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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등록을 마치고 이틀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길드 건물 구석에 마련된 견습생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기실이라고 해봐야 낡은 의자 몇 개와 게시판 하나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지붕 있는 데서 쉴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지.' 서른 넷 인생을 살아본 정신머리는 이런 데서도 자기 위안을 찾는 데 능숙했다. 윤소이 씨가 나를 위해 마련해준 건 숲 근처에서 나오는 '바구니 약초 채집' 의뢰였다. 보수는 낮았지만 위험도도 낮은, 나름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이거부터 해보세요. 견습 등급도 할 수 있어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하는데.' 나는 조금 부끄러워서 고개만 끄덕였다. 의뢰서를 살펴보니 조건이 꽤 상세했다. [의뢰명: 은엽초 채집] [등급: 견습] [보수: 동화 30개] [위험도: ★] '별 하나짜리 위험도라니, 이 정도면 동네 뒷산 소풍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의뢰판 앞에서 종이를 받아 든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저거 견습생 아니야?" 누군가 낮게 말했다. "진짜네, 신벌 받은 애."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돌아보니 몇몇 남자 모험가들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벌써 소문이 여기까지 왔나.'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긴, 이 동네에서 스킬 못 배우는 놈은 나 하나뿐일 테니 소문나기도 쉽겠지.' 그들 중 하나가 옆 사람에게 뭐라고 소곤거리더니, 이내 나를 향해 대놓고 손가락질까지 했다. '저기요, 저 청력 괜찮은데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괜히 대꾸했다가 일 커지면 손해 보는 건 나니까.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강태오였다. 김민재를 뒤에 달고 들어온 그는, 나를 보자마자 표정이 밝아졌다. "어, 이도훈? 여기 있었네." 그가 낄낄거렸다. '하필 여기서 마주치냐.' 나는 속으로 짜증이 났다. '이 넓은 길드에서 굳이 이 시간에 이 자리를 지나갈 확률이 얼마나 될까.' 확률 계산 같은 건 해봤자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계산기를 돌리는 내가 웃겼다. "모험가 됐다고 소문났던데, 진짜였네." 강태오가 다가와 말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자기 집 안방에 들어오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그래서 뭐." 나는 짧게 대꾸했다. "견습생이 견습 모험가라니, 이름 잘 맞네." 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주변 사람들 몇몇이 따라 웃었다. 찌잉-!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름 하나로 몇 년째 저러고 있냐, 대단하다 진짜.' 나는 속으로 감탄 반, 짜증 반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릴 때 놀리던 별명 하나로 이렇게까지 우려먹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너 그냥 여기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냐." 김민재가 옆에서 거들었다. "스킬도 못 배우는 놈이 뭘 하려고." 그가 비웃으며 말했다. '스킬을 못 배우긴 하지, 그런데 방법이 다른 거지.' 나는 속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는 내지 않았다. 괜히 정보 줄 필요 없잖아. '나중에 카드 한 장 딱 뽑아서 얼굴에 붙여주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은데.' 상상만으로도 조금 즐거워졌다. "할 말 없냐?" 강태오가 재촉했다. 그의 눈은 반응을 기대하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저렇게 반응 기다리는 거 보면, 은근히 순진한 구석도 있단 말이지.' "의뢰 받으러 왔으니까 비켜줄래."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자식 진짜 짜증 나게 하네.' 강태오는 잠깐 멈칫하더니, 오히려 더 신난 표정을 지었다. "오, 그래도 말은 하네?" 그가 김민재를 돌아보며 웃었다. "거참, 신벌 받았는데 자존심은 살았네." 김민재도 맞장구쳤다. '둘이 콤비로 활동하나, 만담이라도 하는 줄.' 그때 윤소이 씨가 끼어들었다. "강태오 도련님, 여긴 접수 구역이에요. 소란 피우시면 곤란해요." 그녀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강태오는 잠시 그녀를 흘겨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알겠어요." 그가 마지못해 물러났다. 하지만 나가면서도 나를 향해 한 번 더 히죽 웃었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말이었다. 김민재도 뒤따라 나가면서 코웃음을 한 번 더 남기고 사라졌다. '버티고 말고를 왜 지가 판단하는 건데.'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깨를 툭 떨궜다. 긴장이 풀리자 오히려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사라진 뒤, 주변 남자 길드원들의 시선이 이번엔 윤소이 씨와 나 사이를 오갔다. "소이 누나가 저 꼬맹이 왜 저렇게 챙기지?"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몰라, 뭐 아는 사이인가." 