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마력 측정기의 눈금은 언제나 0에서 멈췄다.
여덟 살, 처음 그 숫자를 봤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측정기 화면에 뜬 새하얀 숫자 0. 그 옆에 나열된 다른 아이들의 숫자는 최소 12에서 시작했다.
담당 마법사가 기계를 두드려 보고, 다시 재 보고, 세 번째로 재 보고서야 고개를 저었다.
"고장이 아닙니다. 정말 0이에요."
그 말을 듣던 어머니의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놀란 것도, 슬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조용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꽉 잡았다. 그게 다였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던 온도, 마디가 굵고 거친 손가락의 감촉. 그 온도만 기억에 남았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제는 없다.
아버지는 몸을 쓰는 일을 했다. 마력 없는 노동자였다. 사고로 떠난 지 육 년.
어머니는 그 뒤로 두 사람 몫의 삶을 살다가, 삼 년 전 병으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남은 건 나와 열 살 수아, 그리고 월세가 두 달 밀린 반지하 방 하나.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만 보이는 방. 겨울엔 벽에서 물이 스며 나온다.
한빛마법학원 특대생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수아는 방바닥을 구르며 좋아했다.
통지서를 몇 번이고 읽고, 봉투에 코를 박고 냄새까지 맡아보더니 다시 소리를 질렀다.
"오빠, 이제 우리 부자 되는 거야? 이제 반지하 안 살아도 되는 거야?"
나는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특대생은 학비가 전액 면제되고 생활 지원금까지 나온다. 부자가 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는다.
그거면 충분했다. 수아에게 굶지 않는다는 말은 곧 부자라는 뜻이었으니까.
마력이 없는 특대생. 이론 시험 만점. 전체 1위. 실전 지식 탁월.
그게 나였다. 재능 없는 천재라는 우스운 별명이 붙었다.
입학식 날 강당에서 그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게 칭찬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안다. 그건 비웃음을 예쁘게 포장한 말이었다.
지금, 나는 그 별명값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도현."
서준혁이 나를 불렀다. 억양에 여유가 넘친다.
"오늘부터 이 던전 공략의 실질적 지휘는 네가 맡는다."
실습동 앞, 던전 입구는 거대한 돌문처럼 서 있었다.
표면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은은하게 빛난다. 청백색 빛이 돌 틈을 따라 흐르며 맥동했다.
1학년 A반 11위, 서준혁. 귀족가 도련님. 이 파티의 리더.
그가 나를 보는 눈빛에는 우월감과 귀찮음이 반씩 섞여 있었다.
"지휘라니요."
나는 되물었다. 목소리에 놀람을 섞지 않으려 애썼다.
"저는 마력이 없습니다. 전투에 낄 수도 없는데요."
"알아. 그러니까 지휘를 하라는 거야."
준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몸짓 하나에도 여유가 배어 있었다.
"전투는 우리가 한다. 넌 머리만 써. 네가 잘하는 거잖아, 그거."
그 말을 하면서 준혁은 자기 검집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자신은 검을 쓰고, 나는 종이나 쓰라는 뜻이었다.
웃음이 나온다. 실소였다.
결국 이런 거였구나. 특대생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준 이유.
죽으라는 소리를 예쁘게 포장한 것뿐이었다. 학원 측에서도, 이 파티에서도 나는 성적표에 적힌 숫자로만 존재했다.
"실패하면 책임은 누가 지죠?"
"당연히 지휘관이지."
대답이 너무 빨랐다. 준비된 말처럼.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짜놓은 대본처럼 흘러갔다.
주변 시선이 느껴졌다. 파티원들이 나를 힐끔거린다.
검사 지망생 하나가 검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참는 게 보였다.
동정도 조롱도 아닌, 그저 무관심한 눈빛들.
마력 없는 놈이 뭘 하겠어, 라는 표정. 딱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나는 이 파티에서 사람이 아니라 서류상의 한 줄이었다.
"6층까지는 이미 검증된 루트야."
준혁이 말을 이었다.
"거기서 이상 현상 보고가 몇 건 올라왔어. 조사만 하고 나오면 돼. 간단하지."
"간단한데 왜 굳이 저를 지휘관으로 세우십니까?"
질문에 준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웃는다. 그 웃음이 유독 매끄러웠다.
"성적표 못 봤어? 네가 전체 1위야. 이론상으로는."
이론상으로는, 이라는 말에 힘이 실렸다.
실전에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니, 실전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서류에 이름 하나 올려놓고, 그 이름이 사라져도 학원은 손해 볼 게 없다는 계산.
나는 던전 입구를 올려다봤다.
돌문 위쪽, 마법 문양 하나가 유독 어두운 빛을 뿜고 있었다.
다른 문양들은 청백색인데 저것만 짙은 자주색이다. 맥동하는 속도도 다른 문양보다 빠르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저건 뭡니까."
내가 가리키자 관리 마법사가 서류를 뒤적였다. 종이를 넘기는 손이 조금 빠르다.
"6층 게이트 반응입니다. 최근 며칠 사이 변동이 있었어요."
"어떤 변동이죠."
"그건... 저희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관리 마법사는 시선을 피하며 서류철을 다시 덮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태도였다.
모른다는 말이 목뒤를 서늘하게 만든다.
검증된 루트라던 준혁의 말과 어긋나는 대답이었다.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정작 실전의 위험 신호는 무시하려 든다.
"준혁 선배."
내가 그를 불렀다.
"진입 전에 게이트 반응 재검사를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시간 없어."
준혁이 손을 내저었다.
"오늘 안에 보고서 올려야 해. 위에서 성과 원해."
위에서. 그 한 단어에 모든 게 설명됐다.
이 임무는 처음부터 성과를 위한 것이었다. 조사가 아니라 전시용.
학원 상부는 실적을, 준혁은 그 실적에 자기 이름을 올릴 기회를, 그리고 나는 그 실적을 만들어줄 도구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전시품 옆에 세워진 책임자 명패였다. 만약 뭔가 잘못되면, 명패에 적힌 이름이 대신 욕을 먹는 구조.
파티원 중 누군가가 낮게 웃었다. 준혁의 편에 선 웃음이었다.
아무도 내 말에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당연했다. 여기서 내 편은 없다.
"들어가시죠."
결국 나는 그렇게 말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거부한다고 상황이 바뀌지도 않았고, 거부하면 오히려 무능한 지휘관이라는 낙인이 더 빨리 찍힐 뿐이었다.
차라리 안에서 뭐라도 파악하는 게 낫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계산이었다.
돌문이 열린다.
삐걱, 낡은 소리를 내며 안쪽 어둠이 드러났다.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온다. 습기와 흙냄새.
그리고 그 사이로 아주 미약하게, 뭔가 부패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그 냄새에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살아있는 것에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죽은 것, 오래 방치된 것에서 나는 냄새.
검증된 루트에서는 나지 않을 냄새였다.
"들어간다."
준혁이 앞장섰다. 나머지가 뒤를 따랐다. 발소리가 돌바닥에 부딪치며 울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등 뒤에서 돌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겁고, 확정적인 소리였다.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둠 속에서 자주색 문양의 잔상이 눈앞에 아직도 어른거렸다.
마치 무언가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불길한 잔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