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관리소장 아저씨는 서류 더미 뒤에서 얼굴만 겨우 내밀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철은 무너질 정도로 높았는데, 그 틈새로 보이는 아저씨 얼굴이 마치 편의점 계산대 뒤에 숨어있는 알바생 같았다.
"D-3 구역 개체요? 그거 그냥 폐기 대상이야. 마력 반응 제로, 상태 최악, 회수할 것도 없어."
"그럼 방금 기포는 뭔데요."
"기포? 슬라임은 죽을 때도 가스 찬다. 그게 기포지 뭐겠냐."
합리적인 답이었다.
너무 합리적이어서 오히려 찜찜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오히려 너무 논리적으로 대답한다는 건, 헌터 아카데미 심리학 개론에서 배운 내용이었다. 근데 그 강의 성적 D였던 내가 이런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게 더 웃겼다.
[전도서 9:5, 산 자들은 죽을 줄을 알되 죽은 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나니]
근데 저 슬라임은 죽지도 않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살아있으면서 죽은 척하는 건지, 죽어가면서 산 척하는 건지, 헷갈렸다.
관리소장 아저씨는 다시 서류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인사만 꾸벅 하고 창고를 나왔다.
하지만 발걸음이 이상하게 무거웠다. 마치 배달 음식을 시켰는데 오는 길에 자꾸 지연되는 알림만 받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야근 수당도 안 주는 야근을 자처하며 지하 3층에 남았다.
소장님은 퇴근했고, 창고엔 나와 슬라임들뿐이었다.
형광등 하나가 마지막 발악처럼 깜빡거렸다.
깜빡, 깜빡, 깜빡.
꼭 저 전등도 D-3 구역 개체들처럼 폐기 대상 명단에 올라있을 것 같았다.
창고 안은 조용했다. 다른 수조 안의 슬라임들은 각자 배정된 자리에서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초록색, 파란색, 심지어 반짝이는 금색 슬라임까지 있었는데, 다들 건강하고 활기찼다. 유일하게 D-3 구역만 조용했다. 죽은 듯이.
수조 앞에 쭈그려 앉아서, 나는 별생각 없이 사료 창고에서 챙겨온 슬라임용 배양액을 조금 부어줬다.
다른 개체들한테 배급하는 정량의 절반도 안 되는 양이었다.
사실 이것도 무단 반출이긴 한데, 그날은 이상하게 그런 생각조차 안 들었다.
"어차피 폐기될 거, 마지막으로 밥 한 끼는 먹어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내 처지랑 겹쳐 보였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였다.
계약도 못 하는 F등급 테이머와 폐기 예정 슬라임.
둘 다 세상 기준으로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헌터 아카데미 졸업생 명단에 내 이름이 실려있긴 하지만, 그건 명단에 있다는 것뿐이지 누가 나를 찾지는 않는다.
꼭 저 D-3 구역 개체처럼.
배양액이 수조 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 걸레 물색 덩어리가 움찔했다.
뿌글뿌글!
기포가 연달아 올라왔다.
색이 아주 살짝, 눈치 못 챌 정도로 밝아졌다.
설마.
반응하는 거야, 지금?
나는 숨도 안 쉬고 그 순간을 지켜봤다. 마치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반값 스티커를 붙이는 알바생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아니, 이건 좀 이상한 비유다. 근데 진짜로 그런 심정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다른 슬라임들은 배양액 냄새만 맡아도 사족을 못 쓰고 몰려드는데, 이놈은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마치 사람이 오랫동안 굶다가 밥을 봐도 뭘 해야 할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런 어색한 반응.
꼭 나 같았다. 오랜만에 소개팅 나갔을 때 뭘 먹어야 할지, 어떻게 웃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얼어있던 그때처럼.
물론 나는 소개팅 한 번도 안 나가봤다. 비유가 좀 과했다.
나는 유리에 손바닥을 댔다.
차갑고, 축축했다.
꼭 겨울 아침에 지하철역 계단 손잡이 같았다. 사람 손이 안 닿는 곳은 늘 그렇게 차갑다.
[시편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슬라임한테는 목자가 없어서 부족함이 넘쳐났다.
나도 사실 목자가 있었으면 F등급까지 안 왔을 것 같은데, 그건 또 다른 얘기다.
그때, 시스템 창이 처음으로 떴다.
[대상 개체와의 유대 감응 감지]
[계약 가능 여부 확인 중...]
[계약 성공률 : 38%]
뭐?
계약?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창이 사라지지 않았다. 진짜였다.
나는 헌터 아카데미 6개월 내내 단 한 번도 계약 가능 메시지를 본 적이 없었다.
테이머는 몬스터를 봐도 계약창이 안 뜨는 게 정상이다.
정상적인 몬스터는 테이머의 '동조율'이 일정 이상이어야 계약창이 뜨는데, 나는 그동안 만난 모든 던전 몬스터, 길거리 슬라임, 실습용 개체 전부한테서 동조율 미달로 튕겼다.
동기들은 벌써 세 번째, 네 번째 계약 몬스터를 데리고 다녔다. 나는 계약창 한 번 뜬 적이 없어서 실습 성적표에 '계약 시도: 0회'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교수님은 그걸 보고 "특이하네"라고 했는데, 그 말이 얼마나 뼈아팠는지 모른다.
