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0살, 최악의 직업

3화

마을을 나서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내 능력이 진짜로 있는 게 맞나?' 견습생이라는 직업 자체는 백지였다. 서기관이 준 종이에는 딱 세 줄이 적혀 있었다. 직업: 견습생. 스킬 슬롯: 0. 특성: 없음. '와, 진짜 성의 없다.' 무슨 프린터 잉크 아끼려고 대충 찍은 이력서 같았다. 하지만 나는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감별식 날부터였다. 서기관이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손동작, 그 각도까지 눈에 다 들어왔다. 누가 하는 동작을 보면 그게 머릿속에 그대로 저장되는 느낌. '설마 나 관찰력 뒤지게 좋아진 거야?' 아니, 그것보다 더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몸이 같이 따라가는 느낌. 마을 훈련장 구석에 쭈그려 앉아서 몰래 지켜봤다. 마을 경비병 아저씨가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슥, 슥, 회전하며 내려치는 동작. 동네 아저씨가 아침 운동 삼아 하는 검술인데도, 그 안에 뭔가 리듬이 있었다. 나는 그걸 눈으로만 세 번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됐다.' 이상하게 확신이 들었다. "뭐 하냐, 꼬맹아." 경비병이 나를 발견하고 물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심장이 철렁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얼른 물러났다. '수상하게 봤나...' 발걸음을 재촉해서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뒷골목으로 가서 나무 막대기를 주웠다. 손에 딱 맞는 굵기였다. '이 세계는 이런 것까지 친절하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슥- 슥- 회전, 내려치기. 놀랍게도 몸이 그대로 따라 움직였다. 동작 각도, 무게중심 이동, 심지어 숨 쉬는 타이밍까지. 내 몸이 아니라 누가 대신 조종하는 것 같았다. [모방 습득: 검술 초식 1식 (숙련도 12%)] 어라? 진짜로 뜨네, 이거. 라노베에서나 봤던 그 시스템 메시지가 진짜로 내 눈앞에 떴다. 허공에 반투명한 파란 글씨로. 손이 덜덜 떨렸다. 한 번 더 휘둘러봤다. 슥- 슥- 회전, 내려치기. [모방 습득: 검술 초식 1식 (숙련도 15%)] '미친, 숙련도까지 올라가?' 이건 그냥 흉내 내는 게 아니었다. 정식으로 몸에 새겨지고 있는 거였다. '이게... 견습생의 진짜 특성이었어?' 서기관이 준 종이에는 없던 내용이었다. 스킬 슬롯이 0이라는 건 맞았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남의 동작을 보고 그대로 몸에 새기는 방식. 스킬창에 저장되지 않고, 그냥 몸 자체가 학습하는 것. '이거 완전 사기 캐릭터 아니야?' 아니, 정확히는 사기까진 아니었다. 시작이 너무 초라해서 그렇지. 전생의 나였다면 이게 얼마나 말이 되는 설정인지 알았을 거다. '견습생'이라는 이름 자체가 힌트였다. 남에게 배우는 자, 견습하는 자. 스킬을 하늘에서 받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서 훔쳐 배우는 직업. 그리고 나는... 전생부터 그 '모방'과 '패턴 인식'만큼은 프로였다. 서른 넷 인생 대부분을 이야기 구조 분석하며 살았으니까. 웹소설 리뷰하면서 클리셰 패턴 다 외웠고, 애니 작화 카피 지점까지 짚어냈던 인간이 바로 나였다. '이거다.' 나는 확신했다. 숙련도가 12%밖에 안 됐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남들은 하늘에서 스킬을 받고 끝이지만,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이 스승이 될 수 있었다. '검사를 보면 검술을, 마법사를 보면 마법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찌릿-! 갑자기 팔이 저려왔다. [경고: 미숙련 모방 사용, 근육 부담 누적] 으윽... 그렇지, 공짜는 아니었다. 숙련도가 낮을 땐 몸에 무리가 많이 갔다. 팔이 마치 헬스장 처음 간 날 다음날 아침처럼 뻐근했다. 하지만 그 정도쯤 감당할 수 있었다.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 '그래, 이 정도 페널티면 껌이지.' 나는 나무 막대기를 배낭에 챙겨 넣었다. 혹시 또 쓸 일이 있을까 싶어서. '이 정도면 나름 첫 아이템 획득이라고 봐도 되나?' 시시한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나는 마을을 떠나 반나절을 걸어 도시로 향했다. 길이라고 해봐야 흙먼지 날리는 소로였고, 중간에 지나가는 사람도 몇 없었다. '현실 세계였으면 벌써 지쳐 쓰러졌겠지.' 그런데 이 몸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견습생 몸빵은 그럭저럭 봐줄 만한가.' 한빛 모험가 길드. 마을 사람들이 늘 얘기하던, 도시에서 제일 크다는 그 건물. 간판부터 압도적이었다. 거대한 방패 모양 현판에 금색 글씨. 멀리서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크기였다. '이거 완전 게임 시작 마을 느낌인데.' 첫 마을에서 항상 있는 그 초대형 상징 건물. 나는 문을 밀고 들어갔다. 문이 어찌나 무거운지 온몸으로 밀어야 했다. '문부터 밸런스 조절 실패인가.' 길드 내부는 시장바닥 같았다. 