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야근왕의 이계 공장 제국

3화

수요일 오전 7시 48분.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람은 울렸는데 내가 무의식적으로 스누즈를 다섯 번이나 눌러버린 게 문제였다. 첫 번째 알람에서 눈을 반쯤 뜨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더듬었고, 두 번째 알람에서는 이불 속으로 완전히 파고들었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알람은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인간의 무의식이란 참으로 무섭다.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이미 7시 48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9시 정시 출근인 나에게 남은 시간은 딱 한 시간 12분이었다. 지하철로 40분, 준비하는 데 최소 20분이 필요한 상황에서, 여유는 아예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이너스였다. 침대에서 튕겨져 나오듯 일어나 화장실로 뛰어갔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칫솔을 입에 문 채 옷장을 뒤졌다. 다행히 다림질된 셔츠 하나가 걸려 있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허둥지둥 셔츠를 걸치다가 소매에 팔이 걸려 몸이 휘청였고, 그 바람에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커피잔을 팔꿈치로 쳐서 쏟아버렸다. 커피잔은 텅, 소리를 내며 옆으로 넘어졌고, 검은 액체가 책상 위로 퍼져나갔다. 하필이면, 정확히 책상 위, 어제 던져놓았던 그 검은 큐브 위로. "아, 씨발, 진짜!!"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티슈를 뽑았다. 한 장, 두 장, 세 장. 손이 급한 만큼 티슈는 자꾸 뭉텅이로 뽑혔고, 그럴수록 시간은 더 잡아먹혔다. 커피가 노트북 쪽으로 흘러갈까 봐 정신없이 닦아내는데, 손끝에 뭔가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미끈거리는 커피 사이로, 표면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느낌. 그 순간 큐브 표면에서 파란빛이 번쩍였다. 손이 멈췄다. 큐브 전체가 은은한 파란색으로 물들며 빛을 뿜기 시작했고,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이 스멀스멀 움직이며 재배열되었다. 나는 티슈를 든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이게 뭐지. 이게 대체 뭐지. 어제까지만 해도 그냥 서버실에서 주워온 이상한 장식품이었는데. 큐브 위쪽 공중에 얇은 사각형의 빛이 펼쳐지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화면처럼 확장되었다. 마치 홀로그램 모니터가 눈앞에 떠오른 것 같았는데, 그 화면에는 낯선 문자와 함께 어떤 지형이 표시되어 있었다. 황량한 붉은 대지, 그 위로 떠 있는 낯선 형태의 자원 아이콘들, 그리고 화면 상단에 작게 떠 있는 텍스트. [라온성 원격 연결 - 관리자 인증 대기 중] 나는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바라봤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게임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하고, 뭔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는데, 화면 하단에 익숙한 UI 형태의 버튼이 떠올랐다. [확인] 이라는, 지구의 한글로 쓰인 버튼이었다. 출근 시간은 이미 8시 10분을 지나고 있었다. 지금 이 화면에 정신이 팔려 있으면 지각은 확정이었다. 팀장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오전 회의, 잔소리, 그리고 인사팀에서 날아올 지각 경위서 양식까지.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출근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건 10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친, 평평한 그래프에 새겨진 각도였다. 인생 그래프가 완전히 직선으로 죽어 있던 나에게, 이건 뭐가 됐든 변화였다. 손을 뻗어 [확인]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확 넓어지며, 눈앞에 거대한 대시보드가 펼쳐졌다. 자원 목록, 지형 지도, 건설 가능한 시설 아이콘들, 그리고 우측 상단에 떠 있는 캐릭터 아이콘 하나. 화면 왼쪽에는 광물 자원의 수량이 숫자로 표시되어 있었고, 중앙에는 붉은 대지 위에 점점이 박힌 건물 후보지들이 반짝였다. 이건 완벽하게 게임 시스템이었다. 이세계 행성이라니, 자동화 산업이라니, 이런 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했는데, 화면은 그런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 반짝거렸다. 마치 빨리 결정하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시계를 봤다. 8시 17분. 이제는 진짜 뛰어야 했다. 나는 화면을 손으로 휘저어봤는데, 다행히도 화면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얌전히 떠 있었다. 큐브를 만지자 화면이 조그맣게 축소되며 큐브 속으로 접혀 들어갔다. 