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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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교실 뒷벽에 붙은 급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가 언제 붙였는지도 모를 저 종이 한 장이, 매일 아침 여덟시부터 밤 열시까지 우리를 노려보는 셈이었다.
야자 시간.
나는 문제집 대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탐색자 자격 예비시험 안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스크롤을 내릴 때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것만 붙으면.'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탐색자.
던전을 뒤져 마석을 캐 오는 직업.
몇 년 전만 해도 미친놈 취급을 받던 그 일이, 이제는 대학 대신 택하는 애들도 흔한 진로가 되어 있었다.
뉴스에서는 신인 탐색자들이 억대 연봉을 받았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나왔고, 인터넷에는 장비 후기며 던전 공략 영상이 넘쳐났다.
문제는 우리 학교였다.
우리 담임은 탐색자라는 단어만 나와도 얼굴이 굳었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선배 하나가 자퇴하고 탐색자 학원에 들어갔다가, 첫 던전 탐사에서 다리를 잃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뒤부터였다.
정확히는 몰랐다. 다리를 잃었다는 것도, 어느 던전이었는지도, 전부 소문으로만 떠도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소문 하나로 우리 학교 전체가 얼어붙었다.
그 후로 담임은 탐색자 얘기를 하는 애들을 대놓고 눈치 주기 시작했다. 상담실로 불려가 몇 시간씩 설교를 들은 애도 있었다.
나는 화면을 손으로 반쯤 가린 채, 곁눈질로 앞자리를 살폈다.
담임은 교탁 앞에서 졸고 있었다.
'다행이다.'
툭.
누가 내 어깨를 쳤다.
"뭘 그렇게 몰래 봐?"
김시우였다.
전교 20등 안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놈이, 야자 시간에 굳이 자기 자리를 놔두고 내 옆으로 넘어와 있었다.
의자 끄는 소리도 없이 스윽 다가온 게 더 얄미웠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화면을 급히 껐다.
액정이 꺼지는 소리도 없는데, 내 심장은 꼭 뭔가 들킨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아무것도 아닌 게 그렇게 급하게 꺼지냐."
시우가 픽 웃었다.
그 웃음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또 그거지. 탐색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신같은 놈.'
초등학교 때부터 십 년 가까이 붙어다니면 이 정도는 눈치채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라는 인간이 너무 뻔한 걸지도 몰랐다.
"도현아."
시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교실 안 다른 애들이 못 듣게, 딱 나한테만 들리는 크기로.
"난 상관없는데, 담임 귀에 들어가면 골치 아파져. 너희 어머니한테까지 연락 갈 거다."
"알아."
"아는 놈이 이렇게 티를 내고 있냐."
시우는 늘 이런 식이었다.
걱정하는 척하면서 할 말은 다 하는 놈.
공부도 잘하고,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고, 성격까지 좋아서 나는 가끔 저 자식이 얄미웠다.
지금도 그랬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그 말투가 꼭 선생님 같아서 짜증이 났다.
"범생이가 남 걱정할 시간에 자기 공부나 더 해."
나는 괜히 쏘아붙였다.
"내 걱정은 필요 없고, 네 성적이나 걱정해라. 이번 모의고사 등급 봤어?"
시우가 정색했다.
그 표정 하나로 분위기가 확 가라앉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등급표는 이미 서랍 속에 처박아 놓은 지 오래였다.
정확히는 펴 보지도 않고 그대로 구겨 넣었다.
언어, 수리, 외국어 모두 성적이 곤두박질친다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거 언제까지 도망칠 건데."
시우가 낮게 물었다.
장난기가 쏙 빠진 목소리였다.
"몰라."
나는 짧게 대답하고 다시 문제집을 펼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야자가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둘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갔다.
의자 끄는 소리, 지퍼 닫는 소리, 누군가의 하품 소리가 뒤섞였다.
시우는 학원 차가 기다린다며 먼저 나갔다.
"내일 보자."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늘 그렇듯 뒤도 안 돌아보고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아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골목을 비췄다.
마을 어귀를 지날 때마다 늘 들르는 곳이 있었다.
돌미륵상.
회색 화강암으로 깎은, 아이 키만 한 낡은 석상이었다.
동네 사람들 중 저게 뭔지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어릴 땐 다들 그냥 '돌부처'라고 불렀다.
육 년 전, 초등학생이던 나는 저 미륵상 앞에서 넘어졌다가 코가 깨진 적이 있었다.
그때 피가 철철 나서,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놀라서 나를 병원까지 업고 뛰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방치돼 갈라지고 이끼가 낀 얼굴을 보고, 그날 이후로 나는 이상하게 저 석상이 신경 쓰였다.
할아버지가 쓰던 끌과 정을 몰래 들고 나와 며칠에 걸쳐 다듬었다.
당시엔 뭘 안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저 얼굴이 너무 슬퍼 보였다.
그때는 손이 지금보다 훨씬 야무졌다.
정 끝으로 이끼를 긁어내고, 갈라진 틈을 메우고, 코와 입매를 살살 다듬던 그 감각을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은 그 손으로 뭘 깎아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공부한답시고 책상 앞에만 앉아 있었으니까.
나는 미륵상 앞에 쭈그려 앉았다.
차가운 밤바람에 손이 시렸다.
'오늘도 별일 없게 해주세요.'
습관처럼 손을 모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온 버릇이었다.
누가 보면 유치하다고 웃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작은 의식 같은 거였다.
그때였다.
스으.
석상 표면에서 희미한 온기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손끝이 저릿했다.
'뭐지.'
나는 손을 떼지 않고 그대로 표면을 더듬었다.
돌은 원래 차가운 게 정상이었다.
십 년 넘게 저 자리에 서 있던 돌이, 온기를 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내 손바닥에 닿아 있던 표면이, 사람 살갗처럼 따뜻해져 있었다.
심장이 쿵, 소리를 냈다.
등에 식은땀이 났다.
'착각이야. 손이 시려서 그런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손끝의 감각은 여전히 뜨거웠다.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저기."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분명 여자 목소리 같았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골목 저편까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만 흔들리고 있을 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목덜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날 밤엔, 그게 다였다.
나는 애써 못 들은 척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헛것 들었나 보다.'
무릎에 묻은 흙을 털며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공부한다고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헛것이 들릴 만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뒤통수가 계속 따가웠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그 느낌은, 골목을 다 빠져나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그때마다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나는 겨우 숨을 크게 내쉬었다.
'별일 아니야.'
하지만 손끝에 남은 온기는, 씻어도 씻어도 쉽게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