의뢰판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고, 여기저기서 검이며 갑옷 부딪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술병을 들고 낮부터 웃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펴놓고 언쟁 중이었다. '뭐야, 여기 완전 이세계 술집 겸 취업센터네.' 접수처 쪽으로 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막았다. "꼬맹아, 여긴 애들 놀 곳 아니다." 험상궂은 남자가 말했다. 덩치가 산만 한데 얼굴은 어딘가 순박했다. '생긴 건 저래도 말투는 순한 편이네.' "모험가 등록하러 왔는데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심장이 쿵쿵거렸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등록? 몇 살인데?" 그가 물었다. "열 살이요." 나는 대답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참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열 살은 등록 가능하다. 견습 모험가 자격으로." 그가 마지못해 알려줬다. "대신 무리하지 말고, 위험한 의뢰는 절대 받지 마라. 알겠냐?" 그가 덧붙였다. '오, 생각보다 걱정해주는 타입이네.' "네,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인사했다. 접수처로 다가가니, 한 여자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긴 은발을 뒤로 묶은, 웬만한 배우보다 나은 외모였다. 책상 위에 서류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데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명찰에는 '윤소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다들 비주얼이 왜 이래.' "모험가 등록하러 왔어요." 나는 다시 말했다. 윤소이 씨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찻잔을 들다가 멈춘 것처럼, 잠깐 동작이 얼어붙었다. "...이도훈?" 그녀가 물었다. "어, 어떻게 제 이름을..."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설마 벌써 나에 대한 소문이 퍼졌나?'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저 종이쪽지가...' 나는 그제야 배낭 속 편지를 떠올렸다. 펴보지 않고 그냥 넣어둔 그 편지. 마을을 나서기 전, 뭐라 쓰여 있을지 뻔해서 열어보지도 않았던 그거였다. "아버님이랑 어머님께서 미리 연락 주셨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뭐? 부모님이 나보다 먼저 여기 손을 써놨다고?'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버렸다고 생각했던 부모님이, 사실은 앞서서 뭔가를 준비해두고 있었다는 거였다. '대체 무슨 내용을 써서 보낸 거지?' 하지만 나는 그걸 좋은 신호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냥 짐 처리하려고 미리 얘기해둔 거겠지.' '혹시라도 골치 아픈 일 생기면 자기들 책임 아니라고 못 박아둔 거 아닐까.' 마음이 완전히 꼬여 있었다. 전생에도 그랬듯, 좋은 걸 봐도 일단 나쁜 쪽으로 해석하는 버릇이 있었다. "직업이... 견습생이라고 들었는데요." 윤소이 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에 미묘한 조심스러움이 묻어 있었다. 마치 큰 병을 진단받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 같은 어조였다. "네, 견습생이요."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 얼굴에 잠깐 안타까운 기색이 스쳤다. 하지만 곧 표정을 고쳤다. "괜찮아요, 등록은 직업 무관하게 가능하니까요." 그녀가 미소 지었다. 미소가 너무 능숙해서,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견습생 등록하러 오는 애가 나 말고도 많았나 보네.' 서류에 이름을 적는 동안,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견습생이라도 상관없다.' '나는 훔쳐 배우는 게 특기니까.' '모두가 하늘에서 받는 걸, 나는 사람한테 훔친다.' 이게 내 유일한 무기였다. 펜을 쥔 손이 아까 나무 막대기를 휘두를 때보다 더 떨렸다. [모험가 등록 완료: 이도훈, 견습 모험가 등급 F] 파란 시스템 창이 눈앞에 뜨는 순간, 뭔가 뭉클했다. '그래, 시작이다.' 접수처 뒤편에서 누군가 나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다른 접수원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견습생이 여길 왜 왔대.' 정도의 표정이었다. 누군가는 대놓고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냈고, 누군가는 그냥 흥미로운 구경거리 취급하는 눈빛이었다. '뭐, 이해는 한다.' F등급에 스킬 슬롯 0인 애가 등록하러 왔으니 볼 만하겠지. '근데 너네가 뭘 알아.'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이제부터 증명하면 되는 거잖아.' 나는 애써 태연한 척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조금 떨렸다. 이게 앞으로 벌어질 소란의, 그저 작은 서막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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