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월요일 오전 9시 3분.
한빛시스템 3층 전산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는 자리에 내 자리가 있었다. 10년째 같은 자리, 같은 의자, 같은 각도로 기울어진 모니터 받침대였다. 입사 첫날 선배가 웃으며 알려준 팁이라고는 딱 하나, 이 의자 등받이 각도를 105도로 맞추면 허리가 덜 아프다는 것뿐이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105도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성장이라고는 없는 인생이었다.
책상 위에는 늘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다 마른 볼펜 세 개, 유통기한이 지난 지 6개월 된 자양강장제 한 병, 그리고 회사 로고가 반쯤 벗겨진 텀블러. 매일 아침 나는 그 텀블러에 커피를 채우고, 컴퓨터를 부팅하고, 어제와 똑같은 로그창을 열었다. 마치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배턴을 넘겨주는 계주 경기 같았는데, 문제는 이 계주가 10년째 같은 트랙을 돌고 있다는 점이었다.
프로젝트명은 '데스마치'였다.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는 이름인데, 신기하게도 딱 맞아서 아무도 바꾸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20년 된 레거시 전산 시스템을 유지보수하며, 매년 예산 삭감과 함께 인력은 줄고 업무는 늘어나는 마법 같은 구조 속에서, 나는 매달 같은 로그를 확인하고 같은 패치를 올리고 같은 장애를 복구했다. 창의성이 필요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버그가 나기 전에 버그를 막고, 버그가 나면 조용히 고치는 일. 존재 자체가 이미 버그 같은 일이었다.
동기들은 다 떠났다. 첫해에 셋, 둘째 해에 다섯, 셋째 해에는 팀 전체가 물갈이되다시피 했는데, 유독 나만 남아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갈 데가 없었다. 이 바닥에서 20년 된 코볼(COBOL) 코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멸종 위기종에 가까웠고, 나는 그 멸종 위기종 중에서도 가장 순종적인 개체였다.
"강도윤 씨." 팀장이 파티션 너머로 얼굴을 내밀며 불렀다. 목소리에는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이번 달 서버실 정리 건, 자네가 맡아."
"저번 달에도 제가 했는데요." 나는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했다. 정말 최소한이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제일 잘 알잖아." 팀장은 마치 세상 진리를 말하듯 자신 있게 대답했다.
논리라고는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반항이 무의미하다는 걸 10년 동안 배운 몸이었다. 근속 10년이면 뭐라도 남아야 하는데, 남은 건 순응과 요통뿐이었다.
"오늘 오전 중으로 부탁해. 오후에 감사팀이 그쪽 지나간대." 팀장이 덧붙였다.
감사팀이 지나간다는 말에 나는 마스크와 목장갑을 챙겼다. 감사라는 단어는 이 회사에서 유일하게 사람들을 빠르게 움직이게 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지하 2층 구 전산실은 회사가 신사옥으로 이전하며 방치된 공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눅눅한 냉기와 오래된 전자기기 특유의 탄내 섞인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형광등은 절반이 꺼져 있어서 복도는 마치 폐업한 극장 뒤편처럼 어두웠다. 폐기 대상 서버 랙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줄지어 서 있었고, 케이블 뭉치들은 마치 죽은 뱀들처럼 바닥에 엉켜 있었다. 손전등을 비추면 여기저기 얽힌 케이블 사이로 죽은 벌레들의 잔해까지 보였다.
나는 마스크를 쓰고 목록을 하나씩 체크하며 폐기함에 옮겨 담았다. 하드디스크 열두 개, 파워서플라이 다섯 개, 케이블 뭉치 정체를 알 수 없는 양.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 딱 내 인생의 축소판이었다. 체크리스트에 볼펜으로 선을 그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이 짓을 마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끝난다는 계산이었다.
그 랙들 사이, 구석 선반 위에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른 서버 랙들과는 명백히 다른 위치였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눈에 잘 안 띄는 자리에 숨겨놓은 것처럼, 선반 맨 뒤쪽 그늘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회사 자산 목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었다. 나는 목록을 다시 확인했다. A동 3-7랙, B동 4-2랙, 전부 일치했지만 나무 상자는 어디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10년 동안 이 회사의 온갖 잡동사니를 다뤄본 나였지만, 이런 물건은 처음이었다.
먼지를 걷어내자 상자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는 게 보였는데, 한글도 영어도 아닌, 뭔가 기하학적인 기호였다. 삼각형과 원이 뒤엉킨 듯한 문양이 상자 테두리를 따라 빙 둘러 새겨져 있었다. 손전등 불빛을 비추자 문양의 홈 안쪽에서 미세하게 반사되는 빛이 보였는데, 마치 그 안에 아주 작은 광물 알갱이가 박혀 있는 것 같았다.
