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저녁 여섯시 반, 우리 집 식탁은 늘 비슷한 풍경이다.
엄마 이영숙이 국을 뜨고, 누나 강서윤이 퇴근하고 들어와 넥타이 대신 걸친 카디건을 벗으며 자리에 앉고, 여동생 강하은이 동아리 끝나고 씩씩거리며 들어오고, 아빠 강태호가 늦지 않게 도착해서 자리에 앉는 날은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밖에 안 됐다.
오늘은 그 두세 번 중 하나였다.
식탁에 다섯 식구가 다 모이면 늘 비슷한 순서로 자리에 앉는다. 엄마가 부엌 쪽, 아빠가 그 맞은편, 서윤 누나와 하은이가 양옆, 나는 늘 창가 쪽. 이게 뭐라고 몇 년째 안 바뀌는지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오늘 회사에서 일찍 끝났다." 아빠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엄마가 웃으며 국을 더 떠줬다. 별거 아닌 말인데 왜 저렇게 좋아하시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여섯시에 끝난 게 뭐라고. 근데 엄마 얼굴 보면 마치 아빠가 로또에 당첨된 것 같은 표정이다. 부부라는 것도 신기하다. 저 정도 되면 서로한테 뭐가 그렇게 좋을까.
식탁 위에 놓인 반찬들, 김치찌개, 계란말이, 어묵볶음. 평범했다. 지나치게 평범했다.
어제까지의 나였다면 이 평범함이 그냥 편했을 텐데, 오늘은 이 평범함이 이상하게 어색했다.
왜냐면 나는 지금,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면 이 계란말이를 산더미로 만들 수도 있고, 이 김치찌개를 황금 그릇에 담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다. 눈 딱 감고 속으로 딱 한 번만 생각하면 지금 이 식탁이 완전 다른 세상이 될 수도 있다.
..근데 그러면 안 되겠지.
안 되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안 될 것 같았다. 뭔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그 느낌 때문에.
나는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었다. 평범한 계란말이. 짜지도 달지도 않은, 딱 우리 집 맛. 이걸 먹으면서 방금 전까지 신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게 좀 웃겼다. 인간이 참 적응력이 좋다더니 나도 벌써 이 정도로 담담해졌나.
"민준아, 국 더 줄까?" 엄마가 물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서윤 누나가 나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없어." 나는 얼른 대답했다.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 어제부터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게 됐어' 라고 말하면 다들 나를 정신병원에 데려갈 거다.
아니 정신병원도 아니고 무당집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 우리 엄마 성격에 그럴 수도 있어.
"진짜 없어?" 누나가 재차 물었다. 회사에서 서류 검토하듯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 서윤 누나는 저게 문제다. 뭐든 대충 넘기는 법이 없다.
"없다니까." 나는 시선을 피하며 어묵을 씹었다.
하은이가 젓가락으로 어묵을 찍으며 투덜거렸다. "동아리 선배가 완전 짜증나. 왜 자꾸 나한테만 정리시켜."
"네가 제일 어리니까 그렇지." 서윤 누나가 무심히 말했다.
"언니가 뭘 알아." 하은이가 톡 쏘아붙였다. 여동생은 요즘 부쩍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반항기라던가, 뭐 그런 게 왔다고 엄마가 걱정을 하시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하은이가 저러는 게 부럽기도 하다. 저 나이 때는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일이 동아리 선배 잔소리 정도였는데. 나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일이 뭔지도 모르겠다. 억울해야 하는 건지 좋아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으니까.
아빠가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다 그런 시기가 있는 거야."
"아빠도 그런 시기 있었어?" 하은이가 물었다.
"있었지. 그때 할아버지한테 엄청 혼났어." 아빠가 옛날 얘기를 꺼내려 하자 엄마가 손을 저었다.
"밥 먹을 때 옛날 얘기 좀 그만해요."
"알겠어, 알겠어." 아빠가 웃으며 물러났다.
이런 대화들, 평소라면 그냥 배경음악처럼 흘러갔을 텐데 오늘은 하나하나가 다 선명하게 들렸다. 마치 내가 이 식탁의 일부가 아니라 이걸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
나는 그 대화들을 들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딴생각이었다.
