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귀환했더니 지구가 던전이라니

3화

정확히 말하면 건물 자체는 그대로였다. 낡은 3층짜리 상가 건물, 옥상에 붙어 있던 물탱크, 계단 옆 우편함까지 다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1층 전체가 완전히 뜯겨나가고, 그 자리에 통유리로 된 사무소가 새로 들어서 있었다. 예전에 분식집이 있던 자리였다. 떡볶이 국물 냄새가 나던 곳에 이제는 알코올 소독약 냄새가 날 것 같은 흰색 인테리어가 들어서 있었다.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서지은 치료사무소 - B랭크 힐러 상시 대기] 서지은. 우리 누나 이름이었다. 나는 유리문 앞에 잠깐 멈춰 섰다.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다. 10년 전 옷차림 그대로, 여전히 이상한 몰골로. 안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두어 번 숨을 고르고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종소리 대신 은은한 차임벨이 울렸다. 딩, 하고 짧게. 요즘 사무소들은 다 저런 소리를 쓰나 보다. 예전 분식집 문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는데. 대기실에는 몇 명이 앉아 있었는데, 다들 몸 어딘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한 사람은 팔 전체를, 다른 사람은 발목에만. 벽에는 안전 수칙 포스터 같은 게 붙어 있었는데, 자세히 읽을 정신은 없었다. 접수대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10년 전보다 낮아지고, 조금 더 단단해진 목소리였다. 억양은 그대로였다. 나는 대기실 의자 사이를 지나쳐 접수대로 걸어갔다. 붕대를 감은 남자 하나가 나를 힐끗 보고 다시 시선을 거뒀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가 서류를 정리하다 나를 봤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준호야?" 지은 누나였다. 26살이 됐다고 했지만, 내가 기억하는 21살 얼굴에서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 화장을 거의 안 한 얼굴, 머리는 뒤로 질끈 묶었고, 가운 주머니에는 펜이 세 개나 꽂혀 있었다. 다만 눈빛이 예전보다 훨씬 지쳐 있었다. 눈 밑 그늘이 예전엔 없던 것이었다.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거야." 목소리가 떨렸다. 서류가 손에서 흘러내렸다. 종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누나." 지은 누나가 접수대를 뛰어넘듯 돌아 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팔이 가늘었다. 힘은 세지 않았지만 놓지 않으려는 힘이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켰다. 울음을 참는 소리였다.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힐끗거렸다. 붕대 감은 남자가 옆 사람에게 뭐라고 소곤거리는 게 보였다. 누나는 상관없다는 듯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나도 딱히 떼어낼 마음이 없었다. "실종신고 5년 만에 취소한 거 알아? 나 진짜, 진짜 죽은 줄 알았어." 실종. 그 단어에 나는 잠깐 말이 막혔다. 이세계에서 10년을 보내는 동안, 이곳에서는 내가 그냥 사라진 사람으로 처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류 몇 장으로 사람 하나가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어디 갔었어. 무슨 일이 있었어." 나는 그 질문에 짧게만 답했다. "먼 곳에 있었어. 나중에 다 얘기할게." 지은 누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나를 진료실 안쪽으로 끌고 가더니, 문을 잠갔다. 진료실 안은 대기실보다 조명이 조금 어두웠다. 침대 하나, 모니터 하나, 벽에는 인체 골격도 같은 게 붙어 있었다. 누나는 나를 침대 옆 의자에 앉히고, 자기도 맞은편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엄마 아빠는 어디 있어?" 나는 물었다. 누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 번 두드렸다. 예전부터 있던 버릇이었다. "탑에 있어." "탑?" "시련의 탑. 5년 전, 세계 진화가 일어났을 때 생긴 거야. 지구 곳곳에 그런 탑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 동네 근처에 있어서... 부모님이 선택됐어." 선택됐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무슨 응모를 해서 당첨된 것처럼 말하는데, 어투는 전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되물었다. "선택되면 어떻게 되는데." "안에 들어가서 살아 돌아오면 강해져. A랭크, B랭크... 그런 등급을 받아. 대신 못 나오면..." 누나는 말을 흐렸다. 시선이 잠깐 책상 위 사진첩 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부모님은 나왔어. 다행히. 지금은 A랭크 탐색자야." A랭크. 편의점에서 본 스티커에는 F랭크부터 시작한다고 쓰여 있었다. A랭크가 정확히 얼마나 높은지 몰라도, 짐작은 갔다. F부터 시작해서 A까지면, 알파벳 순서로만 봐도 꽤 위쪽이다. "두 분 다 살아 있는 거지." 나는 확인하듯 물었다. "살아 있어. 지금은 던전 나가 있는데, 곧 돌아올 거야." 누나는 잠깐 나를 살피다 덧붙였다. "그런데, 준호야. 두 분... 좀 달라지셨어." "어떻게." 누나는 대답 대신 책상 서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손가락이 사진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리다가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사진을 받아 들었다. 사진 속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을 든 남자와, 손끝에서 푸른 불꽃 같은 게 피어오르는 여자였다. 배경은 어디 산속 같았다. 두 사람 모두 3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옷차림도 등산복이 아니라 무슨 갑주 비슷한 걸 입고 있었다. "이거 엄마 아빠야?" "응. 탑 다녀오고 나서부터 저래." 나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봤다. 기억 속 부모님은 40대 후반이었다. 아버지는 배가 조금 나오기 시작했고, 어머니는 흰머리를 염색하느라 한 달에 한 번씩 미용실에 다니셨다. 지금 사진 속 두 사람은 그보다 훨씬 젊었다. 피부도 팽팽했고, 아버지가 들고 있는 검을 쥔 손목은 예전보다 훨씬 두꺼워 보였다. "역나이라고 부르는 현상이래. 탑 안에서 어떤 조건을 만족하면 생기는 부작용인데, 정확한 원리는 아무도 몰라. 정부도 연구 중이라고만 하고." "부작용이라고?"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불러. 근데 다들 좋아하는 눈치야. 늙는 게 부작용이면 안 늙는 게 왜 부작용이냐고들 하는데..." 