그런데 폐기 직전인, 색깔이 걸레 물 같은, 마력 반응 제로인 이 슬라임한테서는 뜬다.
[계약 성공률 : 38%]
38퍼센트면 낮은 편이다.
보통 실습생들이 잡는 초급 슬라임 계약 성공률이 60~70퍼센트대라고 들었다.
하지만 나는 6개월 동안 단 한 번도 계약 시도조차 못 해본 사람이다.
38퍼센트는 나한테는 로또 1등 확률보다 높게 느껴졌다.
손이 떨렸다. 진짜로 떨렸다. 이런 감각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다.
아니, 정정한다. 저번 주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유통기한 스티커 붙이는 걸 봤을 때도 비슷하게 떨렸던 것 같다.
근데 그건 좀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할래."
말이 먼저 나가고 나서 생각했다.
지금 이거 폐기 예정 물건 무단 반출인데, 이거 절도죄 아닌가.
근데 이미 늦었다.
법적인 책임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다음 기회가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계약을 진행합니다]
촤아아아악!
수조 안의 액체가 요동쳤다.
걸레 물색 덩어리가 순식간에 부풀었다가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했다.
꼭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숨을 몰아쉬는 건가? 슬라임한테 폐가 있는지는 여태 배운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다.
마치 사람이 오랫동안 숨을 참았다가 처음으로 크게 들이쉬는 것 같았다.
감정을 신체 반응으로 우회해서 설명하자면, 그 순간 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좋은 의미로.
창고 안의 형광등이 그 순간만큼은 깜빡이지 않고 멀쩡히 켜져 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아껴둔 전기 같았다.
[계약 성공률 재계산 중...]
[성공]
[테이머 이도훈과 개체 '무명 슬라임'이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됐다.
됐어!
나는 지하 3층 창고 한복판에서 혼자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소리는 못 냈다, 소장님이 아직 근처에 있을까 봐.
하지만 속으로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마치 로또 1등 당첨 문자를 받은 사람처럼, 아니 그거보다 더 좋았다. 로또는 세금 떼고 나면 실감이 안 나는데, 이건 실감이 바로 났다.
[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죽었다가 살아난 건 슬라임인데 왜 아버지 대사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런 기분이었다.
탕자의 아버지 심정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 테이머고, 몽이는 아들이 아니라 슬라임이지만, 감동의 결은 비슷했다.
수조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슬라임은 예상보다 훨씬 가벼웠다.
체온... 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온기도 아주 미약하게 느껴졌다.
색은 여전히 탁했지만, 아까보다는 확실히 밝아진 것 같았다.
아니면 내 눈이 희망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봤다. 표면에 작은 기포들이 계속 뽀글거렸다. 마치 탄산음료 캔을 막 딴 것처럼.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이렇게 확실한 증거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도 나는 아직도 반신반의했다.
"이름 지어줘야겠지."
몽글몽글한 생김새를 보니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몽이. 넌 이제부터 몽이야."
슬라임이 대답 대신 살짝 부풀었다.
Boyoing.
의사언어인지 그냥 물리 현상인지 구분이 안 갔지만, 왠지 좋다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그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한 번 더 이름을 불러봤다.
"몽이야."
Boyoing.
또 같은 반응이었다. 이 정도면 확실히 이름에 반응하는 거다. 아니면 그냥 소리에 반응하는 물리적 현상일 수도 있는데, 이 순간 나는 그런 과학적 검증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관리소를 나오면서 폐기 대상 명단에서 몽이의 이름을 지웠다.
서류상으로는 이제 몽이는 존재하지 않는 개체가 됐다가, 동시에 내 첫 계약 몬스터로 새로 등록됐다.
서류 하나 고치는데 이렇게 손이 벅벅 떨릴 일인가 싶었지만, 원래 첫 경험은 다 이런 거다.
등록 시스템에 이름을 입력하는 순간에도 한 번 더 시스템 창이 떴다.
[개체 '몽이'가 정식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테이머 이도훈의 최초 계약 몬스터입니다]
최초. 그 단어가 유난히 크게 보였다.
6개월 동안 못 뜬 계약창이 하루아침에, 그것도 폐기 대상 슬라임 한 마리로 뚫렸다는 게 아직도 안 믿겼다.
집에 가는 길, 가방 안에서 몽이가 계속 꿀렁거렸다.
마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듯이.
뭐, 슬라임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봤자 얼마나 대단하겠나.
밥 달라는 거겠지.
버스 정류장에서 가방을 슬쩍 열어봤다. 몽이는 여전히 탁한 색깔로 가방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보다 확실히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처음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F등급 테이머가 아니라 '계약 성공한 테이머'로 잠들었다.
기분이 좋아서 코끝이 찡해졌다.
농담이다.
그냥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이 유통기한 임박이라 반값이었던 게 더 기뻤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몽이가 담겨있는 통이었다. 밤새 배양액 통에 넣어둔 몽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행이다, 도망 안 갔구나.
슬라임이 도망갈 다리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통 안을 들여다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멈췄다.
몽이의 색깔이 어젯밤보다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그리고 표면에 뭔가... 문양 같은 게 살짝 떠올라 있었다.
이거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