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성적표를 받은 날 저녁, 나는 그냥 누워 있었다.
국어 4등급, 수학 6등급, 영어 5등급.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놀랄 일이 있으려면 최소한 기대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나는 성적표를 받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시험 볼 때부터 알았다. 국어 지문 세 번째 문단부터 눈이 흐려지는 걸 느꼈을 때, 그때 이미 4등급은 확정이었다.
강민준. 서울 어딘가에 있는 평범한 고등학교 2학년. 특기도 없고 취미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특기는 '아무것도 안 하기'였다. 취미도 있다면 있는데, 침대에 눕는 각도를 매일 미세하게 바꿔보는 정도. 오늘은 45도로 누워봤다.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엄마는 저녁마다 한숨을 쉬셨고, 나는 그 한숨을 못 들은 척하는 게 특기 중에서도 가장 숙련도가 높은 기술이었다. 성적표 봤냐고 물으실 줄 알았는데, 그날은 그냥 국이나 먹으라고만 하셨다. 그게 더 무서웠다. 화를 내는 것보다 포기한 듯한 침묵이 훨씬 살 떨렸다.
그날도 똑같은 하루였다.
야자 째고 집에 와서 침대에 눕고, 휴대폰을 만지다가 잠들고.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내 인생을 요약하면 딱 이 문장 하나로 끝날 하루였다. 강민준, 야자 째고 눕다. 그게 오늘자 일기의 전부였을 거다.
근데 새벽 세시쯤이었나. 눈이 번쩍 뜨였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눈이 떠졌다. 목이 마른 것도 아니고, 화장실이 급한 것도 아니고, 나쁜 꿈을 꾼 것도 아니었다. 그냥 스위치가 딸깍 켜지듯 의식이 돌아왔다.
천장이 이상하게 밝았다.
..뭐지.
형광등을 켠 것도 아닌데 방 전체가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눈을 비볐다.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더 비볐다. 여전히 방은 은은하게 밝았다. 마치 누군가 조도를 아주 낮게 맞춘 무드등을 방 전체에 깔아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런 조명 기구를 산 적도 없었고 애초에 우리 집에 그럴 돈도 없었다.
무섭다기보단 이상했다. 무서운 감정이 들어야 정상인데, 그냥 '이게 뭐지' 하는 심드렁한 궁금증이 먼저 올라왔다.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다. 지진이 나도 '아 이게 지진이구나' 하고 감탄부터 할 인간. 초등학교 때 놀이터에서 벌에 쏘였을 때도 아프다는 생각보다 '오, 진짜 쏘이니까 이런 느낌이구나' 하고 신기해했던 게 나였으니까.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이불을 걷어내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방바닥에 벗어놓은 티셔츠가 보였다. 흰색 티셔츠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게 파란색이면 좋겠다.'
별 이유 없었다. 그냥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었다.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 티셔츠에 딱히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 생각이나 떠오른 김에 떠오른 생각.
그런데.
티셔츠가 파랗게 변했다.
뜨윽-!
색이 스며드는 소리가 실제로 들린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소리가 날 리는 없다. 옷에 무슨 소리가 나겠어. 그런데 그렇게 느껴졌다. 마치 물감이 천에 번져가는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이 청각까지 건너온 느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됐다.
..잘못 봤나.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티셔츠는 여전히 파란색이었다. 아까 분명 흰색이었는데. 확신할 수 있었다. 왜냐면 그 티셔츠는 원래도 좀 누리끼리한 흰색이라서 세탁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옷이었으니까. 어제도 그거 보면서 엄마한테 세탁기 좀 돌려달라고 할까 말까 고민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손이 떨렸다.
일어나서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만져보니 그냥 옷이었다. 색깔만 다를 뿐 촉감도 재질도 똑같은 옷. 목 뒤 라벨도 그대로였고, 옆구리에 났던 작은 구멍도 그대로였다. 같은 옷인데 색만 달랐다. 이게 더 소름 돋았다. 완전히 다른 옷이면 그냥 바꿔치기했나 보다 하겠는데, 똑같은 옷에서 색깔만 바뀌었으니까.
환각인가. 아니면 꿈인가.
