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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퇴근이라는 말이 무색했다. 시계는 이미 밤 11시를 넘겼고, 사무실 창밖은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여의도의 야경이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 강민준은 정일산업 개발2팀에서 11년째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같은 책상, 같은 모니터, 같은 각도로 기울어진 의자. 입사 3년 차에 대리가 됐고, 8년째 대리였다. 승진이니 연봉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관심 밖의 일이었다. 관심이 있고 없고를 떠나, 생각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주변에서는 다들 그런 나를 두고 한마디씩 했다. "강 대리는 참 성실해." 성실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이 회사에 들어오기 전엔 몰랐다. 성실하다는 말은 결국, 시키는 대로 다 한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강 대리, 이거 오늘까지 맞춰야 해. 알지?" 조태영 팀장이 모니터 너머로 얼굴만 빼꼼 내밀며 말했다. 느긋한 말투, 눈치 없는 웃음. 마치 오늘까지 맞추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네." 나는 답했다. 그것 외에 다른 답을 해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네, 네, 네. 입버릇처럼 붙은 그 한 글자가 내 유일한 자기표현이었다. 한때는 "그건 좀 무리인데요" 같은 말도 해봤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말이라는 것도 근육처럼 쓰지 않으면 굳어버리는 걸까. 손끝이 저릿했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오른손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통증 같은 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얇은 쇠사슬이 살갗을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감각. 처음엔 그저 피로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루에 열두 시간씩 키보드를 두드리다 보면 이 정도 저림은 당연한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병원에 가볼까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요즘 이상하게 손이 저리네.' 그 생각도 오래가지 못했다. 메신저 알림이 연달아 떠올랐기 때문이다. 띠링- 띠링- 띠링- 조 팀장의 카톡이었다. [강 대리 아직 안 끝났어?] [내일 오전 미팅 전까지 부탁] [고생 많다ㅋㅋ] ㅋㅋ라는 두 글자가 유독 눈에 밟혔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걸까. 웃을 힘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답장을 뭐라고 보낼지 잠시 고민했다. '네, 알겠습니다.' '네, 밤새워서라도 맞추겠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다. 읽었다는 표시가 뜬 순간, 그것으로 답변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이 회사에서 침묵은 곧 승낙이었다. 나는 그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끝의 저릿함이 점점 심해졌다. 마치 뭔가가 피부 밑에서 꿈틀대는 것 같았다. 살짝 손을 들어 형광등 아래에서 살펴봤지만,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빨갛게 부어오르지도, 부풀지도 않은 멀쩡한 손. 그런데 왜 이렇게 낯선 느낌이 드는 걸까. 무시했다. 무시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사무실 안에는 나 말고도 두어 명이 더 남아 있었다. 옆자리 김 사원은 이어폰을 낀 채 졸다가 놀라서 다시 자료를 뒤적였고, 대각선 자리의 박 과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자리를 정리하고 나갔다. 박 과장이 나가면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 "강 대리, 먼저 갈게. 너무 무리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사람은 이미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과, 자기가 먼저 퇴근한다는 행동이 어색하게 부딪힌 채로 나를 지나쳤다. 나는 그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사할 힘조차 사실은 아깝게 느껴졌지만, 그것마저 안 하면 사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사무실을 나선 건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였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택했다. 왜였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냥, 걷고 싶었던 것 같다. 한 층, 두 층, 세 층. 걸음을 옮길수록 머릿속이 텅 비어갔다. 텅 빈다는 감각조차 익숙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학 시절엔 뭘 좋아했더라. 좋아하는 음식은. 좋아하는 색깔은. 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을 뒤져봐도 흐릿한 이미지들만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동아리방에서 누군가 기타를 치던 장면, 과제를 하다 밤새 웃었던 기억. 그 기억 속의 나는 지금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이름은 같은데, 얼굴은 같은데, 그 안에 담긴 게 완전히 바뀐 것 같은 느낌. 마지막으로 거울을 제대로 본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출근할 때 세면대 거울에 얼핏 비치는 얼굴이 있었지만, 그게 정말 내 얼굴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 생각해보면 무서운 일인데, 무섭다는 감정조차 무뎌져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가 텅 빈 건물 안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내 발소리인데도 낯설게 들렸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내 뒤를 쫓아오는 것처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당연했다. 이 시간에 이 건물 계단을 오르는 사람이 또 있을 리 없었으니까. 계단은 옥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비상문은 늘 잠겨 있어야 정상이었는데, 누군가 담배를 피우러 다녔는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밀었다. 끼익- 녹슨 경첩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차가웠다. 오랜만에 느끼는, 사무실 냉방과는 다른 진짜 바람. 살갗에 닿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갑자기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몇 년 동안 잊고 있던 계절감 같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는 옥상 난간까지 걸어갔다. 발밑으로 여의도의 불빛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예쁘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쁘다고 느낄 여유가, 지금 이 순간에야 생겼다는 게 서글펐다. 11년. 이 도시에서 11년을 살았는데, 이 야경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라니. 그동안 나는 뭘 보고 산 걸까. 모니터, 서류, 조 팀장의 얼굴, 그리고 또 모니터. 그게 내가 11년간 봐온 풍경의 전부였다. 손끝의 저릿함이 다시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마치 무언가 손을 붙잡으려는 것처럼. 나는 그 감각을 뿌리치듯 손을 뻗어 난간을 잡았다. 차가운 철제 난간의 감촉이 손바닥에 박혔다.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반가웠다. 적어도 이건, 확실하게 느껴지는 감각이었으니까. 오랫동안 무뎌져 있던 몸이 뒤늦게라도 뭔가를 느끼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증거를 확인한 순간 나는 이 삶을 놓아버리기로 했다. 올라갔다.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다. 오래 굶은 사람처럼, 아니, 오래 산 사람처럼. 난간 위에 두 발을 딛고 서자, 바람이 옷자락을 흔들었다. 발밑의 불빛들이 아득하게 멀어 보였다. 수십 층 아래, 저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사무실이 있고, 누군가의 조 팀장이 있고, 누군가의 카톡 알림이 울리고 있을 터였다. '다들 나처럼 살고 있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지금 이 순간 내게 중요한 건 없었다. '그만 쉬고 싶다.' 그 한마디가 지금 내 안에 있는 유일한 진심이었다. 다른 어떤 거창한 이유도, 유서에 쓸 만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만 쉬고 싶었다. 억울하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감정조차 없었다. 그저 지쳤다. 너무, 지쳤다. 바람이 다시 얼굴을 스쳤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차갑게 느껴졌다. 손끝의 저림이 손목까지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 몸의 감각이 이렇게까지 선명해질 수 있다는 게. 나는 발끝에 힘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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