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림자는 청연문 정문 앞, 삼십 보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밤바람이 문득 그쳤다.
좌우로 늘어선 소나무들의 가지조차 흔들림을 멈춘 듯했다.
청연문의 처마 끝에 걸린 등롱만이 힘없이 흔들리며 붉은 그림자를 마당에 흩뿌리고 있었다.
목상현이 검을 뽑아 들고 그 앞을 막아섰다.
그의 등 뒤로 문파의 제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검을 뽑았고, 누군가는 그저 멀찍이서 숨을 죽인 채 서 있을 뿐이었다.
"이름을 밝히시오." 그가 물었다.
목소리는 마당 전체에 낮게 퍼졌으나, 대답은 없었다.
검은 천 아래 눈동자만이 여전히 담장 위, 강찬이 서 있던 자리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은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고요했다.
마치 눈을 뜬 채로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텅 빈 응시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겠다면, 무단으로 청연문의 영역을 침범한 것으로 간주하겠소."
목상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의 검을 쥔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기운이...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는 오랜 세월 무림을 오가며 수많은 고수를 상대해왔으나, 이런 종류의 기운은 처음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 온기도 냉기도 없는 기이한 압박감이었다.
피부에 닿는 것이 아니라 뼛속으로 스며드는 종류의 기운.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짧게 삼켰다.
그림자의 검은 천은 바람도 없는데 옷자락처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손등은 인간의 피부색이 아니라 회백색에 가까웠다.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무언가.
목상현은 그 생각을 애써 지웠다.
지금은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
장백령 깊은 골짜기, 삼십 년 전 어느 밤.
젊은 목상현은 스승의 무릎 아래 앉아 낡은 죽간을 읽고 있었다.
화로 안의 숯불이 타오르며 방 안을 은은하게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창밖에서는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사부님, 이 대목은 무슨 뜻입니까."
죽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무영(無影)이 하계에 강림하던 날, 산이 무너지고 강이 거슬러 흘렀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생명이 지워지되,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았으니, 이는 불사(不死)의 저주였다.』
"이것은 옛 전승이다." 스승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천계의 중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봉인했다는 이야기지. 이름하여 무영. 불사불멸의 법칙을 진신으로 수련한 자였다고 한다."
젊은 목상현은 죽간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불사불멸이라 하면, 검으로도 벨 수 없다는 뜻입니까."
"벨 수는 있었다고 한다." 스승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벤 자리가 다시 아무는 것이 문제였지. 사람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야 아무는 법인데, 그자의 몸은 시간의 흐름조차 거부했다더구나."
"그 존재가 어찌 되었습니까?"
"흩어졌다고 들었다. 육신도, 혼백도, 유해도 모두 하계 각지로 뿌려져, 다시는 하나로 모이지 못하도록."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그저 봉인하는 것으로는 부족했습니까."
스승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화로의 숯불이 타닥, 소리를 내며 튀었다.
"봉인은 언젠가 풀린다. 하늘의 중신들도 그것을 알았기에, 완전히 흩어놓는 길을 택한 것이다. 뼈는 뼈끼리, 살은 살끼리, 혼은 혼끼리.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각기 다른 땅에 묻었다고 하더구나."
"그것들이 다시 모인다면 어찌 됩니까."
"모이지 못한다. 하늘이 그렇게 정했으니."
스승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확신은,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않았다.
젊은 목상현은 그 말을 듬성듬성 흘려 넘겼다.
그때는 그저 옛이야기였을 뿐이었다.
스승 무릎 아래에서 듣던 수많은 전승 중 하나, 화로 불빛 아래 잠들기 전 나누던 옛날이야기와 다를 바 없었다.
하늘이 자줏빛으로 물드는 밤이, 자신의 문파 앞마당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현재, 청연문 앞.
목상현은 그 옛 기억을 떠올리며 눈앞의 그림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설마... 저것이 정말로.'
어깨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검을 쥔 손바닥이 미끈거렸다.
생각이 끝나기 전에, 그림자가 움직였다.
한 걸음.
그것만으로 지면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짓눌리는 듯한, 낮고 둔중한 소리가 발밑에서 울렸다.
"물러서시오!" 목상현이 외치며 검을 앞으로 뻗었다.
"태청검법(太淸劍法), 벽운(劈雲)!"
검이 허공을 갈랐다. 맑은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그림자를 향해 뻗어 나갔다.
검기가 지나간 자리에 잔상처럼 푸른 빛의 궤적이 남았다.
그림자는 피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그 검기를 막았다.
"까앙ㅡ!"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텅 빈 항아리를 두드리는 듯한, 공허한 울림이 마당 전체에 퍼졌다.
그 소리는 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가슴 한복판을 통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목상현은 뒤로 두 걸음 밀려났다.
손끝이 저릿했다.
검을 쥔 손목까지 마비된 듯한 감각이 올라왔다.
'막았다... 검기를 손으로.'
그는 이를 악물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숨을 짧게 내쉬며 흐트러진 균형을 바로 세웠다.
제자들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저게... 정말 사람인가?"
"목 원로님의 검기를 맨손으로 막다니..."
여기저기서 두려움에 젖은 속삭임이 오갔다.
강규가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서려 하자, 목상현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물러서 있게, 강 문주. 이건 자네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야."
강규의 얼굴이 굳었으나, 그는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분함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
문주로서 문파의 원로를 홀로 싸움에 내보내야 하는 처지가 그를 짓눌렀다.
목상현이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호흡을 가라앉히고, 단전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전신의 혈맥을 따라 진기가 빠르게 순환했다.
"천뢰격(天雷擊)!"
검신을 따라 푸른 빛이 번쩍였다.
