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것과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검을 쥔 손이 떨렸다. 손바닥에 흐른 땀이 손잡이를 미끄럽게 만들었다.
"도윤 씨, 오지 마세요!"
윤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으로 그녀가 존댓말을 벗어난 진짜 감정을 담아 소리쳤다. 늘 차분하게 상황을 읽던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그녀와 그것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것과 그녀 사이에 내가 들어섰다.
"여기서부터는 못 지나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가 정말 막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검신을 쥔 손목이 이미 뻐근하게 저려오고 있었다.
그것이 팔을 들어 올렸다. 압도적인 크기의 팔이 나를 향해 내려왔다. 그림자가 먼저 나를 덮었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카앙!
검으로 막았다.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충격이 왔다. 팔 전체를 타고 올라온 진동이 어깨뼈까지 흔들었다.
밀려났다. 세 걸음, 네 걸음. 발뒤꿈치가 흙바닥을 갈아내며 도랑을 만들었다.
"버텨야 해."
입 밖으로 낸 말이 나 자신을 향한 명령처럼 들렸다. 다리에 힘을 다시 줬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서 있었다.
최은영이 옆에서 활을 쏘며 지원했다. 화살은 여전히 흡수됐지만, 그것의 시선을 조금이나마 분산시켰다. 화살촉이 놈의 피부 같은 표면에 닿는 순간 빛으로 흩어지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놈이 어디를 봐도 우리한테 안 통해요! 뭐라도 방법을 찾아야 해요!"
최은영의 목소리에도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늘 침착하던 그녀도 화살통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자 손이 빨라지고 있었다.
방법. 그 말이 머리를 세게 때렸다.
마법도, 화살도, 검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 아직 시도하지 않은 게 있었다.
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병사들이 사라졌다. 그런데 그 사라짐에는 규칙이 있었다.
항상 놈의 발밑, 정확히 밟히는 범위 안에서만 벌어졌다.
원거리 공격은 흡수했지만, 놈이 직접 밟거나 만지지 않으면 그 소멸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놈의 공격 범위 밖에서만 움직이면 최소한 즉사는 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놈이 지나온 자리를 되짚었다. 왼발, 오른발, 다시 왼발. 놈이 밟은 자리마다 병사 하나가 사라졌었다. 우연이 아니었다.
"전군, 놈과 5미터 이상 거리 유지! 접근 대신 유인만 해!"
외쳤지만 목소리가 갈라졌다. 폐 안쪽이 타는 듯 아팠다. 언제부터 이렇게 숨이 가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병사들이 흩어지며 놈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았다. 몇몇은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다 오히려 놈의 발치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놈을 막을 수 없다. 시간을 버는 것뿐이다.
놈이 다시 팔을 휘둘렀다. 이번엔 더 빠르게.
카앙!
검이 부러졌다.
손에 남은 건 반쪽짜리 검신뿐이었다. 부러진 단면에서 반사된 빛이 눈을 찔렀다.
피할 곳이 없다는 걸 이미 안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짧게 스쳤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마법진이 펼쳐지는 빛이 보였다.
윤서아였다.
그녀가 후방에서 대규모 결계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빛의 선이 허공에 복잡한 문양을 그리고 있었다. 저렇게 큰 마법진을 그리는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조금만 버텨줘요!"
그녀의 목소리에 예전의 확신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흔들림 없는 어조였다.
버텨야 한다. 조금만 더.
부러진 검신을 고쳐 쥐었다. 손잡이 끝만 남은 걸 다시 움켜쥐어야 했다. 놈의 다음 공격이 다가오는 걸 느꼈다. 공기가 밀려오는 감각으로 먼저 알 수 있었다.
한 번.
피했다.
두 번.
또 피했다. 옆구리를 스치는 바람에 살갗이 따가웠다.
세 번.
이번엔 피할 자리가 없었다. 발이 이미 뒤로 물러날 공간을 잃었다.
놈의 손이 나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등 뒤에서 빛이 폭발하듯 터졌다.
윤서아의 결계가 완성됐다.
놈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 완전히 막은 건 아니었다. 그저 늦춘 것뿐이었다. 놈의 손이 결계의 표면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종이 한 장 차이였다.
하지만 그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였다.
"지금이에요, 다들 뒤로!"
병사들이 결계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부상자들을 끌어안고, 서로를 부축하며. 누군가는 다리를 절며 뛰어왔고, 누군가는 동료의 등에 업힌 채로 실려왔다.
나도 검신을 지팡이처럼 짚고 결계 안으로 물러났다. 걸음마다 무릎이 꺾일 것 같았지만 참았다.
놈이 결계 표면을 손으로 밀었다. 표면이 크게 일렁였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물결처럼 퍼지는 빛의 파문이 놈의 손 모양을 그대로 본떠 새겼다.
"얼마나 버틸 수 있어."
윤서아에게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더 빠져 있었다. 입술까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오래는 못 버텨요."
짧은 대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두 손이 여전히 마법진 위에서 떨고 있었다. 마력을 쥐어짜내는 소리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놈이 다시 손을 들었다. 결계를 향해 내려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손이 하늘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결계 안, 남은 병력을 눈으로 훑었다. 처음 진격했던 인원의 절반도 남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나란히 뛰던 얼굴들이 지금은 없었다.
박현우가 부상당한 몸으로 겨우 일어나 앉았다. 옆구리를 부여잡은 손 사이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을 부축하려 손을 뻗고 있었다.
최은영은 화살통이 텅 빈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화살 없는 활을 여전히 손에서 놓지 않은 채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전멸이다.
놈의 손이 결계를 향해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더 있다는 걸 직감했다.
놈이 병사들을 소멸시킬 때, 정확히 같은 지점만 반복해서 밟지 않았다.
한 번 밟은 자리는 다시 밟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놈이 지나온 경로를 다시 그려봤다. 왼쪽, 오른쪽, 앞, 다시 왼쪽. 겹치는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게 규칙이라면, 이용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콰앙!
결계 표면에 균열이 생겼다. 실금처럼 시작된 균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