누나가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놨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사진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모님이 강해졌다는 사실은 좋은 일이어야 했다. 그런데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냥,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었다. "왜 탑에 들어가신 거야. 위험한 거잖아." 지은 누나는 잠깐 시선을 피했다. 손가락으로 다시 무릎을 두드렸다. 이번엔 세 번.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지금은." 말끝을 흐리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캐물어봤자 지금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나는 지금 어떻게 되는 건데. 여기 시스템은 뭐고, 스테이터스는 왜 있는 거고." 누나는 그제야 조금 편한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낯선 질문이 아니라 익숙한 질문이라 그런 것 같았다. "5년 전에 '세계 진화'라는 게 일어났어. 전 세계에 게이트가 생기고, 던전이랑 마물이 나타나기 시작했지. 동시에 사람들 몸에 스테이터스라는 게 생겼어. 능력치, 레벨, 그런 거. 정부에서는 탐색자 자격증 제도를 만들어서, 등급별로 던전 출입을 관리하고 있어. F부터 시작해서, E, D, C, B, A. 그 위로 랭크가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된 건 없어." "나도 등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 "당연하지. 등급 없으면 던전 근처도 못 가고, 취업도 안 되고, 심지어 어떤 지역은 등급 없인 출입 자체가 막혀 있어." 누나가 말하다 나를 유심히 살폈다. "근데... 너,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몸이 좀 이상하지 않아? 뭔가, 반응이." 나는 아까 편의점에서 크리스탈이 깨진 일을 떠올렸다. 계산대 위에서 손바닥 크기 유리 조각이 그냥 쩍, 하고 갈라지던 순간. 편의점 알바생 표정이 하얗게 질리던 것도. "레벨 95라고 나왔어. 크리스탈이 깨졌고." 지은 누나의 눈이 커졌다. 서류를 쥔 손이 굳었다.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뭐?" "레벨 95. 마왕 토벌자라는 칭호도 있고."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밖을 한번 확인하고 커튼을 닫았다. 블라인드 줄이 흔들리며 딸그락, 소리를 냈다. "준호야. 그거, 절대 아무데서나 말하지 마." "왜." "국내 최고 등급 탐색자가 레벨 60대야. 95면... 이 정도면 국가에서 관리 대상이 될 수도 있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누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협회에서 알면 당장 소환할 거야. 검사 나온다고 하면서 사람 하나 붙여놓고, 그다음엔 무슨 특수부대 소속으로 넣으려고 할 수도 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망했다.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이세계에서 겨우 벗어나서 돌아왔더니 여기서도 또 뭔가에 붙잡힐 뻔한 것이다. 누나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봤다가, 곧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풀었다. "일단 오늘은 집에 가자. 부모님도 곧 돌아오실 거야. 씻고, 뭐라도 먹고. 등급 검사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자. 급할 거 없어." 집이라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됐다. 밥이라는 단어에도. 이세계에서 10년간 먹은 거라곤 육포 비슷한 것과 이름 모를 열매뿐이었다. 그런데 누나가 진료실 문을 열려는 순간,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환자 왔어요! 던전에서 사고 났대요!" 간호사인 듯한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지은 누나가 표정을 바꾸며 가운을 고쳐 입었다. 방금까지 내 앞에서 웃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대신 사무적이고 냉정한 얼굴이 자리를 잡았다. "준호야,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진료실 밖으로 나가고, 문이 살짝 열린 채로 남았다. 나는 문틈으로 대기실 쪽을 살짝 내다봤다. 사람들이 들것을 옮기고 있었다. 들것 다리가 접혔다 펴지는 소리, 사람들이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 발소리가 뒤섞였다. 들것 위에 누워 있는 사람의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붉은색. 선명한, 진짜 피. 나는 순간 숨이 막혔다. 몸이 얼어붙었다. 발끝부터 서서히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피구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벽을 짚고 진료실 안쪽으로 물러섰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이세계에서 10년을 보내며 익숙해졌어야 할 감각인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감각이었다. 오히려 익숙해질수록 더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다행이다. 못 봤다. 아니, 봤는데 아무도 몰랐다. 나는 진료실 안쪽 구석에 서서 숨을 골랐다. 등을 벽에 붙이고, 눈을 몇 번 감았다 떴다. 눈앞이 잠깐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문밖에서 누나가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바이탈 확인하고, 지혈부터. 힐 포션 두 개 준비해요. 빨리." 능숙하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아까 나를 끌어안고 울먹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지구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실감했다. 여기도 이세계와 똑같이 피가 흐르고, 사람이 다치고, 죽는 곳이었다. 편의점 스티커나 유리로 된 사무소, 차임벨 소리 같은 것들 뒤에는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숨어 있었다. 겉모습만 바뀐 게 아니었다. 이 세계 자체가, 근본부터 달라져 있었다. 나는 문틈 사이로 다시 한번 대기실을 내다봤다. 들것이 안쪽 처치실로 옮겨지고, 문이 닫혔다. 누나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이어졌다. 뭔가를 지시하는, 다급하지만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 사이로,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사람이 아파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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