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혼자였다.
숨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조용한 공동 안에, 나와 그것뿐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똑, 똑. 그 규칙적인 소리마저 지금은 신경을 긁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곧바로 나를 덮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다가오며 나를 관찰하듯 눈동자를 굴렸다.
마력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몸통을 뒤덮은 꽃잎 같은 돌기들이 미세하게 펄럭였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열리고 닫혔다. 그 안쪽에서 은은한 녹색 빛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 빛이 마력을 흡수하는 통로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정우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최상위 마물일수록 마력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이 몸 전체에 퍼져 있다고.
나는 벽에 붙어 숨을 죽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공동의 유일한 출구는 그것의 등 뒤였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뒤를 확인하고 들어왔어야지.
후회는 늘 늦게 온다.
그때, 등에 자란 꽃잎 돌기 하나가 미약하게 떨렸다.
다른 돌기들과 다른 색이었다. 나머지가 짙은 녹색인데 그것만 옅은 회색이었다.
시들었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돌기는 빛도 나지 않았고, 움직임도 다른 것들에 비해 확연히 둔했다. 마치 시든 꽃잎 하나가 나머지 꽃송이 사이에서 홀로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거대한 존재도 완전무결하지 않다는 것을.
어딘가에 균열이, 약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한 건 없다. 아무리 강해 보여도.
그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됐다. 아주 조금.
나는 최대한 조용히 자세를 낮췄다.
짐 속에서 정우가 흘리고 간, 조금 전 전투에서 떨어진 결정석 하나를 주웠다.
마력이 담긴 물건이었다. 나는 마력을 다룰 수 없지만, 이걸 어떻게 쓸지는 안다.
손끝에서 결정석의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작은 돌 하나가 지금 내 목숨줄이었다.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다. 마법 하나 못 쓰는 내가, 마력이 담긴 돌 하나에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결정석을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던졌다.
쨍그랑, 소리가 울렸다.
예상대로 그것의 시선이 소리 쪽으로 돌아갔다. 온몸의 꽃잎이 그 방향으로 열렸다.
마력을 흡수하려는 반응이었다. 소리보다는 마력 냄새를 좇는 것이다.
그 틈에 나는 반대쪽 벽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숨을 참으며, 발끝으로 바닥을 짚으며.
발밑에 부서진 돌조각이 있었다. 밟으면 소리가 날 게 분명했다. 나는 그것을 피해 옆으로 반보 이동했다. 다시 한 걸음. 또 반보.
느리게, 느리게.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그것이 결정석 쪽으로 줄기를 뻗었다. 마력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쭈욱, 쭈욱.
포만감을 느끼는 듯 몸통 전체가 옅게 빛났다.
빛이 퍼질 때마다 그림자가 벽을 타고 일렁였다. 그 그림자 속에 나도 함께 삼켜지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하지만 지금 멈추면 안 된다.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나는 그 순간을 이용해 공동 한쪽 구석, 바위 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좁았지만 몸을 숨길 수는 있었다.
바위틈 안은 축축하고 차가웠다. 등이 젖어드는 느낌이 났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었다.
밤새도록, 아니 이곳에 밤낮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틈에서 숨죽인 채 그것을 지켜봤다.
관찰이 시작이었다.
그것은 일정 시간마다 시든 회색 돌기 쪽을 스스로 건드렸다. 마치 아픈 곳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력 농도가 짙은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는 습성이 있었다.
반대로, 어떤 특정한 냄새—시큼한 냄새가 나는 방향은 피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시든 돌기를 건드리고, 몸을 웅크리고, 다시 펴는 것. 통증을 참는 듯한 그 동작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뭔가를 기록하듯 머릿속에 새겼다.
이건 습성이다. 습성이 있다는 건 예측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측이 가능하다는 건, 살아남을 방법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품속에서 마지막으로 챙겨온 작은 병을 꺼냈다.
조제 재료 중 시큼한 향이 강한 약초즙이 남아 있었다.
원래는 지혈용으로 쓰려던 것이었다.
혹시.
머릿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 없이도 움직여야 할 때였다.
나는 그 즙을 손끝에 살짝 묻히고, 바위틈 밖으로 조심스레 발라두었다.
그것이 이쪽으로 다가오다 그 냄새를 맡고는 확실히 걸음을 멈췄다.
코가 없는데도 뭔가로 감지하는 것 같았다.
효과가 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미약한 안도감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순간 어둠 저편에서 다른 소리가 들렸다.
작은 마물 무리였다. 크기는 사람만 하지만 숫자가 많았다.
번뜩이는 붉은 눈이 하나둘 늘어난다. 열, 스물.
나는 숨을 삼켰다. 눈앞이 순간 아찔해졌다. 저 숫자를, 저 붉은 눈들을 상대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것들이 거대한 존재의 시든 부위를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을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거대한 존재가 낮게 울부짖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고통스러워하는, 짐승 같은 울음.
그 소리에 공동 전체가 진동했다. 바위틈에 웅크린 내 몸까지 떨릴 정도였다. 저렇게 거대한 존재도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니. 아까 느꼈던 위로가 순식간에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두려움이었다.
이건 단순한 최상위 마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조차 위협받는 존재였다.
그럼 이 마물 무리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저 거대한 존재조차 상처 입힐 수 있는 것들이라면, 내가 여기서 무사히 나갈 방법이 있을까.
나는 바위틈에서 그 광경을 숨죽인 채 바라봤다.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 서야만 살아남는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저 무리가 이곳을 덮치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마물 무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붉은 눈들이 규칙적으로 흔들리며 움직였다. 그 걸음걸이에는 어떤 굶주림 같은 게 서려 있었다. 오랫동안 사냥감을 노려온 눈빛이었다.
거대한 존재는 시든 돌기 부위를 지키려는 듯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무리는 이미 숫자로 그 약점을 파고들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물 무리의 선두가 이빨을 드러내며 이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바위틈 안쪽까지 스며드는 그 붉은 눈빛에,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결정석을 손에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