됐다. 나중에 다시 열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남은 티슈로 커피 자국을 대충 닦고, 셔츠 단추를 세 개나 잘못 채운 채로 현관을 뛰쳐나갔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려가며 나는 조금 전 상황을 되짚어봤다. 어제는 간절하게 원했는데도 반응이 없었고,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지각 위기 속에서 정신없이 허둥대다가 커피를 쏟은 그 순간에 반응이 왔다. 우연일까. 아니면 뭔가 조건이 있는 걸까. 정말 우연일까?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나는 스마트폰으로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커피를 쏟았다. 짜증이 폭발했다. 그 순간 큐브가 반응했다. 나쁜 일이 생긴 직후에 큐브가 열렸다는 공통점이 두 번의 사례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첫날 서버실에서 큐브를 발견한 것도, 사실 팀장이 부당하게 업무를 떠넘긴 짜증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날 나는 야근이 확정된 상태로 서버실에 처박혀 케이블을 정리하다가, 먼지 쌓인 선반 구석에서 그 검은 큐브를 발견했었다. 그리고 지금, 커피를 쏟고 지각 위기에 몰린 순간. 설마. 나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채 실소를 흘렸다. 재수 없는 순간에만 반응하는 물건이라니, 이보다 더 어울리는 소유주가 어디 있겠나 싶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재수 없음의 결정체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입사 시험은 세 번 떨어졌다가 네 번째에 겨우 붙었고, 첫 소개팅은 상대가 화장실에서 도망갔고, 로또는 6개월 연속으로 한 자리씩 빗나갔다. 심지어 편의점 삼각김밥 하나를 사도 유통기한이 지난 걸 고르는 재주가 있었고, 우산 없는 날에는 반드시 비가 왔고, 우산을 챙긴 날에는 하루 종일 쨍쨍했다. 불운은 성실함을 배신했다. 그런데 만약 그 불운이, 이 큐브를 여는 열쇠라면.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 나갔다. 나는 인파에 밀려 겨우 몸을 빼내며 계단을 뛰어올랐다. 회사 정문이 보이는 순간 손목시계는 8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뛰었다. 진짜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세 층이나 뛰어올랐고, 사무실 문을 밀어젖혔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강도윤 씨." 팀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시계는 9시 3분이었다. 3분. 딱 3분 늦었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지각 경위서를 쓰면서도, 나는 속으로 계속 웃음이 났다. 옆자리 동기가 슬쩍 다가와 "야, 무슨 좋은 일 있냐, 얼굴이 왜 그래" 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팀장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잔소리도 이날만큼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강도윤 씨, 요즘 정신이 딴 데 가 있나?" 팀장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팀장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더 쏟아냈다. 지각 세 번이면 인사고과에 반영된다는 둥, 요즘 젊은 애들은 기강이 없다는 둥, 늘 듣던 레퍼토리였다. 나는 고개를 조아리며 네네, 죄송합니다를 반복했지만 머릿속에는 오직 그 붉은 대지의 잔상만이 맴돌고 있었다. 자원 아이콘, 건설 후보지, 그리고 화면 구석에 떠 있던 캐릭터 아이콘 하나까지. 나는 아직 그 화면 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오늘부터, 재수 없는 하루가 더는 온전히 불행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사실. 퇴근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나는 하루 종일 손끝이 간지러웠다. 모니터 앞에 앉아 결재 문서를 처리하는 동안에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그 화면을 그렸다. 붉은 대지, 자원 아이콘, 그리고 [관리자 인증 대기 중]이라는 문구. 인증이 대기 중이라면, 완료되면 뭐가 열리는 걸까. 나는 그날 오후 내내, 다시 한번 그 큐브가 반응하길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뭔가 재수 없는 일이 또 벌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는데, 웃긴 건 그날 오후에도 어김없이 프린터가 종이를 씹었고, 커피머신이 고장 났고, 엘리베이터가 하필 내가 탈 때만 멈춰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불행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그 불행이 조금 덜 서럽게 느껴졌을 뿐. 나는 아직 몰랐다. 그 검은 큐브가 열어줄 문 너머에, 나의 남은 인생을 통째로 뒤바꿔놓을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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