천으로 날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유물을 손질하는 복원가처럼 진지해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켜봤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손을 잠깐 멈췄다. 아주 짧은 정지였다. 나는 그 정지 동작이 너무 짧아서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는데, 다시 보니 그녀의 손끝이 여전히 천 위에 얹혀 있는 채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또 만나네."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에 담긴 뉘앙스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것 같아서 나는 괜히 긴장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마치 취조관이 신원 확인하듯 건조했던 말투였는데, 지금은 거기에 미세한 온도가 섞여 있었다. '아니, 착각이겠지. 목소리 온도까지 재는 건 좀 오버 아닌가.'
"장 보러 나왔어요."
나는 애써 태연하게 대답하며 그녀 옆을 지나가려 했다. 무를 하나 더 사야 하나 고민하는 것처럼 시선을 좌판 쪽으로 돌리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손목을 잡아 세우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목을 잡은 손에는 검을 다루는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그 접촉이 거칠지 않고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나는 순간 숨을 참았다.
"저쪽 골목엔 가지 마. 요즘 소매치기가 늘었어."
그저 실무적인 경고였다. 위험 안내, 딱 그 정도의 정보 전달.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손을 놓았고, 다시 대검 손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손끝의 온도가 이상하게 오래 남아서 나는 골목을 지나는 내내 손목을 매만졌다. 마치 그 자리에 무언가 흔적이라도 남았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그냥 친절한 거야. 하연이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은 이 낯선 세계에서 만난 그녀에게서 자꾸 하연이의 흔적을 찾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걸이, 무심한 듯 배려하는 말투, 심지어 손목을 잡을 때의 힘 조절까지. 5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것들이 몸에 새겨진 습관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나는 야채 바구니를 든 손에 힘을 꽉 주며 생각했다.
며칠 뒤,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두레박 줄이 끊어져서 당황하던 참이었다. 줄이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나고 두레박이 우물 안으로 텀벙 떨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마을 공용 두레박을 신입 잡부가 못 쓰게 만들었다고?' 그런 소시민적 걱정이 먼저 들었는데, 지나가던 그녀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대신 물을 길어 올려줬다.
그녀는 우물 벽에 몸을 살짝 기대고 서서 자기 허리에 감고 있던 여분의 줄을 풀어내더니, 그걸로 순식간에 두레박을 건져 올렸다. 그 동작이 너무 매끄러워서 나는 감탄과 동시에 조금 민망해졌다. '나는 5분 넘게 씨름했는데, 저 사람은 30초도 안 걸리네.'
그때 그녀가 물통을 건네며 잠깐 나를 바라본 시선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게 그리움인지 경계인지 나는 도무지 구분할 수 없었는데, 눈빛의 결이 미묘하게 흔들렸다가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는 그 과정이 너무 빨라서 붙잡을 수가 없었다.
"고, 고마워요."
내가 물통을 받으며 겨우 그 말을 뱉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섰다. 뒷모습이 광장 쪽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물통을 든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상하다, 자꾸 나한테만 이래.'
소야에게 슬쩍 물어보니 그녀는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용사님이 그렇게 챙겨주는 거 진짜 드문 일인데? 원래 무뚝뚝하기로 유명하거든. 우리 파티원들끼리는 '벽'이라고 부를 정도야.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표현을 안 하는 쪽이라고 해야 하나."
소야는 그렇게 말하며 무를 칼로 탁탁 썰었는데, 그 리듬이 어찌나 경쾌한지 마치 잡담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같았다. "근데 너한테는 유난히 신경 쓰는 것 같더라.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혹시 아는 사이야?"
나는 그 질문에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오늘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는 오늘 처음 본 게 맞았으니까. 그러나 5년 전 다른 세계에서는, 나는 그녀를 매일 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만약 그녀가 나를 알아본 거라면 왜 직접 말을 하지 않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왜 나한테만 이렇게 다른 태도를 보이는 건지 답을 낼 수 없었다. 혹시 기억을 잃은 걸까, 아니면 다른 세계로 넘어오면서 인격의 일부가 지워진 걸까. 그런 판타지적 가설들이 머릿속에서 뭉텅뭉텅 떠올랐다가 별다른 근거 없이 흩어졌다.
그날 밤 숙소에서 천장을 보며 누워 있는데, 5년 전 철길 건널목에서 마지막으로 본 하연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노을이 지고 있었고, 건널목 경보음이 울리고 있었고, 하연이는 나를 향해 뭔가 말하려고 입을 뗐다가 그 순간 발밑에서 검은 균열이 갈라졌다. 나는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고, 그 애는 그대로 균열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 그 애가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지 못한 채였다.
'이번엔 제대로 물어봐야 해.'
나는 어둠 속에서 그렇게 결심했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고,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정면으로 물어보겠다고. 그러나 정작 낮에 그녀 앞에 서면 입이 얼어붙는 게 문제였다. 확신도 없이 무작정 '너 김하연이지'라고 물었다가 아니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5년간 쌓아온 그리움보다도 더 크게 나를 붙잡고 있었다.
만약 아니라면. 만약 그녀가 정말로 그저 낯선 세계의 용사일 뿐이고, 나 혼자 죽은 사람의 얼굴을 산 사람에게 덧씌우고 있는 거라면. 그 실망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모르는 채로, 이렇게 애매한 친절만 주고받는 채로 지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럴 거면 뭐 하러 5년을 그리워했어.'
천장의 나뭇결을 세다가 나는 결국 잠들지 못한 채 뒤척였다. 창밖에서 마을 야경꾼의 종소리가 두 번 울렸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내일은 반드시 뭔가 다른 걸 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정확히 무엇을 할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이렇게 손목의 온도만 곱씹으며 밤을 지새우는 건 그만두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다짐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나는 다음 날이 되어서야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