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저게 뭐지.'
호기심이 앞섰다.
어른의 이성이라면 도망쳤을 텐데, 다섯 살 아이의 몸은 발이 먼저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분명 '가지 마'라는 경고가 울리고 있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게 뭐야, 몸이 왜 이래.'
전생의 나였다면 절대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골목 끝으로 다가가자, 세상이 조금 이상하게 뒤틀려 보였다.
마치 공기 자체가 물처럼 일렁이는 느낌.
가로등 불빛도 그 일렁임 속에서 이지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 안에서, 검은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키가 크고, 몸통이 안개처럼 흐릿한 무언가.
뿔이 길게 두 갈래로 뻗어 있었고,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그냥 흔들리는 빛 두 점이 있었다.
숨소리마저 그 존재의 움직임에 맞춰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머릿속에서 온갖 단어가 스쳤다.
괴물, 유령, 몬스터.
그중 어느 것도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확 잡아당겼다.
"야, 꼬맹아! 여기서 뭐 해!"
다급한 목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골목 벽 쪼그리듯 밀려났다.
등이 벽돌에 눌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주황빛 금발을 높게 묶은 포니테일, 스포츠형으로 재단된 갑옷 같은 복장, 등에 검이 매여 있었다.
애니메이션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마치 만화책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어깨가 가로등 불빛에 번쩍였다.
"뭐야, 애가 왜 여기 있어? 위험하다고, 여기!"
그녀는 짧게 소리쳤다.
말투가 급하고 거칠었지만, 어딘가 밝은 기운이 배어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거친 말투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눈은 계속 저 검은 형체를 향해 있었다.
한순간도 시선을 놓지 않는 그 집중력이, 프로의 눈빛이라는 걸 다섯 살짜리도 알 수 있었다.
"저, 저기···"
말이 안 나왔다.
입술이 떨렸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서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일단 도망쳐! 저건 재해마수야, 사람 못 알아본다고!"
재해마수.
낯선 단어였지만, 지금 눈앞의 상황을 설명하기엔 충분했다.
'재해마수라니, 이름부터 참 직관적이네.'
이런 순간에도 딴생각이 드는 걸 보면, 전생의 버릇이 몸에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등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이 순간 붉은빛을 뿜었다.
칼날에서 흘러나온 빛이 골목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
'뭐야, 진짜 무슨 만화 속인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는 잠깐뿐이었다.
검은 형체가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크르르르릉···"
마치 짐승과 기계가 뒤섞인 듯한 소리였다.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까지 느껴졌다.
그녀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발끝으로 땅을 박차는 소리가 탁, 하고 골목에 울렸다.
"태양의 검!"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검이 붉은 궤적을 그렸다.
퍼엉-!
검은 형체가 뒤로 튕겨 나갔다.
폭음과 함께 골목 전체가 잠깐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섭다는 감정보다 놀랍다는 감정이 먼저였다.
'이런 게 진짜 있었어?'
전생에서는 이런 존재를 그저 소설이나 영화 속 설정으로만 여겼는데.
이 세계에서는 실제로 존재하고, 실제로 사람을 해치는 무언가였다.
그 낙차가 너무 커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사이렌 비슷한 소리가 울렸다.
삐이이이이이—-!
귀를 찌르는 그 소리에 나는 저절로 몸을 움츠렸다.
골목 저편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왔다.
발소리가 골목 벽에 부딪쳐 몇 겹으로 울렸다.
손목에 이상한 문양이 새겨진 팔찌를 차고 있었고, 몇몇은 무전기 같은 것을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마법재해대책청! 민간인 접근 금지! 뒤로 물러서세요!"
그 외침이 몇 번이고 반복되며 골목 전체를 채웠다.
그중 하나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삼십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눈빛이 날카로웠다.
걸음걸이마저 절도가 있었다.
"이 애는 뭐야?"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시선이 마치 스캐너처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었다.
"···잠깐. 이 기운은."
남자가 손목의 팔찌를 내 쪽으로 가져다 댔다.
팔찌에서 붉은 불빛이 깜빡였다.
깜빡임의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이거, 반응이 있는데?"
다른 요원들이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나는 여러 명의 어른들에게 둘러싸였다.
숨을 쉴 때마다 어른들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가 벗겨졌다.
"얘 몸에서 이상 에너지가 감지됩니다."
"재해마수와 연관이 있는 거 아니야?"
"일단 격리해서 조사해야 해."
세 마디가 마치 릴레이처럼 이어졌다.
각자 한마디씩 던지고는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숨이 막혔다.
다섯 살 아이의 몸이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시선이었다.
'뭐야, 나 잡혀가는 거야?'
전생의 기억으로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경찰서 근처도 가본 적 없는 인생이었는데.
"저, 저는 그냥 지나가다가···"
말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억울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목구멍을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요원 중 하나가 내 팔을 붙잡았다.
손이 크고 차가웠다.
손가락이 팔뚝을 완전히 감싸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 순간, 아까 그 여자, 태양검사라 불리던 그녀가 끼어들었다.
숨을 헐떡이며 뛰어온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잠깐만요, 이 애는 그냥 길 잃은 애 같은데요?"
"오수정 요원, 이건 우리 관할이야. 넌 재해마수부터 처리해."
요원 중 리더처럼 보이는 남자가 딱딱하게 말했다.
말투에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오수정이라 불린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는 반박하지 않고 다시 검은 형체가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녀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애 다치게 하지 마세요."
그 한마디만 남기고, 그녀는 골목 안쪽으로 뛰어갔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적어도 이 낯선 세계에서, 나를 지나가는 애로 봐준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가,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붙잡을 수 있는 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은 요원들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몇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내 얼굴을 살피는 그 느낌은, 마치 수산시장 진열대 위에 올라간 생선 같은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야?"
리더처럼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이, 이서아요."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서아. 몇 살이야?"
"다섯··· 살요."
남자가 팔찌를 다시 확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붉은 불빛이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
"다섯 살짜리 몸에서 이 정도 반응이라니."
주변 요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무언가 불안한 기색이었다.
몇몇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몇몇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청으로 데려가서 정밀 검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저는 그냥···"
내 말은 또 끊겼다.
어른들은 내 말을 듣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자기들끼리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마치 보육원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패턴이었다.
어린애의 말은 참고만 될 뿐, 결정에 반영되지 않는다.
허망했다.
'또 이런 식이야.'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다섯 살짜리의 말은 아무런 무게를 갖지 못했다.
그게 억울하다기보다는, 그냥 익숙해서 더 서글펐다.
그런데 그 순간, 골목 저편에서 다시 그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르르르릉···!"
이번엔 훨씬 더 가까웠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그대로 느껴졌다.
요원들의 표정이 일제히 얼어붙었다.
리더처럼 보이던 남자의 손이, 나를 붙잡은 채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