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레벨 0의 전생자

3화

새벽시장이라 불리는 구역은 도성 남쪽에 있었다. 나는 오전 5시 무렵, 그곳으로 흘러가듯 들어갔다. 발이 먼저 움직였다. 머리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냥 사람이 많은 곳으로, 냄새가 나는 곳으로 걸었을 뿐이다. 좌판마다 물건이 쌓여 있었다. 채소, 가죽, 무기, 향료. 사람들의 외침이 겹쳤다. "신선한 사과요! 한 알에 동전 두 냐!" "이 가죽 좀 봐요, 손질 다 됐습니다!" "향료 사가세요, 향료!" 목소리들이 뒤섞여 하나의 소음이 되었다. 나는 그 소음 속에 서 있었다. 동전 두 냐. 나는 그게 얼마인지 몰랐다. 두 냐가 싼 건지 비싼 건지, 기준이 없었다. 이도윤의 기억을 뒤져봤다. 없었다. 김민준의 기억을 뒤져봤다. 그것도 없었다. 두 개의 삶을 합쳐도 이 세계의 물가는 나오지 않았다. 품속에는 여전히 그 금화가 있었다. 낡고 오래된 문양이 새겨진 금화. 손끝으로 옷 위를 눌러보면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걸로 뭘 살 수 있는지, 얼마의 가치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도윤의 기억에도 이런 금화는 없었다. 김민준의 기억에도 이 세계 화폐 체계는 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힐끗 쳐다봤다. 좌판 주인이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뭐 사시려고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고개만 젓고 자리를 떴다. 배가 고팠다. 산딸기 몇 알로 사흘을 버틴 몸이었다. 몸이 그 사흘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앞이 가끔 흐려졌다. 빵집 앞을 지나쳤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입에 침이 고였다. 빵집 주인이 화덕에서 빵을 꺼내고 있었다. 노릇하게 구워진 겉면에서 김이 올라왔다. 그 김이 내 쪽으로 흘러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냄새를 삼켰다. 빵은 아니고 냄새만. 돈이 없었다. 정확히는, 쓸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금화를 함부로 꺼내 보였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최강일 앞에서도 그 금화 때문에 궁지에 몰렸었다. 그 순간이 떠올랐다. 금화를 발견한 최강일의 눈빛. 탐욕이 번뜩였던 그 표정.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빵집에서 최대한 멀어지듯 걸었다. 나는 시장을 몇 바퀴 돌았다. 같은 좌판을 두 번, 세 번 지나쳤다. 좌판 주인들이 나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수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오전 5시. 노점들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물건을 상자에서 꺼내고 좌판을 펼쳤다. 시장의 소음이 조금씩 커졌다. 오전 6시. 거리에 아침빛이 번졌다. 하나둘 밝아지는 햇살이 골목을 비췄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시장으로, 일터로 서둘러 향하는 모습이었다. 오전 7시. 나는 파장 종이 울릴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 속이 텅 비어 있는 게 느껴졌다. 위가 스스로를 접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무릎이 살짝 꺾였다. 상인들이 좌판과 천막을 거두기 시작했다. 나는 짐수레에 밀리듯 시장 외곽 골목으로 물러났다. 이대로 밤이 오면 어떻게 될까.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틀을 더 굶으면 걷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다 어딘가 쓰러지면, 그 다음은 뭘까. 이 세계에서 이름도 모르는 채 죽는 것.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시장에서 밀려난 뒤 외곽의 골목과 처마 밑을 전전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시장 구역과 떨어진 빈 창고 뒤편에 몸을 기댔다. 나는 다시 금화를 꺼냈다. 달빛 아래 흐릿하게 빛났다. 동그란 표면 위 문양이 달빛을 받아 어렴풋이 드러났다. 누구의 얼굴인지, 무슨 상징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오래된 것이라는 느낌만 있었다. 이걸 팔아야 한다. 그런데 어디서, 누구에게 팔아야 하는지 몰랐다. 무작정 꺼내 보이면 도둑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또 다른 최강일 같은 자를 만날 수도 있었다. 나는 빈 창고 벽에 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몸이 먼저 무너졌다. 정신은 아직 버티고 있었는데 몸이 먼저 포기했다. 다음 날, 오전 5시. 눈을 떴을 때 온몸이 뻐근했다. 찬 바닥에서 밤을 보낸 흔적이 목과 허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새벽시장을 향해 다시 걸었다. 전날 보았던 길에서는 상인들이 막 좌판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조금 달랐다. 배고픔이 시야를 좁혀놓았던 것 같았다. 오늘은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간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수상점. 나무 간판에 새겨진 글씨가 낡아 있었다. 창 너머로 오래된 물건들이 진열돼 있었다. 반지, 접시, 낡은 갑옷 조각. 골동품을 다루는 가게였다. 나는 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여기라면. 