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살, 최악의 직업

1화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라이트노벨 표지였다. 정확히는 3층 서재 구석에 꽂혀 있던 문고판 78권짜리 전집. 표지가 유독 촌스러웠는데, 그게 또 정이 갔었다. '아, 나 이거 완결까지 다 봤었는데.' 심지어 외전 두 편이랑 스핀오프 만화까지 챙겨봤다. 서른넷, 위암 4기, 병실 침대에서 마지막으로 읽던 게 그 시리즈 외전이었다. 링거 줄을 꽂은 채로 페이지를 넘기다가 잠들었던 그 밤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열 살짜리 몸으로 흙바닥에 앉아 있었다. '이거 뭐야.' 손을 들어봤다. 작다. 어이없을 정도로 작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통통하고, 손톱도 짧고 여물지 않았다. '이거 완전... 초등학교 3학년 손이잖아.' "도훈아! 밥 먹어야지!" 마당에서 어머니, 한미경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아니, 아주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였다. 이 몸의 어머니. 목소리 톤이 어딘가 익숙해서 심장이 덜컹했다. '적응 좀 해라, 이도훈.' 나는 속으로 스스로를 다그쳤다. '환생물 주인공들 다 이 타이밍에 정신 못 차리다가 얻어맞잖아. 나는 안 그럴 거야.' 전생의 기억은 이상하게 또렷했다. 서른 넘어서까지 라이트노벨과 애니메이션에 파묻혀 살던 인생. 누군가는 그걸 오타쿠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걸 낭비라고 불렀지만. 회사 다닐 때 상사가 "그 나이에 아직 그런 거 보냐"고 비웃었던 것도 기억난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자산이었다. 왜냐면... 나는 이야기 속 클리셰를 거의 다 알고 있었으니까. 전개, 함정, 반전, 뻔한 죽음 플래그까지. '회사 다니는 것보단 이게 훨씬 쓸모 있을 줄이야.' 마당으로 나가면서 집 구조를 슥 훑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집, 흙벽, 지붕에 얹은 마른 풀. 드라마 세트장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클리셰적인 '중세풍 시골집'이었다. '이거 완전 판타지 애니 오프닝에 나오는 배경이잖아.' 이곳은 이세계였다. 마법이 있고, 몬스터가 있고, 열 살이 되면 '직업'이라는 걸 받는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마을 광장에서 아이들 전부가 신에게서 직업을 받는 감별식. 어제 저녁밥 먹을 때부터 온 가족이 그 얘기만 했다. "긴장되냐?" 아버지, 이성민 씨가 마당에서 아마포를 손보며 물었다. 손끝이 거칠고, 팔뚝엔 오래된 흉터가 몇 개 있었다. 농사도 짓고, 가끔 마을 자경단 일도 나가는 모양이었다. "아뇨, 뭐."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하나도 안 태연했다. '이 세계 직업 시스템, 이거 완전 게임 스탯창이잖아.' 라노베에서 수백 번 본 클리셰가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진다니. 찌잉-!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설레는 건가, 무서운 건가. 아마 둘 다겠지.' 밥을 먹었다. 잡곡 죽에 절인 채소 몇 조각. 맛은 그냥저냥이었는데, 이상하게 배가 든든해지는 느낌이었다. '몸이 어리니까 소화도 빨리 되나.'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까지 다 신기했다. 밥을 먹고 나서 어머니가 옷매무새를 정리해주셨다. "오늘은 씻고 가야지." 그녀가 물통에 물을 받아 얼굴을 닦아주며 말했다. "엄마,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나는 슬쩍 몸을 뺐다. "그래도." 어머니가 웃으며 손을 놓지 않았다. '이거... 이거 좀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전생엔 이런 걸 받아본 기억이 가물가물했으니까. 마을 광장으로 걸어가는 길, 흙길 옆으로 늙은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이런 거 게임 배경음으로 깔면 딱이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벌써 광장 입구였다. 마을 광장에는 이미 애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스무 명은 넘어 보였다. 다들 깨끗한 옷을 입고 나온 걸 보니,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는 이 세계 사람들도 다 아는 모양이었다. 또래 아이들 얼굴을 하나씩 훑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서은채. 동그란 안경을 쓴, 옆집 여자아이. 전생의 기억이 섞이기 전이었다면 그냥 '동네 친구'였겠지만. 지금 보니까... 음, 그냥 그런 거다. 안경 너머 눈이 크고,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특징이었다. '귀엽네.' 딱 그 정도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서른넷 아저씨 정신머리로 열 살짜리한테 이상한 감정 느끼면 그건 진짜 범죄니까. "도훈아!" 은채가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치맛자락을 붙잡고 뛰는 폼이 어딘가 급했다. "어, 은채야."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떨려?" 