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견습생은..." 아버지가 입을 열다가 멈췄다.
말을 하다 말고 저렇게 뜸을 들이면 꼭 나쁜 소식이더라.
전생에서도 그랬다. 회사 부장이 "김도훈씨는..." 하고 말을 끌면 백 프로 권고사직 통보였으니까.
"뭐야, 아빠. 말해줘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열 살짜리 성대는 원래 이렇게 잘 떨리는 건가.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옆에 있던 어머니까지 어깨가 축 처졌다.
"직업 중에 제일... 낮은 등급이다." 그가 말했다.
그 순간 마을 서기관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낮은 등급? 그래, 세상에 등급이 있으면 밑바닥도 있는 거지. 나쁘지 않아, 밑바닥이 뭐 대수라고.'
애써 태연하게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심장이 쿵 떨어지고 있었다.
*
집에 돌아와서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을 서기관이 발급해준 종이 한 장.
[직업: 견습생]
[등급: 최하]
[스탯 성장 보정: 없음]
[스킬 슬롯: 0]
[특수: 판정 불가 항목 다수]
와, 이거 완전 백지네.
라노베였으면 여기서 반전이 있어야 하는데.
숨겨진 진화 조건이라거나, 사실은 만능 직업이라거나, 나중에 각성해서 세상을 구한다거나.
종이 뒤집어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앞면 다시 봤다.
여전히 없었다.
옆으로 기울여봤다. 빛에 비춰봤다. 심지어 냄새도 맡아봤다. 이건 정말 미련한 짓이었지만 그때는 뭐라도 하고 싶었다.
진짜 백지였다.
이 정도면 감동적일 지경이다. 완벽하게, 처절하게, 아무것도 없다.
나는 종이를 조용히 접어서 서랍 속에 넣었다.
'괜찮아. 이 세계에도 흙수저 성공 신화 하나쯤은 있어야지.'
억지로 위로하고 있었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견습생은 스킬을 못 배운다는 뜻이니?" 어머니가 서기관에게 물었다.
목소리에 이미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렇습니다. 견습생 등급은 마나 친화율이 0에 가깝습니다." 서기관이 사무적으로 답했다.
억양 하나 없이, 마치 오늘 날씨를 말하듯이.
"그럼 검술이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한 번만 더 확인하고 싶었던 거겠지. 뭔가 다른 답이 나올 수도 있다는 희망.
"불가능합니다. 스킬 슬롯 자체가 없으니까요." 서기관이 딱 잘라 말했다.
어머니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나는 옆에서 듣고 있었다.
'스킬 슬롯이 없다니, 이거 완전 하드모드잖아.'
게임으로 치면 캐릭터 생성창에서 스탯 전부 0으로 시작하는 거였다.
거기다 리셋 버튼도 없다.
환불도 안 되고, 재접속도 안 되고, 심지어 튜토리얼 스킵도 안 되는 진짜 최악의 뽑기.
으윽... 이게 실화냐.
전생에 확률형 아이템 뽑다가 최고가 텐트 하나 통째로 날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억울했다.
적어도 그때는 돈만 잃었지, 지금은 인생 전체를 잃은 기분이니까.
*
마을 사람들의 반응은 더 빨랐다.
다음 날 밭에 나가니 벌써 소문이 퍼져 있었다.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퍼지지, 이 시대에도 지라시라는 게 존재하는 건가.
"저 집 아들이 견습생이라던데." 누군가 수군거렸다.
"쯔쯔, 부모가 무슨 죄를 지었나." 다른 누군가가 혀를 찼다.
'죄는 무슨, 랜덤 뽑기였다고.' 나는 속으로 반박했다.
부모가 무슨 죄를 지어? 죄가 있다면 이 세계 시스템 설계자한테나 물어봐라.
하지만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열 살짜리가 어른들한테 따박따박 말대꾸하면 그것도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
밭일하는 아버지 등이 유난히 굽어 보였다.
*
강태오는 아예 마을을 돌아다니며 떠벌리고 있었다.
"신벌이래, 신벌!" 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신이 저 녀석 미워해서 견습생 준 거래!" 김민재도 옆에서 맞장구쳤다.
'신벌? 이거 좀 웃긴데.'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신이 나를 미워할 만큼 신경 써줄 리가 없잖아.
만약 신이 진짜로 존재해서 나 하나를 미워할 정도로 시간이 남았다면, 그건 신이 아니라 백수다.
그냥 확률이 나빴을 뿐이지.
