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력 0, 68층의 계약

2화

던전 6층 진입 통로는 예상보다 습했다. 벽에 낀 이끼가 어렴풋한 인광을 뿜어내며 길을 밝힌다. 그 빛이 파티원들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비춘다. 다들 표정이 이상하게 그림자져 보였다. 공기가 무겁다. 숨을 쉴 때마다 습기가 목구멍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마력이 없는 나는 이런 던전 특유의 압박감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다른 애들이야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니 덜하겠지만, 나는 그냥 몸뚱이 하나로 버텨야 하니까. "윤서은, 한지아. 앞으로 나와." 준혁이 짧게 지시했다. 두 사람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윤서은. 1학년 B반 3위. 얼음의 마녀라는 별칭답게 표정에 온기가 없다. 그녀가 나를 힐끗 보고는 시선을 거뒀다. "지휘관이라니. 웃기지도 않네."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한지아가 옆에서 킥킥 웃었다. 1학년 B반 6위. 성마법사. 회복과 방어를 담당한다는데, 지금 짓는 표정은 회복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력 없는 애가 뭘 지휘한다고. 우리 죽으라고 앉혀놓은 거 아니야?" "글쎄, 죽으면 지휘관 책임이니 우리 손해는 아니지." 서은이 받아쳤다. 웃기지도 않는 계산이었다. 그리고 정확한 계산이었다. 나는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반박해봤자 저 둘의 신뢰가 갑자기 생길 리도 없고. 대신 지도를 펼쳤다. 종이 위에 그려진 통로 구조를 손끝으로 훑는다. 등급 시험 전, 자료실에서 열흘 밤을 갈아 넣어 만든 지도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노력이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만든 게 아니었으니까. "6층 통로는 세 갈래입니다." 내가 말했다. "보고서에 이상 현상이 기록된 건 동쪽 갈래예요. 습도와 마력 농도가 정상치보다 두 배 이상 높습니다." "그래서." 준혁이 팔짱을 꼈다. "동쪽은 피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조사가 목적이잖아. 이상 현상 조사." "이상 현상을 조사하는 것과 이상 현상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건 다릅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준혁의 눈빛이 흔들린다. 반박할 말을 찾는 눈치였는데, 딱히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어떻게 조사하라는 건데." 지아가 끼어들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다. "외곽에서 탐지 마법으로 원격 관측을 하고, 필요하면 소수 인원만 근접합니다." "소수 인원? 누가 갈 건데." 다들 나를 쳐다봤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 나는 웃었다. 이번엔 실소가 아니라 그냥 웃음이었다. 이 눈빛들, 익숙하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제가 갑니다. 마력이 없으니 흡수될 걱정도 없고, 마물이 저를 표적으로 삼을 이유도 적어요." 서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듯한 소리 하네. 근데 진짜 이유는 뭐야." "진짜 이유요?" "어차피 여기서 죽어도 아무도 안 슬퍼할 거잖아, 너." 말이 날카로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그 말이 틀렸다고 반박할 근거가 내게 없었다. 주변 공기가 잠깐 얼어붙는 듯했다. 준혁이 서은을 흘겨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저 말에 동의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귀찮은 걸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래도 지휘는 살아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대답하며 짐 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손수 조제한 마력 감지 포션이었다. "이거 마시면 눈동자 색이 잠깐 변합니다. 마력 밀도가 짙은 구역에서는 붉게 변해요. 위험 신호로 쓰세요." 지아가 미심쩍은 얼굴로 병을 받았다. "이거 네가 만든 거야? 마력도 없는데 포션을 만들었다고?" "조제는 재료와 배합이 핵심입니다. 마력 주입은 마지막 단계에만 필요하고, 그건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있죠." 지아가 나를 빤히 보다가 결국 병을 마셨다. 입술을 살짝 찌푸리며 삼키는 모습이 마치 독약이라도 마시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나를 못 믿는다는 뜻이겠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옅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진짜 되네." 놀란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나를 향한 경멸이 조금 걷혔다. 조금이었다. 아주 잠깐이었다. 서은도 병을 하나 더 받아 마셨다. 그녀의 눈동자 역시 금빛으로 물든다. 두 사람이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뭔가 말하려다 그만두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인정받으려고 만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준혁만 남았다. 그는 병을 받지 않았다. "저는 마력 감지 스킬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시죠."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병은 여유분이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동쪽 갈래로 접근하며 나는 탐지 결정석을 던졌다. 돌이 바닥에 닿는 순간 옅은 청록색 빛이 퍼진다. 그 빛의 파형이 이상했다. 규칙적으로 흔들려야 할 게 불규칙하게 튄다. "이거... 뭔가 있어." 서은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생물 반응인가?" "생물이라기엔 마력 흡수율이 너무 높아요." 나는 결정석 옆에 웅크려 앉았다. 빛의 파형을 손끝으로 따라가듯 훑었다. 파형은 일정한 간격으로 부풀어 오르다 다시 가라앉는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식물성 마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마력을 흡수해 자라는 종. 던전 상층부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개체예요." "상층부에서 안 나오는 게 왜 6층에 있어." 준혁이 물었다. 목소리에 처음으로 긴장이 섞였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대답하며 통로 안쪽 어둠을 바라봤다. 이끼의 인광이 그 부근에서는 유독 짙은 녹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가 숨을 쉬듯이. 지아가 슬며시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저거... 진짜 위험한 거 아니야?" 목소리에 아까와 다른 떨림이 섞여 있었다. 경계심보다는 불안이었다.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더 접근하지 말고 관측만 해야 해요." "그럼 우리 여기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거야?" "예. 지금 단계에서는 그게 최선입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저 파형, 어디서 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자료실에서 뒤진 오래된 던전 보고서 한 귀퉁이에서. 폐기된 6층 실험구역. 그 단어가 머릿속에 스쳤다. 설마, 여기가. 서은이 결정석을 하나 더 던졌다. 두 번째 돌이 바닥에 닿자, 첫 번째 빛과 겹치며 파형이 요동쳤다. 그 순간 통로 안쪽에서 낮은 진동이 울렸다. 두구. 두구.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었다.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지아가 숨을 삼켰다. "이거 지진 아니지?" "아니요." 나는 짧게 답했다. "저게 반응한 겁니다." 이끼의 녹색 빛이 순식간에 통로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빛이 벽을 타고 우리 쪽으로 뻗어오고 있었다. 준혁이 검을 뽑았다. 서은의 손끝에 서리가 맺혔다. 지아는 뒤로 물러서며 방어 마법을 준비하는 자세를 잡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력이 없으니까. 그저 저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머릿속으로 짜맞추는 것 말고는. 폐기된 실험구역. 식물성 마물. 상층부에는 없어야 할 개체. 조합이 맞아떨어지는 순간, 등줄기로 소름이 훅 끼쳤다. "전부 뒤로." 내가 낮게 말했다. "지금 당장, 뒤로 물러나요." 목소리가 떨렸던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저 어둠 속에서 뭔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끼의 빛이 점점 더 밝아진다. 그 빛 속에서, 무언가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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