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흉터, 계획에 없었다

5화

그날 이후로 윤하은은 매일 찾아왔다. 손에는 늘 뭔가를 들고 있었다. 첫날은 과일 바구니, 다음 날은 직접 뜬 손수건, 그 다음 날은 서점에서 사 온 책. 하나같이 그녀의 형편에 무리가 되는 것들이었다. 설린 남작가의 사정은 나도 대략 알고 있었다. 영지 수입이라 해봐야 하급 관리 월급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절반은 빚을 갚는 데 들어간다고 들었다. 그런 집 아가씨가 매번 뭔가를 사 들고 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선 행동이었다. "이런 거 안 사도 돼." "그, 그래도……! 이거라도 안 하면 제가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말은 더듬거리면서도, 그녀는 매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그때마다 똑같이 대답했다. "안 받아도 돼." "그래도 받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면서도, 눈은 절대 피하지 않았다. 그 눈빛이 문제였다. 딱 저 정도의 눈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내가 지는 구조라는 걸 그녀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결국 세 번 정도 밀고 당기다가 받는 게 패턴이 됐다. 시녀는 이제 그녀가 오면 알아서 차를 두 잔 내왔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거리를 두라고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일러뒀는데, 주변에서는 벌써 이 방문을 당연한 일정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계획이라면, 이쯤에서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다. '거리를 둬야 한다.' 원래 세운 계획대로라면, 그녀와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다. 사고는 이미 벌어졌고, 나는 흉터를 얻는 대가로 그녀를 살렸다. 그거면 충분했다. 더 이상의 관계는 위험 요소였다. 위험 요소라는 말을 속으로 되풀이할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무슨 임무 보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감정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매일 이 방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내가 딱히 막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막을 수 있었다. 시녀에게 한마디만 하면 됐다. "다음부터는 정중히 돌려보내." 그 한 줄이면 끝날 일이었다. 나는 그 한 줄을 며칠째 미루고 있었다. '그냥, 예의상 받아주는 거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했다. 하지만 그 변명이 며칠째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뭔가 틀렸다는 신호였다. 어느 밤, 물을 마시러 나갔다가 창밖에서 이상한 인기척을 느꼈다. 시간은 자정을 넘긴 지 오래였다. 이 시각에 정원을 돌아다닐 사람은 야간 경비 외엔 없었다. 그런데 발소리가 경비의 것과는 달랐다. 무겁지 않고, 조심스러웠다. 정원 구석, 나무 그늘 아래 누군가 서 있었다. 달빛에 비친 실루엣이 낯익었다. 윤하은이었다. 그녀는 혼자, 아무도 없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어깨를 떨고 있었다. 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흐느낌을 억누르려는 듯 손으로 입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저기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낮에는 늘 웃는 얼굴로 찾아오던 그녀였다.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웃음으로 포장해서 건네던 사람이었다. 손수건을 내밀 때도, 책을 내밀 때도, 그녀의 얼굴에는 늘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 미소가 진짜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그 웃음 뒤에 저런 얼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는 다시 아무 일 없었던 척 몸을 돌려 걸어갔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마치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뭔가를 억지로 눌러 담는 사람처럼. 나는 창가에 그대로 서서,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 든 물잔이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나는 그걸 마실 생각도 못 하고 그냥 들고만 있었다. '저건, 은혜에 대한 감사가 아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죄책감이었다. 낮의 웃음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의 이면에, 그녀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무게가 쌓여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자기 때문에 남이 흉터를 얻었다는 사실을, 매일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였다면 애초에 남작 영애처럼 매일 찾아오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매번 웃으면서 왔지만, 그 웃음을 유지하기 위해 밤마다 이런 대가를 치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계획대로면, 이건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스스로 되뇌었다. 그녀가 밤마다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그녀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사고를 막았을 뿐이고, 흉터는 이미 얻을 대로 얻었다. 여기서 더 마음을 쓸 이유는 없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창문을 닫으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녀가 사라진 정원 구석을 돌아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그 자리를, 몇 번이나. 결국 나는 창가에 한참을 더 서 있다가,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에야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그녀가 입을 막고 어깨를 떨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다음 날 아침, 시녀가 조심스레 알려온 소식이 있었다. "아가씨, 설린 남작 영애께서 오늘은 오시지 않을 것 같다고,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고요."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이, 유독 마음에 걸렸다. '설마.' 어젯밤 본 그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감사와 죄책감, 그 둘 사이 어디쯤에서 그녀가 무너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계획보다 앞서 자리를 차지했다. 시녀는 내 표정을 살피며 덧붙였다. "저, 아가씨. 혹시 무슨 답을 전할까요? 남작 영애 댁에 사람을 보내는 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그냥 넘기면 그만이었다. 몸이 좋지 않다니 알겠다, 쾌차하시길 바란다, 형식적인 말 한마디로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녀는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나는 그 어색한 정적 속에서 어젯밤 정원의 그 뒷모습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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