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님, 저 좋은 학생인가요?

2화

학교 가는 길에도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데 발밑이 이상하게 붕 뜬 느낌이었다. 어제 일이 머릿속에서 자꾸 리플레이됐다. 뜨윽-. 그 소리, 그 감각. 손끝에서 뭔가 형태가 바뀌던 그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버스가 왔다. 카드를 찍고 자리에 앉았다. 창문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진짜였나.' '진짜 아니었나.' 같은 질문을 열 번쯤 반복하다가,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옆에 있던 아저씨가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죄송합니다, 라고 하려다가 그냥 고개만 숙이고 지나갔다. ..죄송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무슨 초능력자냐. 어제 일은 진짜였다. 확실했다. 근데 학교에 오니 다시 의심이 들었다. 원래 사람은 그렇다. 밤에는 확신했던 게 아침이 되면 흔들린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들 그럴 거다. 아마. 교문을 지나면서도 계속 그 생각만 했다. 신발주머니를 든 애들이 옆으로 지나갔다. 누가 인사를 했는데 나는 그냥 손만 흔들고 대답을 안 했다. 걔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못 들었다. 1교시 내내 딴생각만 했다. 선생님이 뭘 설명하는지 하나도 안 들어왔다. 칠판에 뭔가 적혀 있었는데 그게 숫자인지 글자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필기를 하는 척 하면서 노트에는 그냥 낙서만 그리고 있었다. 동그라미, 세모, 그리고 다시 동그라미.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야, 정신 어디 갔냐." "아, 네. 죄송합니다." 애들이 웃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숙였다. 근데 그 와중에도 머릿속엔 딴생각뿐이었다. 그 연필. 그 지우개. 아니, 아직 지우개는 안 해봤지만, 어제 그 인형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필통을 열었다. 흔한 노란색 육각 연필. HB. 학기 초에 문방구에서 열 자루 묶음으로 산 것 중 하나였다. 주변을 살짝 둘러봤다. 다들 자기 할 일에 바빴다. 누구는 매점 갈 돈을 세고 있었고, 누구는 엎드려 자고 있었고, 누구는 핸드폰으로 뭘 보면서 웃고 있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연필을 손에 쥐고 생각했다. '이 연필이 빨간색이면 좋겠다.' 뜨윽-! 연필이 빨갛게 변했다. ..잘도 변한다. 손이 다시 떨렸다. 어제는 혼자 방에서였으니 뭔가 확인이 덜 됐다고 치부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교실 한복판, 등하교하는 애들 사이, 그 대낮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나는 방금 물건의 색깔을 바꿔버렸다. 나는 연필을 얼른 필통 안에 집어넣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혹시 누가 봤을까 싶어서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안 봤다. 당연하지, 다들 자기 할 일 하느라 바쁘니까. 근데 그게 더 무서웠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나는 뭔가를 계속 바꾸고 있다는 게. 다음 시간, 화학 시간이었나. 선생님이 원소 주기율표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안 들어왔다. 대신 책상 밑에서 지우개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생각해봤다. '지우개가 두 개로 늘어나면.'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지우개가 두 개 잡혔다. ..이거 완전 사기 아닌가. 웃음이 나왔다가 다시 무서워졌다. 물건을 만든다는 것. 이게 무슨 의미인지 곱씹어봤다. 물건이 늘어난다는 건, 결국 그 물건의 원자, 분자, 뭐 그런 것들이 어디선가 갑자기 생겨난다는 얘기다. 근데 그게 어디서 오는 걸까. 화학 선생님이 방금 설명한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는 게 있었던 거 같은데, 나는 그걸 아주 태연하게 무시하고 있는 셈이었다. 물리 법칙을 어기는 고2. 이거 뭔가 대단한 건데, 왜 이렇게 무섭기만 하지. 돈도 만들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 나는 이제 부자가 될 수 있는 걸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두 장으로, 그 두 장을 네 장으로. 계속 그렇게 하면. 근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거 위조지폐 아닌가. 만약 이게 어디서 뭔가를 '복제'하는 거라면, 나는 지금 대단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거다. 근데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다시 그 느낌이 들었다. 뒤통수가 서늘한 느낌. 교실 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누군가—아니 뭔가—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닐까. 