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천도문의 경계가 자리를 잡은 지 보름이 지났다.
산 아래는 조용했다.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그 고요함이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검은 옷의 그림자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청연문의 일상도 서서히 예전의 리듬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침이면 닭이 울고, 저녁이면 밥 짓는 연기가 오르고, 그 사이 마당에서는 검을 부딪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평범했다. 지나칠 정도로 평범했다.
설아령은 마루에 앉아 약초를 다듬으며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손끝으로는 말린 당귀 줄기를 골라내고 있었으나, 그녀의 눈은 줄곧 마당 한켠에 머물러 있었다.
강찬이 마당 한켠에서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었다.
자세는 여전히 서툴렀으나, 예전과는 무언가 다른 것이 있었다.
전에는 검을 마치 무거운 짐짝처럼 다루었으나, 지금은 검 끝이 아주 조금이나마 그 아이의 뜻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저 아이가... 언제 저렇게 자랐을까.'
설아령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당귀 향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으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
십오 년 전, 청하촌에서 조금 떨어진 산자락.
그날 밤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바람도 없이 소리 없이 쌓이는 눈이었다.
젊은 설아령은 눈이 내리는 밤, 낯선 봇짐을 안고 청연문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문 앞에 걸린 등불 하나가 희미하게 흔들리며 그녀의 발치를 비추었다.
봇짐 안에는 갓 태어난 사내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울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뜬 채 눈발이 흩날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이 설아령에게는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갓 태어난 아이가 저토록 조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아이를... 부탁드립니다."
그녀와 함께 있던 노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노인의 얼굴은 눈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깊고, 낮고, 오랜 세월의 무게가 묻은 목소리였다.
"이 아이의 태생을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발설되는 순간, 아이는 위험해질 것입니다."
설아령은 그 봇짐을 받아 안으며 물었다.
봇짐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그러나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 아이는... 어디서 온 아이입니까."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눈발 속으로 사라졌다.
설아령은 그 자리에 한동안 서 있었다.
노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눈발이 이미 그 발자국조차 지워버린 곳을 향해.
품 안의 아이가 그제야 작게 몸을 뒤척였다.
그 미약한 움직임에, 설아령의 가슴 한켠이 무언가에 붙잡힌 듯 저렸다.
설아령은 그날 밤, 강규에게 그 아이를 데려가 말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강규는 등불 아래 앉아 문서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아내의 품에 안긴 봇짐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아이로 삼겠습니다."
설아령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 흔들리고 있었다.
강규는 오래도록 그녀를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봇짐 속의 아이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그 순간에도 울지 않았다. 다만 강규를 향해 눈을 깜빡였을 뿐이었다.
"그리 하지."
강규의 목소리에는 어떤 결심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그렇게 강찬은 강규와 설아령의 외아들로 자라났다.
그날 밤의 기억은 두 사람의 마음속에만 남아, 십오 년 동안 단 한 번도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
설아령은 약초를 다듬던 손을 멈추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노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십오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그녀는 그 밤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강찬의 얼굴에서 그 노인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눈매의 각도, 콧대의 모양, 웃을 때 드러나는 버릇까지도.
하지만 강찬은 그저 평범한 소년이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했다.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던 강찬이 문득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쿵ㅡ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아이참!" 그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는 손짓이 제법 익숙했다. 넘어지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여진이 옆에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나무 그늘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강찬의 수련을 구경하고 있던 참이었다.
"찬아, 넌 삼 년이나 검을 잡았는데 어째서 아직도 그 모양이냐?"
"사형은 웃지나 마세요! 사형도 처음엔 저보다 못했다면서요!"
강찬이 검을 다시 고쳐 쥐며 볼을 부풀렸다.
"헤헤, 그거야 그때 얘기고!"
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섰다.
"자, 봐라. 이렇게 서야 넘어지지 않는다."
그가 짧게 자세를 보여주었다.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무릎을 살짝 굽히고, 검을 앞으로 뻗는 동작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강찬이 그 자세를 따라 해보았으나, 어딘가 뒤뚱거리는 것이 여전했다.
"이게 왜 안 되지..."
"넌 상반신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다리로 버텨야 하는데 어깨로 버티려 하니 자꾸 앞으로 쏠리는 거다."
여진의 말에 강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두 소년의 웃음소리가 마당에 퍼졌다.
설아령은 그 광경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뒤에는,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오래된 물음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아득히 먼 황도(皇都)의 궁궐 깊은 곳.
붉은 기와와 황금빛 처마가 겹겹이 늘어선 그곳, 궁궐의 가장 안쪽 방은 낮에도 어두웠다.
비단 장막이 늘어진 방 안에서, 태감(太監) 하나가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방 안을 감싸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상이 자줏빛으로 물든 날짜와 위치, 모두 파악하였느냐."
장막 안에서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오랜 세월 명령을 내려온 자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예, 대인. 장백령 인근이었다고 하옵니다."
태감의 목소리는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장막 쪽을 올려다보지 못했다.
"장백령이라...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보았느냐."
"청연문이라는 작은 문파가 있사옵니다. 한때는 명문이었으나,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곳이옵니다."
태감이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문도의 수는 이십여 명에 불과하며, 문주는 강규라는 인물이라 하옵니다. 젊었을 적에는 나름 이름을 알렸으나, 지금은 산중에 은거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하옵니다."