다른 이가 답했다. '아, 이거 또 다른 종류의 시선이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윤소이 씨가 나를 신경 써줄수록, 오히려 내가 더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도 신경 안 써주는 게 편할 지경인데.' "신경 쓰지 마세요." 윤소이 씨가 작게 말했다. "저 때문에 괜히 눈치 보시는 거 아니에요?"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원래 이래요."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 뒤에 살짝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저 표정, 숨긴다고 숨겨지는 게 아닌데.' 그녀는 곧 접수대 쪽으로 다시 걸어가며 다른 모험가를 응대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잠깐 보다가, 나는 새삼 생각했다. '이 사람, 나한테 뭔가 갚아야 할 빚이라도 있는 건가.' 물론 그런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의뢰서를 챙겨 숲으로 향하려는데, 배낭 무게가 이상하게 가벼웠다. '뭐가 없어졌지?' 확인해보니 물통이 없었다. 아까 소란 중에 어딘가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하필 지금.' 숲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물 없이 가는 건 좀 무모한 선택이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바닥을 살피던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서은채였다. 안경을 고쳐 쓰며 물통을 들고 있었다. "이거, 네 거 맞지?" 그녀가 내밀었다. "어... 은채야?"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왜 여기 있는 거지?'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온갖 가능성을 그려봤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녀는 도시로 옮겨온 의류 공방에서 일한다고 했다. 다혜라는 장인의 공방이었다. "통합의류사 일 배우고 있어. 여기 근처에 심부름 왔다가..." 그녀가 설명했다. "그렇구나." 나는 짧게 대답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유독 길게 느껴졌던 건, 아까 강태오 무리와 있었던 소란을 그녀도 봤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다 보고 있었던 건가.' 마을을 떠날 때 인사도 없이 왔던 게 갑자기 미안해졌다. "인사도 안 하고 가서... 미안." 나는 어렵게 사과했다. "괜찮아. 다 들었어." 그녀가 대답했다. "...뭘 들었는데?"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견습생 받은 거." 그녀가 짧게 말했다. 순간 나는 방어적으로 굳었다. '또 시작이네, 동정.' 지금까지 마을에서 겪었던 시선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나는 먼저 선을 그었다. "동정하는 거 아니야."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호해서, 나는 순간 멈칫했다. "뭐?" 나는 되물었다. "난 그냥... 네가 뭘 하든 응원할 거야. 견습생이든 뭐든." 그녀가 말했다. 볼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이거 그냥 응원인 건가, 아니면...' 나는 순간 심장이 이상하게 뛰는 걸 느꼈다. 하지만 곧바로 스스로에게 딴지를 걸었다. '착각하지 마, 이도훈. 그냥 착한 애일 뿐이야.' 서른 넷 인생을 살아본 정신이, 열 살 몸의 설렘을 애써 눌러 담았다. '몸은 열 살인데 마음까지 열 살처럼 뛰면 곤란하지.' 스스로에게 그런 헛소리를 하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고마워." 나는 그 말만 짧게 하고 물통을 받았다. 손끝이 살짝 스쳤는데, 그녀가 먼저 손을 뺐다. '이거 원래 이렇게 어색한 사이였나.'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의뢰 나가는 길이야?" 그녀가 물었다. "응, 약초 채집." 나는 답했다. "조심해." 그녀가 손을 흔들며 돌아섰다. 그 뒷모습이 공방 쪽 골목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괜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바라봤다. '응원한다고 했지, 견습생이든 뭐든.'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남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의뢰가 먼저였다. 숲으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몇몇 견습생들이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등에 멘 바구니들이 걸음마다 흔들리는 게 보였다. '저 사람들도 다 이런 의뢰부터 시작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길드를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게시판을 한 번 더 돌아봤다. 강태오와 김민재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라고 했지.' 그 말을 곱씹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래, 버텨주지. 얼마든지.' 숲 입구에 다다르자 나무 냄새가 훅 끼쳐왔다. 바구니 약초 채집이라고는 해도, 처음 나가는 의뢰는 역시 긴장되는 법이었다. '별 하나짜리 위험도라고 방심하면 큰코다칠 수도 있으니까.' 전생의 게임 경험이 슬쩍 경고음을 울렸다. 숲길로 들어서는 순간, 저 멀리 나무 사이에서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견습 등급 몬스터라기엔 소리가 좀 컸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그쪽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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