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섯 달 전, 8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나는 회사 야근 다음 날, 침대에서 눈을 떴다.
몸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이불이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발끝이 이불 끝에 한참 못 미쳤다.
손을 들어보니 손가락이 짧았다.
손등에는 살이 통통하게 붙어 있었다.
손톱 크기도 반절로 줄어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다리 길이가 달랐다.
무릎을 짚고 일어서려 했지만 균형이 자꾸 흔들렸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27세 회사원 강주안이 아니라, 흰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어린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키는 130센티 남짓, 나이로 치면 열 살 정도로 보였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거울에 손을 대봤다.
차가운 유리 감촉만 그대로였다.
'이게 뭐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꿈인가.'
뺨을 두 번 때려봤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몸은 그대로였다.
셋째 날에는 옷장 안의 회사 셔츠들을 꺼내 몸에 대봤다.
소매가 무릎까지 내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저... 강주안인데요." 겨우 그 말만 뱉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끊었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누구세요?" 라고 세 번을 물었다.
내 목소리로는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자 통장 잔고가 47만 원까지 줄었다.
월세는 밀려 있었고, 집주인은 문자로 독촉을 보냈다.
문자 마지막 줄에는 "다음 주까지 안 들어오면 짐 뺍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짐을 챙겨 원룸에서 나왔다.
3평짜리 방이었지만, 그마저도 더는 지킬 수 없었다.
캐리어 하나에 옷가지와 노트북만 담았다.
갈 곳이 없었다.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강남역 지하도 앞에서 던전 게이트를 보게 됐다.
입구에 붙은 전광판에 '탐험가 모집, 초보자 환영'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전광판 아래에는 최하급 몬스터 보상금 표가 작게 붙어 있었다.
'저거라도 해봐야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더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등록 부스에서 신체 정보를 스캔하자, 처음으로 클래스 판정이 나왔다.
아사신.
은신과 일격 특화.
그리고 특수 스킬 하나가 함께 표시됐다.
배릿마크.
표적의 약점을 붉은 표식으로 드러내는 능력이었다.
화면에 뜬 설명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이런 능력이 나한테 있을 줄은 몰랐다.
등록 담당자는 어린 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보호자 없이는 등록이 어려운데..." 담당자가 말했다.
담당자의 손끝이 서류 위에서 멈춰 있었다.
나는 서류에 가짜 나이를 적었다.
다행히 아무도 크게 확인하지 않았다.
그 시기엔 게이트가 갑자기 늘어나 등록 인원 확인이 허술했다.
첫 사냥은 최하급 슬라임 한 마리였다.
무기가 없어서 손으로 돌을 던졌다.
세 번을 던져서야 겨우 잡았다.
손바닥이 돌에 긁혀 피가 났다.
그날 받은 보상금은 3,200원이었다.
나는 그 돈으로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를 샀다.
참치마요 맛이었다.
반은 그날 먹고 반은 다음 날 아침으로 남겼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한 달쯤 지나자 겨우 성진정밀 SP-9을 샀다.
중고 리퍼브였고, 23만 원이었다.
돈을 모으려고 사흘을 굶었다.
단검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 손잡이가 손바닥보다 커서 자꾸 미끄러졌다.
방송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후원 몇 천 원이라도 들어오면 밥은 먹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채널을 만들었다.
채널명은 '에이'였다.
원래 내 이름 강주안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이었다.
첫 방송에는 시청자가 0명이었다.
화면 구석 시청자 수 표시가 계속 0으로 고정돼 있는 걸 한 시간 넘게 지켜봤다.
두 번째 방송에는 1명이 들어왔다가 3분 만에 나갔다.
그 3분 동안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카메라만 쳐다봤다.
그렇게 다섯 달이 지나 구독자가 8명이 됐다.
돈은 여전히 부족했다.
월세방 대신 던전 근처 고시원에서 살았다.
한 달에 28만 원이었다.
방에는 창문이 없었고, 벽에는 곰팡이 얼룩이 손바닥만큼 퍼져 있었다.
밥은 하루에 한 끼, 많아야 두 끼였다.
편의점 유통기한 임박 코너를 매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다.
외로움은 배고픔보다 더 오래 남았다.
어른의 정신으로 아이의 몸에 갇혀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그저 흰머리를 한 아이로만 봤다.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말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던전에 들어가고, 강몬을 잡고, 방송을 하고, 다시 던전에 들어가는 일을 반복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방법이었다.
그날 밤, 나는 고시원 방 안에서 노트북 화면을 켰다.
방바닥에 등을 붙이고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렸다.
채널 구독자 수가 9명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처음엔 잘못 본 줄 알고 화면을 다시 새로고침 했다.
숫자는 그대로 9였다.
새로 구독한 계정 이름은 '리아공식'이었다.
나는 그 이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손끝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설마 진짜 그 리아인가.'
심장이 갑자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리아라면, 왜 여기까지 왔지.'
그 순간, 알림창이 하나 더 떴다.
같은 계정에서 방금 올라온 댓글이었다.
"에이야, 나 너 찾을 거야."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손이 떨려서 마우스를 놓쳤다.
방 안의 형광등 소리만 웅웅거리며 울렸다.
누군가 정말로 나를 알아본 걸까.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