가챠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누군 SSR 뽑고 누군 잡템 뽑고.
나는 그냥 그 잡템이었을 뿐이다.
강태오 저 녀석은 분명 뭔가 좋은 직업 받았겠지. 딱 봐도 재수 없게 생긴 얼굴이니까.
'두고 봐라. 나중에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니.'
이렇게 다짐은 했지만, 사실 방법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
그날 저녁, 부모님이 부엌에서 낮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밥 먹고 방에 들어가려다가 발이 저절로 멈췄다.
"이대로 두면 애가..." 어머니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알아서 할게." 아버지가 짧게 말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고 무거웠다.
문틈으로 살짝 엿봤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촛불 하나가 흔들릴 때마다 어머니 그림자도 같이 흔들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숨을 죽였다.
'뭐지, 저 대화. 왜 저렇게 심각해.'
가슴이 답답해서 그대로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부엌 식탁에 마주 앉으니 평소보다 훨씬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도훈아, 이제 네가 알아서 해라." 아버지가 말했다.
표정이 딱딱했다.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고, 식탁 위 나뭇결만 바라보고 있었다.
'알아서 하라고? 이건... 포기 선언 아니야?'
나는 그 말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었다.
전생에서 회사 다닐 때, 부장이 "이제 김도훈씨 알아서 잘 하겠지" 라고 말한 그날 바로 인수인계 서류가 날아왔었다.
그 기억이 겹쳐지면서 확신이 들었다.
'이건 통보다. 완곡한 통보.'
사실 아버지 마음속엔 다른 뜻이 있었다.
견습생이라는 이유로 아들의 인생을 대신 결정해주지 않겠다는, 존중의 표현이었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 살짜리 몸에 갇힌 서른 넷의 정신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버림받았다.'
딱 그 한 문장으로 정리해버렸다.
머릿속에서 오만 가지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 이 세계에서 견습생은 필요 없는 존재구나.'
이 집안의 밥값도 못하는 존재.
마나 친화율 0에, 스킬 슬롯도 0에, 미래도 0.
숫자로만 따지면 완벽하게 무가치한 인간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낡은 배낭에 옷 몇 벌, 말린 빵 몇 조각.
빵은 어제 어머니가 구운 걸 몰래 챙긴 거였다. 이렇게 훔치듯 가져가는 것도 참 못났다 싶었지만, 지금은 자존심 챙길 때가 아니었다.
'가족한테 짐이 되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겠어.'
비장하게 결심했다.
거울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각오를 다지는 꼴이, 지금 생각하면 무슨 삼류 드라마 주인공 같았다.
사실 이건 완전히 오해에서 시작된 결심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인생이 이렇게 사소한 착각으로 크게 틀어질 수 있다는 걸.
*
창밖으로 은채네 집 지붕이 보였다.
굴뚝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은채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 집 마루에서 같이 놀던 기억, 나무 막대기로 검술 연습한다며 뛰어다니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런 모습으로 보이기 싫어.'
최하 등급 견습생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도망치듯 떠나는 모습을, 하필 그 아이한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인사 없이 떠나기로 했다.
이것도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결정이었지만, 그때는 알 수 없었다.
*
짐을 다 싸고 마루에 나왔을 때, 어머니가 조용히 다가왔다.
발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원래도 조용한 분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조심스러웠다.
"도훈아." 그녀가 내 손에 뭔가를 쥐여줬다.
동전 몇 개와 작은 종이쪽지였다.
동전은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차갑고, 종이쪽지는 여러 번 접혀서 모서리가 다 닳아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나는 물었다.
"...조심히 다녀." 어머니는 그 말만 하고 돌아섰다.
뒷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나는 그 종이쪽지를 펴보지도 않고 배낭에 쑤셔넣었다.
'뭐 별거 아니겠지.'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에 종이를 펴봤어야 했다.
하지만 열 살짜리 몸으로 비장한 가출을 감행하는 마당에, 그런 세심함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그게 실은 한빛 모험가 길드 수석 접수원, 윤소이에게 보내는 부탁 편지였다는 걸.
나는 그때 전혀 몰랐다.
동구 밖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자꾸 무거웠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볼까 하다가, 그마저도 참았다.
'괜찮아. 어차피 최하 등급이잖아. 잃을 것도 없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걸었지만, 사실 이 착각이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지는, 이 조그맣고 답답한 마을 어귀를 벗어날 때까지도 나는 조금도 짐작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