말이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꾸 그 생각이 들었다. 마치 시험을 보는데 CCTV가 있는 걸 알고 있는 느낌. 답을 몰라서 옆을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느낌. 뒷목이 따끈거렸다. 화학 선생님이 뭔가 질문을 했는데 나는 그것도 못 들었다. 옆자리 애가 나를 쿡 찌르면서 "야, 너 부르잖아" 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네?" 하고 되물었다. 선생님이 한숨을 쉬면서 다시 물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냥 서 있었다. 애들이 또 웃었다. ..오늘 진짜 왜 이러냐, 나. 돈을 늘리는 것도, 아무 조건 없이 물건을 늘리는 것도, 어쩌면 '나쁜 행동'으로 분류될 수 있지 않을까. 근데 누가 분류하는데. 신이 있다면, 아니 신이 진짜로 존재해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면. 나는 지금 무슨 시험을 치르고 있는 걸까. 점심시간이 됐다. 급식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친구 하나가 옆에서 뭐라고 재잘거렸는데 나는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걔가 "너 요즘 왜 이렇게 넋 나가 있냐" 하고 물었는데 나는 "그냥 좀 피곤해서"라고 대답했다. ..피곤한 게 아니라 인생이 바뀐 거야, 임마. 밥을 먹으면서도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급식판에 놓인 계란말이를 보면서 '더 커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는데, 나는 얼른 그 생각을 지웠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시험당하고 있다. 확실히. 뭔가가 나를 보고 있다. ..증거는 없지만. 근데 이상한 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스산한 울림이 느껴졌다. 소리는 아니었다. 그냥 느낌. 마치 라디오 주파수가 살짝 잡히다가 다시 끊기는 그런 느낌. 옆에 앉은 친구가 반찬을 집어가면서 "이거 맛있다, 너도 먹어봐" 하고 내 앞으로 그릇을 밀었다. 나는 건성으로 몇 개 집어먹으면서도 계속 그 느낌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켜보고 계신 거예요?' 마음속으로 물어봤다. 대답은 없었다. 당연히 없겠지. 신이 나 같은 고2한테 대답을 해줄 이유가 있나. 세상에 나 같은 애가 몇억 명인데. 나는 딱히 특별한 것도 없고, 공부도 중간, 얼굴도 중간, 존재감도 중간인 그냥 그런 애다. 근데 그 순간, 정말 그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작게 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웅- 분명 소리였다. 이명 같은 게 아니었다. 마치 라디오 채널을 맞춘 것처럼, 아주 짧게, 뭔가 존재감이 스쳤다. 나는 급식판 위에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달그락. 옆에 앉은 애가 나를 힐끗 봤다. "뭐야, 왜 그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근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그 웅- 소리는, 마치 뭔가가 대답하려다 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을 하려다가 삼킨 것 같은, 그런 애매하고 답답한 느낌. 나는 숟가락을 다시 주워들면서 손끝이 떨리는 걸 느꼈다. 친구가 "너 진짜 오늘 이상하다" 하고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괜찮아, 그냥 좀 놀라서" 하고 넘겼다. ..놀란 게 아니라 지금 세상이 뒤집히려고 하는 거야. 오후 수업 내내 나는 그 소리를 다시 들으려고 애썼다. 수업 시간에 일부러 딴생각을 하면서 '저기요, 듣고 계세요?' 하고 속으로 계속 물어봤다. 근데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짧은 웅- 소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야자 시간에도 책은 펴놓고 눈은 그냥 글자 위를 훑기만 했다. 머릿속은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만약 진짜라면, 진짜 뭔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거라면. 나는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능력을 써도 되는 걸까, 쓰면 안 되는 걸까. 만약 쓴다면 어디까지 써도 되는 걸까. 계란말이를 키우는 것도 안 되는 거라면, 대체 뭐가 되는 건데.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이게 진짜 신의 시선이라면. 나는 앞으로 뭘 조심해야 하는 걸까.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그 얼굴 위로, 문득 어제 봤던 그 이상한 빛의 잔상이 스치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아니, 착각이 아닐 수도 있고.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또 하나 얹고, 나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웅- 소리를 들었다. 이번엔 훨씬 더 또렷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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