그녀가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안경알에 광장 빛이 반사돼서 눈이 잘 안 보였다. "조금." 나는 짧게 답했다. 사실 하나도 안 떨렸다. 왜냐면...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뻔하지. 이런 이세계물에서 주인공은 항상 뭔가 특별한 걸 받아.' 숨겨진 최강 직업이라거나, 유일무이한 히든 클래스라거나. 그런 클리셰가 얼마나 많았는데. '나도 뭔가 하나 받겠지. 최소한 [검성(잠재)] 정도는.' 감별식은 신전 앞 제단에서 이루어졌다. 제단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표면에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사제가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손을 얹으면, 빛이 떠오르고 직업이 정해진다. [전사], [마법사], [궁수]... 흔한 직업들이 줄줄이 나왔다. 아이들 표정도 딱 그만큼 흔했다. 좋아하는 애도 있고, 시무룩한 애도 있고. 한 아이가 [기사]를 받자 광장에 환호가 터졌다. 와아아-! 사람들이 손을 들고 소리쳤다. 누군가는 그 아이의 부모에게 다가가 축하한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저건 좀 좋은 거구나.' 나는 눈치껏 학습했다. '이 세계는 직업 카드 뽑기 게임이고, 지금 다들 SSR 나온 사람 구경하는 거네.' 그러다 강태오라는 이름이 불렸다. 귀족 가문 아이인데, 영주의 손자라고 했다. 머리에 리본까지 단 정장 차림으로 나온 걸 보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열 살짜리가 옷은 무슨 결혼식 하러 온 것처럼 입었네.' [검사(見習) 상급]. "오오!" 사람들이 감탄했다. 강태오는 팔짱을 끼고 코를 킁킁거렸다. "당연하지." 그가 거만하게 말했다. 턱을 살짝 들고 주변을 훑는 눈빛이, 딱 봐도 '내가 특별한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 옆에 있던 덩치 큰 소년, 김민재가 박수를 쳐줬다. "역시 태오 형이지!" 김민재가 소리쳤다. '재수 없네.' 나는 솔직하게 생각했다. '저 콤비 딱 각 잡혔네. 재벌 도련님이랑 그 밑에서 빨아주는 애.' 어디서 많이 본 조합이었다. 라노베 사이드 빌런 파티 구성 1번. 은채의 순서가 왔다. 사제가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빛이 은채의 손끝에서 부드럽게 피어올랐다. [통합의류사]. 처음 듣는 직업이었다. 사제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희귀 직업입니다." 사제가 말했다.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가, 곧 낮은 웅성거림이 퍼졌다. "통합의류사가 뭐야." "몰라, 처음 들어봐."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이거 좋은 거야?" 그녀가 작게 물었다. "당연히 좋은 거지."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뭔지도 모르면서. '희귀하다니까 좋은 거겠지, 대충.' 전생에서 배운 게 있다면, 게임에서 레어템은 일단 좋다는 거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배 속이 살짝 뒤틀렸다. '긴장은 안 했는데 왜 배가 이러지.' 발걸음을 옮기며 나는 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겼다. '괜찮아. 어차피 나는 주인공이니까.' 사제가 내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손바닥이 서늘하고 건조한 느낌이었다. 빛이 떠올랐다. 처음엔 희미하게, 그러다 점점 밝게. '좋아, 온다.' 전생의 감으로는 대충 이럴 때 주인공은 특별한 걸 받는다. 숨겨진 최강 직업, 혹은 전설급 클래스. 아니면 최소한 남들이 못 가진 특수 스킬 하나 정도는. 두근두근.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뭐가 나올까. 마검사? 용기사? 아니면 진짜 클리셰대로 [용사]?' 빛이 정점에 달했다가, 훅 사그라들었다. [직업 판정 완료] [견습생 (Apprentice)] 어라. 광장이 조용해졌다. 사제조차 살짝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는 헛기침을 두 번이나 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견습생이군요."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뒤쪽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김민재였다. 그가 강태오에게 뭔가 귓속말을 하는 게 보였다. 강태오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뭐야, 견습생이 뭔데?"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가서 광장에 울렸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다들 시선을 피했다. 어른들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고, 아이들은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은채조차 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설마... 이거 안 좋은 건가?'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이게 얼마나 최악의 결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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