다른 곳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적어도 도둑을 잡으러 온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아닐 테니까.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딸랑 소리를 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자가 계산대 뒤에 있었다. 인상이 온화했다. 낡은 책을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게, 손님. 뭘 찾으시나." 목소리도 인상만큼 부드러웠다. "팔 게 있어서 왔습니다." 나는 목이 마른 걸 느끼며 말했다. 사흘 굶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나는 금화를 꺼내 계산대에 올렸다. 남자의 표정이 순간 변했다. 책을 덮는 손이 잠깐 멈췄다. 눈이 커졌다가 다시 좁아졌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쓰고 금화를 집어 들었다. 돋보기를 꺼내 자세히 살폈다. 불빛 아래 금화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문질러보기도 했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 침묵 동안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이 침묵이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어디서 났나." 남자가 돋보기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머니 유품입니다." 같은 거짓말이었다. 두 번째로 말하니 더 쉽게 나왔다.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익숙해지는구나. 그 사실이 묘하게 씁쓸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금화를 계산대 위 저울에 올렸다. 저울의 눈금이 흔들리다 멈췄다. "이건 고대 왕조 시대의 금화네. 지금은 시중에 도는 화폐가 아니야. 하지만 순금 함량이 높고,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값을 꽤 쳐주지." 남자의 목소리에 약간의 흥미가 섞여 있었다. 학자 같은 어조였다. "얼마나..." 목이 말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은전 서른 냐. 어떤가." 서른 냐. 숫자가 귀에 박혔다. 어제 사과 한 알이 두 냐였다. 서른 냐면 며칠은 배불리 먹고도 남을 돈이었다. 빵을 사고, 잠잘 곳을 구하고, 어쩌면 옷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숫자가 빠르게 계산됐다. 서른을 두로 나누면 열다섯. 사과 열다섯 알. 아니, 사과 말고 다른 것도 살 수 있을 텐데. "좋습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남자가 서랍에서 은전을 꺼내 세었다. 하나, 둘, 셋. 동전이 계산대 위에 쌓였다. 서른 개가 될 때까지. 동전이 쌓이는 소리가 짤랑거렸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 나는 그 은전들을 바라봤다. 내 손으로 처음 만든 돈이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벌어들인 것. 아니, 정확히는 판 것이지만. 어쨌든 내 힘으로 마련한 첫 재산이었다. "이름이 뭔가." 남자가 은전을 자루에 옮겨 담으며 물었다. "이도윤입니다." "나는 박정수라 하네. 이 상점 주인이지." 박정수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들렸다. 평범한, 흔한 이름이었다. 그 평범함이 오히려 마음을 조금 놓게 했다. 박정수가 은전을 자루에 담아 건넸다. 자루는 두 손으로 받아야 할 만큼 묵직했다. "하나만 말해두지. 이 돈, 밖에서 함부로 보이지 말게. 좋은 물건을 판 뒤 자랑하다가 뒷골목에서 다치는 사람을 여럿 봤네." 박정수의 눈빛이 진지했다. 장사꾼의 얼굴이 아니라 걱정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자루를 받아 품에 안았다. 무게가 느껴졌다. 돈의 무게가 이렇게 실감 나는 건 처음이었다. 한 손으로 들기엔 묵직하고, 옷 속에 숨기기엔 조금 부피가 있었다. 나는 자루를 옷 안쪽 깊숙이 밀어 넣었다. 등과 배 사이에 자루의 형태가 느껴졌다. 이제 빵을 살 수 있다. 이제 잘 곳을 구할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 다리에 조금 힘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가게를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목덜미가 먼저 알았다. 따끔한 느낌이 스쳤다. 계산대 옆 진열장을 구경하던 남자였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몰랐다. 낡은 갑옷 조각들을 구경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몸의 방향은 나를 향해 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시선을 피했다. 너무 빨리 피했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고 문을 향해 걸었다. 문에 달린 종이 다시 딸랑거렸다. 밖으로 나서는 순간에도 그 시선이 등 뒤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돌아보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하지만 걸음마다 그 남자의 얼굴이, 시선을 피하던 그 각도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품속의 은전 자루가 무겁게 느껴졌다. 방금까지는 안도의 무게였는데, 지금은 다른 종류의 무게로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 내가 금화를 팔았다는 걸 알았다. 그 사실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