그런데 이상하게 손끝이 아팠다. 티셔츠 실밥이 손가락 끝을 긋는 느낌이 유난히 생생했다. 꿈이라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는데. 나는 원래 꿈속에서는 감각이 흐릿한 편이었다. 꿈에서 넘어져도 아프지 않았고, 꿈에서 밥을 먹어도 맛이 안 느껴졌다. 그런데 지금 이 실밥의 감촉은, 너무나도, 지나치게 생생했다.
책상 위에 지갑이 놓여 있었다. 학원비 남은 돈이 이만 원쯤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어제 학원 끝나고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사 먹고 남은 잔돈까지 다 세어봤으니 확실했다.
괜히 생각해봤다.
'저 지갑에 십만 원만 더 있으면 좋겠다.'
생각과 동시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뭔가 올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이미 티셔츠 사건을 겪었으니까. 근데 예감이 있어도 실제로 벌어지면 그 충격의 크기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나는 그 순간 처음 알았다.
지갑을 열어봤다.
오만 원짜리 두 장이 더 들어 있었다.
..이게 뭐야.
나는 그대로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흥분인지 공포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니 둘 다였다. 흥분과 공포가 동시에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숨이 막혔다. 숨을 크게 몰아쉬어봤는데도 가슴이 답답한 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갑 속 지폐를 손으로 만져봤다. 진짜 지폐였다. 신사임당 얼굴도 선명했고, 홀로그램도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었다. 위조지폐를 만드는 재주가 나한테 있을 리도 없고, 애초에 만들었다고 해도 이렇게 정교할 수는 없었다.
다시 생각해봤다. 조심스럽게.
'천장 조명이 켜지면 좋겠다.'
방 안에 불이 팟, 켜졌다.
버튼도 안 눌렀는데.
나는 그 순간 웃음이 났다. 이상한 웃음이었다. 무서운데 웃기고, 웃긴데 무서운 그런 웃음. 헛웃음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허..." 하는 소리가 나왔다.
'이게 무슨 심리일까' 하고 생각했다. 답은 안 나왔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웃음이 나온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내가 그 상황인 건지, 아니면 그냥 원래 정신이 좀 나간 놈인 건지 헷갈렸다.
다시 지갑을 봤다. 돈은 그대로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창밖을 봤다. 새벽 세시반의 서울은 조용했다. 가로등 몇 개만 켜져 있고, 다들 잠들어 있었다. 저 멀리 편의점 간판 불빛만 혼자 반짝이고 있었다. 그 흔한 고양이 한 마리도 안 보였다. 세상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근데 그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뒤통수가 서늘했다. 방 안에는 나밖에 없는데도, 마치 천장 어딘가에서, 아니 그보다 더 위, 하늘 어딘가에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 목덜미부터 시작해서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기분 탓이겠지.
스스로 그렇게 결론지었다. 근데 목덜미의 서늘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면, 도대체 왜. 내가 뭘 어쨌다고. 성적도 안 좋고 특기도 없는 그냥 평범한 고등학생을 누가 왜 지켜본단 말인가.
혹시 카메라라도 숨겨져 있나 싶어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책상 스탠드, 옷장 위, 커튼 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없겠지. 이게 카메라로 설명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은 안 왔다. 눈을 감아도 자꾸 생각났다. 파란 티셔츠, 오만 원짜리 두 장, 그냥 켜진 조명. 세 가지 장면이 눈꺼풀 안쪽에서 계속 재생됐다. 뜨윽-, 하는 그 이상한 소리와 함께.
이게 진짜라면.
나는 뭐가 된 걸까.
이런 걸 초능력이라고 부르나. 아니면 그냥 미쳐가고 있는 건가. 인터넷에 검색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뭐라고 검색해야 할지도 몰랐다. '생각하면 이루어짐', '소원 초능력', 이런 걸 검색하면 무슨 결과가 나올지 상상만 해도 우스웠다.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안고 새벽을 보냈다. 창밖이 밝아질 때까지, 나는 한숨도 못 잤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이 이상한 능력이 단순히 하룻밤의 환각이 아니라는 걸, 앞으로 내 인생을 완전히 뒤집어버릴 무언가라는 걸 어렴풋이 예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