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수요일 밤 11시 20분.
퇴근 후 집에 돌아온 나는 저녁도 거른 채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았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힌 건 오직 그 큐브 하나였다. 팀장이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지, 옆자리 김 대리가 무슨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는지, 그런 것들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의 중에도, 점심을 먹으면서도,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상무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조차 내 머릿속엔 그 파란빛만 맴돌았다.
큐브는 아침에 열렸던 그 화면 그대로,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았던 자세인데도 여전히 은은한 파란빛을 뿜고 있었다. 저게 진짜 켜져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미쳐서 헛것을 보는 건가. 나는 몇 번이나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봤다. 여전히 파란빛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큐브를 만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면이 다시 확장되며 대시보드가 펼쳐졌다.
[관리자 인증 완료. 안녕하십니까, 신규 관리자님.]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스피커도 없는 공간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소름이 돋은 채로 주변을 둘러봤다. 책상 밑, 침대 옆, 창문 너머까지 눈을 굴렸지만 사람의 형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목소리의 출처는 명백히 큐브였다.
"누구야, 씨발, 놀랐잖아."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저는 아리입니다. 우수 큐브에 탑재된 내비게이션 인공지능이며, 관리자님의 라온성 산업 시스템 운영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사무적이었는데, 묘하게 사람 냄새가 나는 어조였다. 마치 콜센터 상담원이 밤새 이 대답만 연습한 것 같은, 그런 매끈함이었다.
"라온성이라니, 그게 뭔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라온성은 지구로부터 좌표상 특정할 수 없는 거리에 위치한 독립 행성으로, 현재 관리자님께 소유권이 귀속된 미개척 산업 구역입니다. 큐브를 통해 원격으로 접속하여 자동화 설비를 구축하고 자원을 채굴, 생산, 축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세계라니, 산업 시스템이라니, 이건 회사 야근 스트레스로 인한 환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니면 누가 몰래카메라를 찍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스쳤다. 나는 방 안 구석구석을 다시 훑어봤다. 몰래카메라 렌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이거 실제야? 나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 "관리자님의 신경계 상태를 확인한 결과, 정상적인 각성 상태입니다." 아리가 대답했다. 뭔가 놀라울 정도로 명료한 대답이었다.
"신경계 상태를 어떻게 확인해?" 나는 되물었다. [큐브는 관리자님의 생체 신호를 실시간으로 감지하고 있습니다. 심박수, 뇌파, 피부 전도율 등을 포함합니다.] "……씨발, 그럼 지금 내 알람 시계까지 다 보고 있단 거야?"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감시인지 서비스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큐브가 왜 어제는 반응하지 않고 오늘 아침 갑자기 열렸는지 물었다. "어제는 간절하게 원했는데도 아무 반응 없었거든. 오늘 아침엔 커피 쏟고 지각할까 봐 짜증 낸 순간에 열렸어. 이거 우연이야?"
[정확한 관찰입니다.] 아리의 목소리에 잠깐의 정지가 섞였다. [우수 큐브는 관리자님의 특정 심리적 파장, 정확히는 부정적 상태 변화의 급격한 증폭 시점에 활성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관리자님의 고유 특성으로 추정됩니다.]
"고유 특성이라니?" 나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내가 재수가 없어서 그렇다는 거야?" [정확히는, 관리자님의 신체와 정신에 축적된 특정 에너지 패턴이 큐브의 활성 조건과 공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통계적으로 관리자님의 불운 발생 빈도는 일반적인 평균치를 크게 상회합니다.]
"평균치를 얼마나 상회하는데?"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측정 가능한 범위 내에서, 관리자님의 불운 발생 빈도는 상위 0.03% 이내입니다.] "0.03%? 그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매우 이례적인 수치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딱히 기쁘지 않았다. 30년 인생을 상위 0.03%짜리 불행으로 채웠다는 게 자랑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재수 없는 게 능력이라는 거야?" [정확한 표현입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30년 넘게 나를 괴롭혀온 그 지긋지긋한 불운이, 알고 보니 어떤 시스템을 여는 열쇠였다니.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묘하게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로또에 떨어질 때마다, 버스를 눈앞에서 놓칠 때마다, 소개팅 상대가 도망갈 때마다 쌓인 그 모든 억울함이, 이제야 뭔가 쓸 곳을 찾은 느낌이었다.
