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아카데미 정문을 지나며 나는 이미 세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첫째, 히로인 윤하은에게 절대 먼저 다가가지 않는다. 원작에서 악역 영애가 히로인에게 시비를 걸며 벌어지는 사건들은 대부분 접촉에서 시작됐다. 접촉이 없으면 갈등도 없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둘째, 사고 현장 근처에는 최대한 늦게 도착한다. 늦으면 늦은 대로 안 좋겠지만, 일찍 가서 괜히 눈에 띄는 것보다는 나았다. 존재감을 지우는 것. 그것이 내 목표였다.
셋째, 만약 사고를 목격하게 되더라도 나서지 않는다. 원작에서 그 장면의 주인공은 이현 황태자였다. 내가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남의 몫까지 챙길 여유는 없었다.
'완벽하다.'
스스로 만족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완벽한 회피형 플랜이었다. 세 가지만 지키면 됐다. 다가가지 않고, 늦게 가고, 나서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원칙만 지키면 나는 그저 조용히 학년을 마치고, 파멸 엔딩만 피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야를 가득 채운 건 아카데미 특유의 새하얀 석조 건물들이었다. 대리석 계단 위로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몰려들고 있었다. 다들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눈치 보며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원작을 알까.'
당연히 아무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원작'을 아는 건 나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이 가끔은 서글프고, 가끔은 다행스러웠다.
입학식장 근처, 신입생들이 무리 지어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녀를 발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윤하은. 설린 남작가의 딸. 옅은 갈색 머리에 순한 눈매를 가진 소녀가 낡았지만 정성스레 다린 교복을 입고,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손끝으로 옷깃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게임 속 CG보다 훨씬 앳돼 보였다. 그리고 훨씬, 사람 같았다. 화면 너머로만 보던 얼굴이 실제로 숨을 쉬고, 눈을 깜빡이고, 어색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가가지 않는다.'
스스로 정한 계획을 되새기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툭 밀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휘청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았다.
밀친 쪽은 사과 한마디 없이 가버렸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교복으로 봐선 어느 명문가 자제인 듯했다. 윤하은은 그저 작게 웃으며 옷깃을 가다듬었다. 화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저게, 저런 성격이었나.'
원작 게임에서는 대부분 텍스트로만 묘사되던 부분이었다. '히로인은 마음이 넓다' 정도의 한 줄 설명. 실제로 보니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움직였다.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아니라, 그냥─ 신경이 쓰였다.
발이 저절로 그쪽으로 반 발짝 움직였다.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그 발을 다시 원위치로 돌렸다.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다른, 훨씬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식장 안으로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뒤쪽에 섰다. 계획대로였다. 누구의 시야에도 걸리지 않을, 딱 적당한 사각지대.
식장 내부는 화려했다. 붉은 카펫이 단상까지 이어져 있었고, 벽면에는 아카데미를 상징하는 문양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좋은 볼거리였지만,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딱 하나였다.
식이 시작되고, 총장의 연설이 이어졌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붕 장식 쪽으로 향했다.
크리스탈과 금속으로 얽어 만든 커다란 샹들리에형 장식이 천장 중앙에 매달려 있었다. 원작 CG에서 본 그 모양 그대로였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게임 로딩 화면에까지 삽입됐던 그 이미지.
'저게 떨어진다.'
확신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문제는 정확한 시각을 몰랐다는 것이다. 연설 도중일 수도, 끝난 뒤일 수도 있었다. 게임에서는 그냥 '입학식날 사고가 있었다'는 회상 대화 한 줄로 처리됐을 뿐, 몇 시 몇 분에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몇 초를 남기고 알려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작 게임 시스템에 대한 원망이 잠깐 스쳤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뒷줄에서 슬며시 자리를 옮기며 신입생 무리를 훑었다. 윤하은은 앞쪽, 정확히 장식 아래 구역에 서 있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저 자리에.
계획 셋째 항목이 떠올랐다. 나서지 않는다.
'황태자가 구할 거야.'
시선을 돌려 이현을 찾았다. 반대편 상석 근처, 여유롭게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금발에 단정한 자세, 이 세계 모든 남주인공들이 공유하는 듯한 그 여유로운 표정. 아직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있었다.
'저 사람이 히로인을 구하면서 첫 호감도가 쌓이는 거였지.'
기억을 되짚었다. 맞다. 그랬다. 이 사고는 이현과 윤하은의 첫 만남 이벤트였다. 여기서 내가 끼어들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끼어들면 원작의 흐름을 어그러뜨릴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냥 가만히.'
스스로에게 되새겼다. 세 번째 원칙. 나서지 않는다. 나서지 않는다. 나서지 않는다.
그때였다.
천장에서 낮고 둔한 소리가 들렸다.
삐걱.
식장 안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소리였다. 총장의 연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신입생들은 각자의 긴장과 설렘에 빠져 있었다. 나만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았다.
샹들리에를 고정한 사슬 하나가, 서서히 뒤틀리고 있었다.
크리스탈 조각 사이로 희미한 빛이 흔들렸다.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나는 숨을 죄어 삼켰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이현 쪽을 다시 살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다.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