번개처럼 뻗어 나간 검기가 그림자의 어깨를 향해 짓쳐들었다.
"퍽ㅡ!"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몸이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처음으로, 상대가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통했다!' 목상현의 눈에 잠시 희망이 스쳤다.
등 뒤에서 낮은 함성 같은 것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림자는 곧 자세를 바로 세웠다.
어깨에 닿았던 검기의 흔적이, 마치 물에 스며든 잉크처럼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상처가 아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간 흔적일 뿐이었다.
'회복이... 이렇게 빠르다니.'
목상현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지금까지 무수한 실전을 겪었으나, 상대의 상처가 눈앞에서 지워지는 광경은 본 적이 없었다.
살을 벤 순간의 감촉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감촉이 남긴 결과는, 마치 애초에 없었던 일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림자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그 텅 빈 눈동자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그림자의 주변을 감쌌다.
안개는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움직이며 마당의 지면을 따라 퍼져 나갔다.
안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의 풀들이 순식간에 시들어 갔다.
"모두 뒤로!" 목상현이 소리쳤다.
제자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누군가는 넘어졌고, 누군가는 동료를 부축하며 뒷걸음질쳤다.
강찬은 여진의 팔을 붙잡고 담장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괜찮아?" 강찬이 낮게 물었다.
여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손은 강찬의 옷자락을 꽉 움켜쥔 채 놓지 않았다.
그의 품 속에서 두개골이 계속해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마치 그 안개에 반응하듯, 자줏빛이 안개의 색과 공명하며 흔들렸다.
빛의 박동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강해지고 약해졌다.
'이 두개골이... 저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강찬은 두려움 속에서도 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는 품속의 뼈를 옷 안으로 더 깊이 밀어 넣었다.
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그림자가 그것을 알아챌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목상현은 검을 고쳐 쥐고 다시 앞으로 나섰다.
안개가 그를 삼키려는 듯 넘실거렸다.
안개 속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마치 물속에 들어간 것 같은 감각이었다.
"청연구식(靑燕九式), 제칠식... 선회영락(旋回零落)!"
검이 원을 그리며 안개를 베어냈다.
검신이 만들어낸 회전은 마치 소용돌이처럼 안개를 밀어냈다.
안개는 갈라졌으나 곧 다시 모여들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이 상처를 회복하듯, 갈라진 틈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이런 방식으로는 끝이 없다." 목상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단전 깊숙한 곳의 진기를 모두 끌어올렸다.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마지막 초식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갈고 닦았으나, 실전에서 써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모두 물러서 있게!"
그가 외치는 순간, 그림자의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목상현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 손이 그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크윽!"
목상현의 몸이 뒤로 날아가 담장에 부딧혔다.
등뼈까지 울리는 충격에 그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제자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졌다.
"사부님!" 강찬이 소리쳤다.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으나, 여진이 그의 팔을 붙잡아 다시 담장 아래로 끌어당겼다.
"가면 안 돼." 그가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강찬은 이를 악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강규가 검을 뽑아 들고 달려나갔다.
"이놈!"
그림자는 강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텅 빈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그 시선에 담긴 무게가, 마치 강규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강규의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멈추었다.
숨이 가슴 안에서 얼어붙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 산 아래에서 낮은 뿔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길게, 그리고 낮게 울리는 그 소리는 마치 신호처럼 밤공기를 갈랐다.
그림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마치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그림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강규를 향한 살의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그림자는 아무 말 없이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는 다시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에는 서두름이 전혀 없었다.
마치 이 자리에서 할 일이 이미 끝났다는 듯한 여유였다.
그 뒤를 따라 담장 밖 어둠 속에서 하나, 둘, 셋... 또 다른 그림자들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산 아래로 사라져 갔다.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강규는 검을 쥔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함부로 쫓을 수는 없었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목 원로!" 그가 몸을 돌려 목상현에게 달려갔다.
목상현은 담장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상처는 깊지 않았다.
"괜찮으신가?"
목상현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숨을 고르는 데만도 시간이 걸렸다.
"...괜찮네." 그가 힘겹게 대답했다.
"저것은... 사람이 아니야."
그의 시선이 산 아래로 물러가는 그림자들을 향했다.
그들은 물러가면서도 여전히 서두르지 않았다.
마치 이 밤의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뿔피리 소리... 저것들을 부른 것이 누구겠나." 목상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강규는 그 물음에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누구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주변의 제자들이 하나둘 다가와 목상현을 부축했다.
누군가는 상처를 살피고, 누군가는 여전히 산 아래를 향해 검을 겨눈 채 경계를 풀지 않았다.
마당 곳곳에 안개가 지나간 흔적, 시든 풀과 갈라진 흙바닥만이 남아 있었다.
그 광경은 마치 태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자리 같았다.
강찬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두 손으로 두개골을 꽉 움켜쥐었다.
뼈의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그림자들이 사라지는 방향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빛은 그림자들이 완전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잦아들지 않았다.
'저들이... 이걸 원하는 건가.'
불안한 예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여진이 그의 옆에서 조용히 그의 손을 감쌌다.
그의 손끝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저 뼈가... 저들을 부르는 걸까." 그가 낮게 물었다.
강찬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두개골을 더욱 세게 움켜쥘 뿐이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그 냉기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그의 손바닥을 타고 스며드는 듯했다.
산 아래로 사라진 그림자들이 남긴 것은 정적뿐이었다.
그러나 그 정적은, 결코 안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을 때, 그 바람 속에는 옅은 시체 냄새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목상현은 그 냄새를 맡으며 눈을 감았다.
'다시 온다.'
그는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밤은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