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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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었는데."
나는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시우는 내 얼굴과 미륵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꿰뚫어 보는 듯한, 딱 그런 눈빛이었다.
"이상하네."
시우가 중얼거렸다.
"방금 여기서 여자애 목소리 들렸는데."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손바닥에도 땀이 배었다.
'들켰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1초, 2초, 3초.
시우의 눈동자가 미륵상 주변을 훑었다.
"라디오 소리였나 보지."
나는 얼른 둘러댔다.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고 애썼다.
"이 시간에 무슨 라디오야."
시우가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라디오에서 여자애 목소리가 나온다고?"
말문이 막혔다.
'맞는 말이긴 한데.'
"요즘 라디오 그런 것도 있어."
나는 억지로 말을 이었다.
스스로 들어도 어색한 변명이었다.
시우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행히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너 요즘 자꾸 여기 오더라. 학원 안 가는 날마다."
나는 대답을 미뤘다.
'얘 진짜 감이 좋네.'
시우가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을 피해 나는 미륵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부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뭐, 상관없다만."
시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수상한 짓 하지 마라."
수상한 짓이라는 말에 뜨끔했다.
'이미 하고 있는데.'
시우가 자전거를 끌고 먼저 내려가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
다홍이 조심스럽게 미륵상 뒤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들킬 뻔했어요."
다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저 오빠 눈치 되게 빨라요."
"그니까. 너도 좀 조용히 좀 있어."
나는 한숨을 쉬며 핀잔을 줬다.
다홍이 혀를 쏙 내밀며 웃었다.
그날 이후로 며칠, 나는 학교 끝나면 바로 미륵상으로 달려갔다.
가방도 제대로 안 내려놓고 뛰어갈 때도 있었다.
다홍은 매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마석 조각들을 보여주며, 던전을 어떻게 만들지 조금씩 설명해줬다.
마석 조각은 손톱만 한 크기였는데, 빛에 비추면 안에서 옅은 청록색이 일렁였다.
"이게 씨앗이에요."
다홍이 마석 조각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말했다.
그 손은 여전히 반투명했다.
"신기하다. 이게 씨앗이라고?"
"네. 심으면 자라요. 나무처럼요."
"나무는 물이랑 햇빛 먹고 자라잖아."
"이건 사람들 마음을 먹고 자라요."
그 말이 묘하게 오싹했다.
'마음을 먹는다니.'
"여기 뒷산 폐창고 알아요?"
다홍이 말했다.
"거기 지하실이 좋아요. 아무도 안 와요."
나는 그 폐창고를 알고 있었다.
어릴 때 친구들이랑 담력 훈련 하러 갔다가 쥐 떼를 만나서 도망친 적도 있었다.
"거기다 던전을 만든다고?"
"씨앗을 심는 거예요. 마석 에너지로. 자라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시간이 얼마나?"
"몰라요. 저도 처음 해보는 거라."
말이 쉽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씨앗을 심는다는 게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건지, 삽으로 땅을 파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두면 되는 건지.
다홍도 정확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하지만 다홍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
그 눈빛을 보면 나도 왠지 믿게 됐다.
'얘가 하자는 대로 하면 되겠지.'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그 주말, 나는 학원 자습을 핑계로 이틀을 미륵상에 못 갔다.
중간고사 대비 특강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신신당부를 했던 터라 빠질 수도 없었다.
토요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국영수 특강이 이어졌다.
일요일에도 오전 내내 모의고사를 봤다.
문제를 풀면서도 자꾸 미륵상 생각이 났다.
'다홍이 괜찮을까.'
애써 그 생각을 밀어내려 했다.
'설마 이틀 가지고 무슨 일 있겠어.'
일요일 저녁, 학원이 끝나자마자 나는 가방을 멘 채로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홍을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녀의 몸이 이전보다 훨씬 흐릿했다.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윤곽선이 뭉개져 있었다.
팔다리 경계가 흐릿해서, 어디까지가 다홍이고 어디부터가 배경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였다.
"너 왜 이래?"
나는 놀라서 다가갔다.
가방을 벗어던질 새도 없었다.
"기도가... 끊겼어요."
다홍의 목소리도 잡음 섞인 라디오처럼 갈라졌다.
말 사이사이에 지지직 소리가 섞였다.
"오빠 것도, 마을 사람들 것도."
"그깟 이틀 가지고?"
나는 믿기지 않아서 되물었다.
"이틀이면 충분해요. 저는 원래 이렇게... 불안정한 존재예요."
다홍이 말끝을 흐렸다.
뭔가 더 알고 있으면서 말을 아끼는 눈치였다.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뭔데. 말해."
나는 다그쳤다.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높아졌다.
다홍은 잠깐 나를 빤히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같은 존재가... 원래 하나가 아니래요."
"무슨 소리야."
"이 마을 말고도, 다른 데도 있대요. 저보다 훨씬 오래된 거요."
소름이 돋았다.
팔에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더 오래된 거라니.'
"그게 뭔지 알아?"
나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몰라요. 저는 태어난 지 육 년밖에 안 됐잖아요. 근데 가끔... 그 존재가 저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본다고?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냥... 저 멀리서 눈이 하나 떠져서 이쪽을 쳐다보는 느낌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눈이라니.'
"언제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얼마 안 됐어요. 오빠가 학원 간 이틀 사이에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딱 맞아떨어졌다.
'기도가 끊긴 거랑 상관있는 건가.'
다홍의 몸이 다시 한번 지지직 흔들리며 흐려졌다.
이번에는 얼굴 반쪽이 아예 안 보일 정도였다.
"괜찮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다홍의 어깨를 스쳤다.
감촉이 없었다.
연기를 만지는 것 같았다.
손끝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는 그 느낌이 소름 끼쳤다.
방금까지 사람 형체였던 게 손 안에서 그냥 흩어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이러다 정말 사라지는 거 아냐.'
"기도해줘요."
다홍이 힘없이 웃었다.
그 웃음마저 반쯤 지워진 것 같았다.
"오빠 것만으로도 도움 돼요."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차가운 땅바닥의 냉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다홍아, 사라지지 마.'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사라지지 마, 사라지지 마.
간절함이 손끝까지 저릿하게 퍼졌다.
몇 분 뒤, 소녀의 윤곽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지워졌던 팔다리 경계가 다시 선명해지고, 흐릿했던 얼굴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눈을 뜨고 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다홍이 예전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도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앞으로 이틀 이상은 절대 안 빠질게."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근데 그 존재, 진짜 위험한 거야?"
다홍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무서워요. 저보다 훨씬 큰 무언가라는 것만 알아요."
이 신앙이라는 게 이렇게 위태로운 거라면, 던전을 만드는 일은 훨씬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다홍이 통째로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앞으로 학원 특강이든 뭐든 절대 이틀 이상 미륵상을 비우지 않겠다고 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했다.
그리고 그 '더 오래된 존재'라는 말이, 자꾸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마음에 남았다.
다홍조차 정체를 모르는 무언가가, 이 마을 밖 어딘가에서 눈을 뜨고 이쪽을 보고 있다는 사실.
그게 무엇인지, 왜 다홍을 보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게 더 불안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미륵상은 어둠 속에서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