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귀족원의 문장이 찍힌 서신을 받은 건 새벽이었다.
막사 틈으로 스며든 냉기가 먼저 손끝을 훑고 지나갔다. 봉투를 뜯는 순간, 그 서늘함이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다.
[대현제국 제3군단 최전방 지휘권을 강도윤에게 위임한다.]
짧은 문장 하나가 모든 걸 뒤집었다.
나는 서신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읽지 않았다. 읽는다고 달라질 문장이 아니었으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부관이 옆에서 서류를 낚아채듯 훑었다. 종이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백작님이 어제 전선에서 실종됐습니다. 그것도 아무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그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 갑옷 조각 하나, 핏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정상적인 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실종이 아니라 삭제됐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원래 검을 쥐는 사람이었다. 지휘봉을 쥘 사람은 아니었다. 지도 위에 그려진 선을 읽는 법보다, 눈앞에 다가오는 검을 막는 법을 먼저 배운 사람.
윤서아를 지키는 것. 그게 내가 아는 유일한 임무였다. 그녀가 앞장서서 마왕성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나는 그 뒤에서 그녀의 등을 지키면 됐다. 단순하고 명료한 역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수천 명의 목숨을 등에 지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웃음이 나왔다. 실소였다.
"왜 나야."
부관은 대답하지 못했다. 시선을 슬쩍 피하는 그 모습에서,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 밖에 내기 싫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귀족원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편한 이유는 숨기고, 불편한 결과만 던져준다. 결정은 그들이 하고, 책임은 항상 최전선에 있는 사람이 지게 만드는 구조.
"백작님 실종 직후 남은 지휘 계통이 없습니다. 용사님 파티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많은 게 강도윤 님입니다."
"용사 파티는 파티고, 군단은 군단이야. 나는 서아를 지키러 온 사람이지 군단을 이끌러 온 사람이 아니야."
"압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나눌 여유가 없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맞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지 몰랐다.
"다른 방법은 없어? 임시로라도."
"오늘 안에 결정되지 않으면 군단 전체가 지휘부 없이 방치됩니다. 병사들 사이에 벌써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속이 뒤틀렸다. 지휘관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병사들 귀에 들어가는 순간, 사기는 순식간에 바닥을 친다. 나는 그런 걸 여러 번 봐왔다.
막사를 나서니 새벽 하늘이 이상하게 붉었다.
노을이라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고, 핏빛이라기엔 너무 조용했다. 바람도 없이 그저 하늘 전체가 낮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 몇이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수군거렸다.
"저거 원래 저런 색이었나."
"아니, 어젠 멀쩡했는데."
"불길한데, 이거."
말을 아끼는 자들도 있었다. 아예 하늘을 보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고 걷는 병사들. 그편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나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심장이 이유 없이 빨리 뛰었다.
이런 감각은 익숙했다.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사람만 아는 감각. 죽음이 가까워지면 몸이 먼저 안다.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데도, 등줄기가 먼저 반응한다.
"지휘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부관이 다시 물었다.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이미 결정된 일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질문을 던지는 그의 얼굴에는 미안함 같은 게 서려 있었다.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데."
"군단이 지휘 없이 마왕성 앞까지 밀려나겠지요. 지휘관 없는 부대가 어떻게 되는지는 강도윤 님도 잘 아실 겁니다."
선택지가 없다는 소리였다. 처음부터 그랬을 거다. 서신을 받은 순간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결말을, 나는 그저 확인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좋아. 받아들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전혀 좋지 않았다.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손이 곧 지도 위에서 선을 긋고, 사람을 사지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낯설었다.
지휘소로 걸어가는 길, 병사들의 눈빛이 나를 훑었다.
기대와 의심이 반씩 섞인 눈이었다. 용사의 호위무사가 갑자기 군단을 지휘한다니, 당연히 믹싱될 감정이었다. 누군가는 안도의 눈빛을, 누군가는 못 미더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둘 다 무겁게 느껴졌다.
지휘소 앞에서 낡은 지도를 펼쳤다.
마왕성까지 남은 거리, 우리 쪽 병력 배치, 적의 예상 동선. 숫자와 선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종이 위의 표기 하나하나가 실제로는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다는 걸 알기에, 손끝이 함부로 지도를 짚지 못했다.
그때 지도 한 귀퉁이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마왕성 주변 좌표 몇 개가 지도상에 존재하지 않는 지형으로 표시돼 있었다. 없던 산맥이 그려져 있었고, 강이 흐르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거 뭐야."
측량관을 불러 물었다. 그는 지도를 보고도 눈을 찌푸렸다. 손가락으로 좌표를 몇 번이고 짚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습니다. 어제까지는 없던 표기입니다. 제가 직접 그린 지도인데, 이런 부분은 없었습니다."
지도가 스스로 바뀌었다는 소리였다. 그런 게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었다.
"측량 다시 해."
"예. 지금 바로 조를 편성해서 보내겠습니다."
측량관이 서둘러 나갔다. 나는 지도를 다시 들여다봤다.
좌표가 흐릿하게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으로 만졌을 때도 종이는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종이 한 장이 살아 있는 것처럼 반응한다는 게,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첫 회의가 열렸다.
지휘관들과 마법사들, 그리고 나. 좁은 지휘소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앉았다. 촛불 몇 개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회의 내용의 절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군사 용어였고, 나머지 절반은 불안한 침묵이었다. 누군가 발언을 하면 곧바로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부정하고, 부정한 말은 또 다른 사람이 부정했다. 결론이 나지 않는 논의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회의가 끝나갈 때쯤, 늙은 마법사 한 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기, 이건 보고할 사안이 아닐 수도 있는데."
다들 그를 쳐다봤다. 그는 손을 어색하게 비비며 말을 이었다.
"마력 계측기가 어제부터 마왕성 방향에서 이상한 값을 잡고 있습니다."
"이상한 값이 뭔데."
"측정 불가입니다. 기기가 고장 났나 싶어서 세 번을 바꿔봤는데, 다 같은 값이 나옵니다."
측정 불가.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남았다.
측정할 수 없는 힘. 그게 뭐든,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계측기라는 게 원래 어느 정도 오차가 있어도 값 자체는 나오는 물건이었다. 아예 값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우리가 가진 상식의 범위를 벗어난 무언가가 저 너머에 있다는 뜻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홀로 지휘소에 남았다.
창밖을 보니 여전히 하늘은 이상한 색이었고, 별은 평소보다 적었다. 원래 있어야 할 별자리 몇 개가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착각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윤서아는 지금 어디 있을까.
오늘 저녁, 파티원들과 함께 후방 진영에 도착한다는 전언을 받았다. 반가운 소식이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놓여야 정상인데, 오히려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흔들림을 오래 바라보았다. 불꽃이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짧은 순간에, 뭔가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이 전쟁, 뭔가 잘못됐다.
확신은 없었다. 그저 몸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도가 스스로 변하고, 계측기가 값을 읽지 못하고, 하늘이 핏빛으로 물드는 이 모든 조짐들이 우연히 겹친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휘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급한 걸음이었다.
문이 벌컥 열리고, 병사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도윤 님, 후방 진영에서……"
말을 잇지 못하고 그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촛불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