안을 열자 검은 큐브 하나가 들어 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표면은 매끈한 흑요석 같았고, 만졌을 때 이상하게 따뜻했다. 지하실 온도는 분명 서늘했는데, 큐브만은 마치 방금 전까지 누군가 손에 쥐고 있었던 것처럼 온기를 품고 있었다.
"이게 뭐야, 씨발." 나는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회사 자산이면 목록에 있어야 했고, 개인 소지품이면 이름이 있어야 했는데, 이 큐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검고, 따뜻하고, 조용한 물건이었다. 뒤집어 봐도, 흔들어 봐도, 아무 표시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이상했다. 매끈한데 미끄럽지 않았고, 딱딱한데 어딘가 살짝 눌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몇 번이나 큐브를 뒤집어보며 이게 정말 물건인지, 아니면 내가 며칠 밤 야근으로 헛것을 보고 있는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폐기함에 던져 넣었어야 정상이다. 규정상 출처 불명 물건은 즉시 총무팀에 보고해야 했으니까. 신고서 양식까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3층 총무팀 김주임한테 가서 "출처 불명 물품 발견 보고서"라는 이름도 우스꽝스러운 서류를 작성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랄까, 혹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내 안에서 꿈틀거린 호기심이랄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큐브를 가방에 슬쩍 집어넣었다. 심장이 순간적으로 빨라졌고,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인생 최초의 일탈이었다.
"강도윤 씨, 뭐 찾았어요?" 등 뒤에서 박지훈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와 같은 데스마치 프로젝트에 10년째 발목 잡힌 동료였다. 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꼈다.
"아니요, 그냥 폐기물이요."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갈라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지만, 다행히 박지훈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여기 진짜 뭐 나올 것 같은 분위기 아니에요? 무슨 폐가처럼." 박지훈이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예전에 여기서 야근하다가 뭐 봤다는 사람도 있었잖아요."
"괴담은 됐고, 목록이나 마무리해요."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박지훈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목록으로 돌아갔다. 다행이었다. 만약 그가 몇 초만 더 내 가방 쪽을 쳐다봤다면, 지퍼 사이로 삐죽 나온 나무 상자 조각을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남은 목록을 체크하는 내내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라면 스무 개쯤 되는 항목을 후딱 끝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시간이 더 걸렸다. 가방 안의 큐브가 자꾸 신경을 잡아끄는 느낌이었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가방 속 큐브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만졌을 때의 그 온기가 자꾸 손끝에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에 밀려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내내, 나는 곁눈질로 몇 번이나 가방을 흘겨봤다. 마치 그 안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근거 없는 불안감이었다.
지하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어두운 터널 벽면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별거 아닐까? 그냥 회사 누군가가 실험용으로 만든 이상한 3D 프린팅 장식품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예전 연구팀이 폐기하다 만 시제품일 수도 있었고. 이유는 백만 가지쯤 갖다 붙일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 원룸 책상 위에 큐브를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큐브의 표면은 마치 우주의 밤하늘처럼 깊고 검게 빛났다. 뭔가 별거 아닐 확률이 99퍼센트였다. 그냥 회사 누군가가 만든 이상한 장식품이거나, 오래된 실험 폐기물일 확률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남은 1퍼센트가 자꾸 신경을 긁었다.
나는 회사 생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특별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승진도, 사고도, 로맨스도, 심지어 로또 5등도 없었다. 완벽하게 평평한 인생 그래프였다. 매달 월급이 들어오고, 매달 카드값이 빠져나가고, 그 사이 간격은 늘 똑같았다. 등락 없는 인생, 파동 없는 그래프.
그런데 이 검은 큐브는, 왜인지 그 평평한 그래프에 처음으로 각도를 만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다시 한번 큐브를 만졌다. 여전히 따뜻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조금 더 뜨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기분 탓이겠지.
나는 그렇게 되뇌며 큐브를 책상 한쪽에 밀어두고 씻으러 들어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와서도, 자려고 불을 끄는 순간에도, 어둠 속에서 큐브가 아주 희미하게, 정말 눈에 보일까 말까 한 정도로 빛나고 있다는 걸 나는 분명히 보았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검은 큐브 하나가, 앞으로 내 인생을 완전히 다른 궤도로 던져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밤, 내가 눈을 감은 사이 책상 위의 큐브 표면에서 기하학적 문양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