초등학교 때 준비물을 두고 온 날 하필 담임이 걸린 것도, 대학 시절 조별 과제에서 늘 무임승차범을 만난 것도, 첫 직장에서 회식 자리마다 국물이 셔츠에 튀던 것도. 하나하나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이 이제 와서는 전부 이 순간을 위한 밑거름이었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그럼 지금부터 이걸로 뭘 할 수 있는 거야?" 나는 화면 속 대시보드를 가리키며 물었다. [현재 관리자님께서는 라온성 내 소규모 채굴 구역에 접근 권한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시범적으로 자동화 채굴기 1기를 설치할 수 있는 초기 자원이 지급되었습니다.]
화면에 자원 현황이 표시됐다. 철광석 원석 100단위, 기본 채굴기 설계도 1종, 그리고 우측 하단에 작게 떠 있는 알림 하나. [주의: 라온성에는 토착 생물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산업 활동 시 환경 변화에 유의하십시오.]
나는 그 알림을 대충 훑고 지나갔다. 지금 당장 중요한 정보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토착 생물이라니, 그냥 배경 설정 같은 문구겠지, 하고 넘겼다.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오직 철광석 100단위와 채굴기 설계도뿐이었다.
아리에게 채굴기 설치를 요청하자, 화면 속 붉은 대지 한쪽에 작은 아이콘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설치까지 예상 소요 시간은 [00:04:32]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이거 취소는 안 돼?" 나는 괜히 겁이 나서 물었다. [설치 진행 중에는 취소가 불가능합니다.] "……그냥 물어본 거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가 됐든 이미 시작된 걸 되돌릴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 시간을 카운트다운으로 지켜봤다. 4분 32초, 4분 12초, 3분 58초...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화면 속 작은 아이콘이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는 걸 보고 있으니, 마치 내가 진짜로 뭔가를 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뭔가가 내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아리, 이거 진짜 나만 쓸 수 있는 거야?" 나는 물었다.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우수 큐브의 소유권은 관리자님께 귀속되어 있으며, 제3자가 접근하기 위해서는 관리자님의 명시적 위임이 필요합니다.]
"그럼 회사에서 이거 들고 가서 팀장한테 자랑해도 돼?" 나는 반쯤 장난으로 물었다. [권장하지 않습니다. 큐브는 관리자님 외의 인물에게는 물리적으로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뭐야, 그럼 나 혼자 헛소리하는 사람 되는 거잖아."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럴 만도 했다. 파란빛이 도는 정육면체를 들고 다니면서 이세계 산업 시스템이라고 떠들면, 누가 봐도 병원에 가야 할 사람으로 보일 게 뻔했다.
타이머는 3분에서 2분으로, 2분에서 1분으로 꾸준히 줄어들었다. 1분 30초, 1분 12초, 58초, 42초, 19초. 숫자가 한 자릿수로 좁혀질수록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화면만 노려봤다.
타이머가 00:00:00을 가리키는 순간, 화면 속 붉은 대지 위에 작은 채굴기 하나가 세워졌다. 원통형 기계가 지면을 파고들며 철광석을 채취하는 애니메이션이 재생됐고, 우측 자원 현황 칸에 철광석 수치가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3, 7, 15, 24...
나는 그 숫자가 올라가는 걸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바라봤다. 24에서 31로, 31에서 39로. 별거 아닌 숫자였지만, 내 눈에는 세상 어떤 로또 당첨금보다도 값진 숫자로 보였다. 나는 그 숫자를 하나씩 소리 내어 읽어보기까지 했다. "39... 47... 53..." 혼자 방 안에서 숫자를 중얼거리는 내 모습이 누가 보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상관없었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0시를 넘기고 있었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작은 채굴기 한 대가, 앞으로 몇 주 안에 나를 어떤 규모의 산업 제국으로 데려갈지, 그리고 그 대가로 어떤 것들을 요구할지. 그리고 화면 우측 하단에서 조용히 깜빡이던 그 경고 문구가, 결코 배경 설정 같은 헛소리가 아니었다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