장막 안의 인물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방 안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전 청연문 앞에서 정체불명의 존재와 충돌이 있었다는 소식도 들어왔사옵니다. 천도문이 개입하여 표면적으로는 봉합되었다고 하옵니다."
"흠."
장막 안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웃음소리에는 즐거움과는 다른, 기이한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드디어 움직이는가."
그 목소리에는 기이한 기대감이 섞여 있었다.
"대인, 어찌 하올까요."
태감이 고개를 더욱 낮추며 물었다.
"당분간은 지켜만 보아라. 그 문파에 무엇이 있는지, 확실해질 때까지는 손을 대지 마라."
"명심하겠사옵니다."
태감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났다.
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장막 안의 인물은 홀로 남아, 손끝으로 탁자 위의 옥패를 매만졌다.
옥패는 차가웠다. 오랜 세월 손에 쥐어온 듯, 그 표면은 매끄럽게 닳아 있었다.
그 옥패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구불구불한 선들이 얽혀 있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규칙성이 느껴지는 문양이었다.
장백령 골짜기의 무너진 사당 유적, 그 돌 표면에 새겨진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인물은 그 문양을 손끝으로 오래도록 쓰다듬었다.
마치 오랜 기억을 더듬듯이.
한편, 궁궐의 또 다른 회랑에서는 두 명의 관리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회랑 밖으로는 정원의 나무들이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길게 그림자를 늘이고 있었다.
"들으셨습니까, 예부시랑(禮部侍郎) 나리께서 최근 장백령 방면으로 사람을 보내셨다는 것을요."
한 관리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속삭였다.
"예부시랑이 그런 벽지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요?"
다른 관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그것이... 천상의 자줏빛 때문이라 하더군요. 옛 전승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 아니겠습니까."
"허, 조정 대신이 그런 잡설에 관심을 두신다니 놀랍습니다."
앞선 관리가 짧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쉿, 그런 말씀은 조심하십시오. 요즘 궁 안 공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두 관리는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발소리가 회랑의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조용히 울렸다.
그 소리마저도 조심스러운 듯, 두 사람은 이내 걸음을 늦추었다.
궁궐의 그림자 속에서, 청연문을 향한 시선은 이미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다만 청연문의 사람들은, 그 시선의 존재조차 아직 알지 못했다.
청연문 마당에서는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은 오후가 흘러가고 있었다.
해가 조금 기울어, 마당에 늘어선 나무들의 그림자가 길게 뻗어 있었다.
강규가 검을 들고 강찬 앞에 섰다.
그 손에 들린 검은 오랜 세월 그의 곁을 지켜온 낡은 것이었으나, 손잡이에 감긴 천만은 새것이었다.
"오늘은 내가 직접 봐주겠다."
강찬의 눈이 커졌다.
여진도 옆에서 슬그머니 자세를 바로 하며 흥미로운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께서요?"
"목 원로께서 상처가 아직 낫지 않으셨으니, 당분간은 내가 대신하마."
강규는 자세를 잡으며 낮게 말했다.
그의 발끝이 흙을 지그시 누르며 자리를 잡았고, 검을 쥔 손목이 아주 자연스럽게 아래로 늘어졌다.
그 모습만으로도 오랜 수련의 흔적이 느껴졌다.
"기본을 다시 보자. 세 가지를 기억해라. 첫째는 자세(姿勢), 발끝과 무릎, 허리가 일직선을 이루어야 한다. 둘째는 호흡(呼吸), 숨을 내쉴 때 힘을 쓰고 들이쉴 때 힘을 모은다. 셋째는 안정(安定), 마음이 흔들리면 검도 흔들린다."
강규는 그 세 가지를 말하며 하나하나 손짓으로 짚어 보였다.
발끝을 가리키고, 무릎을 가리키고, 허리를 가리키는 그 손짓이 무척이나 담담했다.
강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어색하고 뻣뻣한 동작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말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검을 뻗었다.
발끝이 조금 어긋났다.
"다시."
강규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
강찬이 발끝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무릎이 지나치게 굽혀졌다.
"다시."
또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강찬은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잡으며 검을 휘둘렀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여진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실없는 농을 던졌을 그였으나, 지금은 웬일인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강규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흡을 잊었다."
강규가 다시 지적했다.
"숨을 내쉴 때 검을 뻗어야 한다. 지금 너는 숨을 참고 있구나."
강찬이 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검을 뻗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동작이 부드러워졌다.
"그렇지. 그거다."
강규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옅은 인정이 섞였다.
강찬의 얼굴에 순간 기쁨이 스쳤으나, 그는 그 표정을 애써 감추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규의 눈에 옅은 흡족함이 스쳤다.
'이 아이는... 재능은 아직 부족하나, 근성만은 남다르다.'
강규는 검을 늘어뜨린 채 잠시 아들의 동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칼, 흔들리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자세.
그 모습 속에서 그는 언젠가부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 아이가 그저 평범한 아이로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안정을 잊지 마라. 마음이 흔들리면..."
"검도 흔들린다, 알고 있습니다."
강찬이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강규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갔다.
마당의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고, 강찬의 검은 여전히 서투르게 허공을 갈랐다.
그는 그 순간에도, 아들의 몸속에 잠재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저 먼 황도의 어둠 속에서, 그리고 궁궐의 은밀한 회랑에서, 청연문을 향한 시선이 이미 조금씩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이 조용한 마당의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람이 마당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 속에 섞인 무언가를, 아직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