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로부터 사흘 뒤, 토요일 오전 10시.
나는 회사에 휴가를 냈다. 정확히는 반차만 쓰려다가, 큐브 화면 앞에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 없어서 결국 연차를 통째로 긁어썼다. 10년째 야근에 시달리던 내가 멀쩍이 놀 수 있는 토요일을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화면만 들여다보는 데 써버릴 줄은, 나도 몰랐다.
소규모 채굴기 한 대로 시작한 실험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확장됐다. 아리의 설명에 따르면 채굴된 철광석을 다시 제련 시설에 투입하고, 그 제련된 자재로 새로운 설비를 짓는 순환 구조가 이미 라온성 시스템 안에 내장되어 있었다. 나는 그저 몇 번의 클릭으로 그 순환을 켜기만 하면 됐다.
[제련소 1호기 가동 완료. 정제 철 12단위 생산.]
화면에 알림이 떴다. 나는 그 정제 철로 다시 조립 설비 하나를 짓도록 명령했다. 손가락 하나로 건물이 세워지고, 세워진 건물이 다시 자원을 뱉어내고, 그 자원으로 또 다른 건물을 짓는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예전에 즐겨했던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과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다른 점은 이게 실제로 존재하는 행성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뿐이었다.
"아리, 이거 화면 말고 실제로 볼 수도 있어?"
나는 반쯤 장난으로 물었다.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그냥 그래픽으로 대충 흉내 낸 뭔가가 뜨겠지, 하는 심산이었는데.
[관리자님께서 원하신다면 라온성 현지에 원격 관측 카메라 시점을 연결해드릴 수 있습니다.]
화면 한쪽에 작은 창이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제 영상 같은 화면이 떠올랐다.
붉은 대지. 뿌옇게 낀 대기. 그 위로 세워진 회색 채굴기와 제련소 건물들. 지평선 너머로는 검붉은 산맥이 흐릿하게 보였다.
소름이 돋았다. 팔뚝에 돋은 닭살이 가라앉지 않았다. 실감이 나면서도 여전히 비현실적이었다. 이게 게임 화면이 아니라 실제 좌표를 가진 어떤 행성이라니. 나는 한참을 그 영상만 바라봤다. 화면 속 하늘은 지구의 하늘과는 다른 채도로 붉었고,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 하나까지도 픽셀 같지 않게 생생했다.
이거 진짜냐, 진짜.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되물었지만 답은 늘 같았다. 진짜였다.
이틀 뒤, 월요일 오후.
채굴기는 3대로, 제련소는 2기로 늘어났고, 자원 현황판의 숫자들은 매일 눈에 띄게 불어나고 있었다. 나는 회사 일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화장실이나 계단 구석에서 몰래 큐브를 켜서 상태를 확인했다. 회의 중에도 손이 근질거려서 다리 밑으로 몰래 화면을 켜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박지훈 선배가 그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강도윤 씨, 요즘 뭐 좋은 일 있어요? 얼굴이 좀 밝아졌는데."
박지훈이 커피를 타며 물었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는 손이 습관처럼 익숙했다. 10년 차 데스마치 동료답게, 표정에는 여전히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아뇨, 그냥... 뭐 좀 새로운 취미가 생겨서요."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취미라는 말이 이렇게 부족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행성 하나를 굴리는 걸 취미라고 부를 수 있나.
"뭔데요? 나도 좀 알려줘요, 요즘 힐링거리가 필요해서."
박지훈이 커피잔을 든 채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순간 등이 뻣뻣해졌다. 언젠가 이 사람에게도 이 비밀을 말해야 할 날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게임이요."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박지훈은 더 캐묻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나는 소규모 실험을 넘어 본격적인 확장을 결정했다. 아리에게 대규모 자동화 공장 건설이 가능한지 물었다.
[가능합니다. 다만 대규모 공장은 초기 자원 투입량이 크며, 가동 시 배출되는 소음과 배기가스 수준이 소규모 설비 대비 약 40배 증가합니다.]
나는 그 경고를 잠깐 읽었다. 소음, 배기가스, 40배.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바로 아래, 숫자로 표시된 예상 생산량에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기 때문이다.
자원 예상 생산량 항목에 찍힌 숫자는 하루 정제 철 400단위. 그것을 지구 시세로 환산하면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가치였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그냥 숫자만 봐도 심장이 뛰었다.
"짓자."
나는 짧게 명령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화면 속 붉은 대지 한복판에 거대한 공장 아이콘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건설 진행률이 0퍼센트에서 시작해 서서히 올라갔다.
3퍼센트, 11퍼센트, 27퍼센트, 55퍼센트...
나는 그 숫자가 올라가는 걸 지켜보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 심장이 그 숫자를 따라 같이 뛰는 것 같았다. 이건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산업 제국이 내 손끝에서 태어나고 있었다.
79퍼센트, 88퍼센트, 95퍼센트...
나는 숨을 참았다.
건설 완료율 100퍼센트가 뜨는 순간, 카메라 시점 화면 속에서 거대한 공장 굴뚝이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했다. 지축을 흔드는 듯한 낮은 진동음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나는 몸을 움찔했다. 마치 방 안까지 진동이 전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원 현황판의 숫자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치솟기 시작했다.
정제 철 400, 800, 1,600, 3,200...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미친, 이거 진짜 미쳤다."
10년 동안 남의 회사에서 남의 시스템 유지보수만 하던 내가, 야근 수당도 제대로 못 받고 상사 눈치만 보던 내가, 이제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나만의 산업을 일으키고 있었다. 지구에서 벌어들이는 월급 300만 원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규모의 자산이 실시간으로 쌓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의 억울함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야근에 지친 몸, 상사한테 쪼그라든 자존심, 통장 잔고 볼 때마다 한숨 나오던 순간들이 이 숫자 앞에서는 다 별것 아닌 게 됐다.
[관리자님, 축하드립니다. 초기 산업 시설 확장이 성공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아리의 목소리에도 미묘한 만족감이 섞여 있는 듯했다. 나는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화면만 바라보며 실실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 세상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화면 한쪽 구석에서 작은 경고 아이콘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그게 그냥 시스템 알림인 줄 알고 무시했다. 웃음기 가득한 얼굴 그대로 화면을 넘기려다가, 아이콘 옆에 뜬 텍스트를 확인하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경고: 생체 신호 감지. 대형 개체 다수, 공장 인근 3킬로미터 반경으로 접근 중.]
웃음이 뚝 멈췄다.
카메라 시점 화면 속, 검붉은 산맥 방향의 지평선 위로 뭔가 거대하고 어두운 형체들의 움직임이 희미하게 잡혔다. 그것들은 하나가 아니었다. 둘, 셋, 아니 그보다 훨씬 많았다. 산맥의 능선을 따라 검은 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아리, 저게 뭐야?"
나는 목소리가 떨리는 걸 느끼며 물었다. 손에 든 큐브를 쥐는 힘이 저절로 세졌다.
아리는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토착 생물, 바이터로 추정됩니다. 공장 가동 이후 감지된 진동과 배기 신호에 반응하여 이동 중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바이터.
이름부터가 이상했다. 순간 목 안이 바짝 말랐다. 화면 속 검은 형체들은 산맥 능선을 따라 천천히, 하지만 명확하게 공장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움직임은 결코 우연이나 방향 착오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산업 제국이라는 게, 방금까지 그렇게 뿌듯했던 그 굴뚝이, 이제는 뭔가를 부르는 등대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