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숲은 캄캄했다.
나는 뛰었다.
발밑에서 잔가지가 부러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등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게 섰거라!"
남자 목소리였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잡힐 것 같았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긁었다.
뺨에 가는 실선이 그어졌다.
따가웠다.
그런데 멈출 수 없었다.
발밑의 흙은 축축했다.
어젯밤 비가 온 모양이었다.
신발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을 신고 있었다.
헝겊을 발에 두르고 끈으로 묶은 것.
그 사이로 물이 스며들었다.
차가웠다.
차가운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발이 아픈 걸 잊게 해줬으니까.
은화 세 닢.
그게 내 값이었다.
오늘 아침이었다.
마당 안쪽 헛간 뒤에서 물을 긷다가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평소보다 낮고, 평소보다 은밀한 목소리였다.
나는 물동이를 내려놓고 벽에 등을 붙였다.
"열 살이면 밭일도 시키고 방목도 시킬 수 있소."
낯선 사내의 목소리였다.
걸걸하고,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억양이었다.
"세 닢으로 하겠소."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이상하게 더 아팠다.
"두 닢 반이면 데려가겠소."
"세 닢이오. 그 아래로는 안 되오."
흥정이었다.
나를 두고 하는 흥정.
숫자가 오르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벽에 등을 붙인 채 숨을 죽였다.
세 닢.
두 닢 반.
세 닢.
그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튕겨 다녔다.
나는 그 순간 배 속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아버지의 말.
"내일 아침 데려가시오. 애가 밤새 도망 못 가게 방에 가둬둘 테니."
방에 가둬둘 테니.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나는 물동이를 그대로 두고 뒷담을 넘었다.
뒤도 안 돌아봤다.
해가 지기 전까지 숲 근처에서 숨어 있다가 어둠이 깔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지금.
다리가 후들거렸다.
숨이 가슴을 찢을 것 같았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개 짖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한 번, 두 번, 나는 뒤를 살짝 돌아봤다.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따라오는 게 멈춘 걸까.
아니면 방향을 잘못 잡은 걸까.
알 수 없었다.
나는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무릎이 찢어졌다.
피가 났다.
아프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엎드려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쉬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숲의 정적이 그만큼 깊었다.
벌레 우는 소리,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 그 사이로 내 숨소리만 도드라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눈앞이 흔들렸다.
숲의 어둠 위로 다른 장면이 겹쳐졌다.
헤드라이트.
트럭 한 대가 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브레이크음이 귀를 찢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피할 수 없었다.
충격.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김민준.
서른두 살.
야근 마치고 걷던 퇴근길.
횡단보도.
초록 불이었다.
분명 초록 불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가 오후 11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숫자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회사 로비를 나선 시각이 11시 20분.
집까지 걸어서 15분.
그 15분 사이에 모든 게 끝났다.
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확인하던 계좌 잔고.
3,240,000원.
월급이 들어온 지 사흘째였다.
그 숫자가 마지막으로 본 화면이었는지, 아니면 그다음에 본 게 트럭의 헤드라이트였는지, 순서가 헷갈렸다.
나는 손을 짚고 일어났다.
숨이 가빴다.
이건 내 기억이 아니었다.
그런데 내 기억이었다.
이도윤.
열 살.
한빛 왕국 변두리의 농민 소년.
그게 나였다.
그런데 동시에 나는 서울 어느 회사에서 야근을 하던 회사원이기도 했다.
두 개의 삶이 한 머릿속에 있었다.
둘 다 진짜였다.
둘 다 내 것이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해가 됐다.
이상하게도 이해가 됐다.
게임.
나는, 김민준은, 죽기 전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다.
판타지 세계관의 롤플레잉 게임.
레벨과 직업, 스탯과 스킬트리.
세프로트라는 이름의 성장 경로.
그 게임을 시작한 게 언제였는지도 떠올랐다.
2년 전 겨울.
야근이 유독 잦았던 시기였다.
집에 돌아오면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그 게임만 붙잡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는 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유일한 도피처였다.
레벨업 공식.
초기 스탯 배분표.
직업별 성장 곡선.
그 모든 데이터가 손끝에서 흘러나올 것처럼 선명했다.
그 게임의 세계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숲이, 겹쳐 보였다.
우연일까.
아니었다.
확신이 있었다.
근거는 없었다.
그런데 확신이 있었다.
손이 떨렸다.
무릎의 통증이 뒤늦게 밀려왔다.
찢어진 살갗 사이로 흙이 파고든 게 느껴졌다.
따갑다는 감각이 뒤늦게 도착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눈앞에 무언가 떠 있었다.
투명한 창.
허공에 걸린 얇은 유리 같은 판.
그 안에 글자가 박혀 있었다.
[이도윤]
[레벨 0]
[직업 : 없음]
나는 숨을 멈췄다.
손을 뻗었다.
창은 만져지지 않았다.
그런데 분명히 보였다.
레벨 0.
그게 뭘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동시에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민준으로 살았던 2년 동안 이 창을 수백 번, 수천 번 봤다.
레벨 0에서 시작해서 스탯을 찍고, 스킬을 배우고, 몬스터를 잡아 경험치를 쌓는 그 모든 과정을 알고 있었다.
직업 선택창이 뜨는 시점.
초기 스킬 습득 조건.
성장 구간별 병목 지점.
그 모든 게 데이터처럼 머릿속에 정리돼 있었다.
그런데 이건 게임이 아니었다.
숲의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릎에서 흐르는 피가 진짜로 뜨거웠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진짜로 아팠다.
이건 화면 속 캐릭터가 아니었다.
나였다.
이도윤이었다.
그 사실이 뒤늦게 몸을 훑고 지나갔다.
만약 이게 진짜 게임의 법칙을 따른다면.
경험치를 쌓으면 레벨이 오른다.
레벨이 오르면 강해진다.
강해지면.
강해지면 은화 세 닢에 팔려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이 스치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동시에 뭔가 뜨거운 것이 목 아래에서 올라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분노인지, 희망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창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도 만져지지 않았다.
그런데 창 아래쪽에 작은 글씨가 하나 더 떠 있는 게 보였다.
[경험치 : 0/100]
0.
숫자가 그렇게 작고 초라하게 보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받던 월급의 뒷자리 숫자보다도, 계좌 잔고의 마지막 숫자보다도, 더 작고 더 초라했다.
그런데 그 0이라는 숫자가 오히려 나를 붙잡았다.
0에서 시작한다는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건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등 뒤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