이 식탁에 앉은 사람 중에, 나만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
다들 각자의 고민을 하고 있다. 서윤 누나는 회사 스트레스, 하은이는 동아리 선배, 아빠는 야근, 엄마는 우리들 걱정.
다들 평범한 고민을 안고 있는데, 나는 지금 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일까.
솔직히 웃기지 않나. 다른 애들은 시험 성적이나 연애 문제로 고민할 나이에, 나는 초월적 존재의 감시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이거 누구한테 말해도 안 믿을 거다. 나조차도 안 믿고 싶다.
엄마가 나를 보며 말했다. "민준이 오늘 학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좀 이상하다."
"..아니요. 그냥 좀 피곤해서." 나는 대충 둘러댔다.
엄마는 더 묻지 않고 다시 반찬을 뜨셨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
엄마 특유의 그 촉이 있다. 평소라면 분명 한 번 더 물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넘어갔다. 그게 더 이상했다. 혹시 엄마도 뭔가 눈치챈 게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엄마가 그런 걸 눈치챌 방법이 없다.
'..나만 알고 있는 걸 아무도 몰라.'
그 사실이 이상하게 외로웠다. 원래 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잘 느끼지 않는 인간이었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늘 무던한 편이었다. 뭘 잃어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고, 뭘 얻어도 크게 기뻐하지 않는.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다르다.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들,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아무도 진짜 나를 모른다는 그 느낌이 가슴 한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아빠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려다가 문득 멈췄다.
"오늘은 그냥 안 마실래." 아빠가 혼자 중얼거렸다.
엄마가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잘 생각했어요."
나는 그 대화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 뭔가 사연이 있는 대화 같았는데, 정확히 뭔지는 몰랐다.
아빠가 원래 저녁마다 맥주 한 캔은 꼭 마셨는데. 요즘 회사에서 뭔 일이 있나. 아니면 건강검진 결과가 안 좋게 나왔나. 궁금했지만 물어볼 타이밍은 아니었다. 우리 집 식탁에서는 그런 걸 대놓고 캐묻는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식탁 정리를 도우면서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접시를 나르고, 수저를 모으고, 식탁을 닦는 그 반복적인 동작들 사이로 자꾸 그 소리가 떠올랐다.
오늘 학교에서 들었던 그 웅- 소리. 그건 대체 뭐였을까.
분명 아무도 못 들었을 거다. 그 순간 교실 안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근데 나만, 딱 나만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직후부터 이상하게 손끝이 간지러운 느낌이 계속됐다.
혹시 정말로 신이라는 게 존재해서, 나를 지금 시험하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시험을 잘 봤을까, 못 봤을까.
시험이라면 채점 기준이 뭘까. 착하게 살면 되는 건가. 아니면 이 능력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가 기준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사는 게 정답인가.
답을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접시를 닦으며 창밖의 어둠을 바라봤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었다. 분명 어제와 똑같은 얼굴인데, 오늘은 뭔가 다른 사람 같았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빠가 나를 불렀다.
"민준아, 잠깐 얘기 좀 하자."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심장이 그냥 철렁한 게 아니라 아예 바닥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빠 목소리에서 뭔가 무거운 게 느껴졌다. 평소의 그 장난기 있는 톤이 아니라, 진짜 할 얘기가 있을 때 나오는 그 낮은 톤.
..설마 알고 계신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없어야 한다.
말이 안 된다. 아빠가 무슨 방법으로 알겠어. 내가 이상한 능력이 생겼다는 걸 어떻게 아빠가 눈치챌 수 있겠어. CCTV도 없고, 증거도 없고, 나 말고는 아무도 그 웅- 소리를 못 들었는데.
근데도 자꾸 불안했다. 아빠 방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가 마치 형장으로 걸어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무겁고, 심장은 계속 두근거리고.
혹시 부모라는 존재는 정말로 뭔가 다른 감각이 있는 걸까. 자식이 뭔가 숨기고 있으면 그냥 딱 알아채는, 그런 초능력 같은 게.
만약 그런 거라면 나는 완전히 망한 거다.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아빠의 방으로 향했다.
한 걸음, 두 걸음.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는 순간까지도 나는 계속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그냥 평범한 얘기일 거야.
..근데 왜 이렇게 손이 떨리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