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님, 저 좋은 학생인가요?

4화

아빠 방은 늘 담배 냄새 대신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아빠는 담배를 안 피우신다. 대신 옛날 책을 좀 모으신다. 낡은 종이 냄새, 먹 냄새 비슷한 그 냄새가 문을 열자마자 코끝을 스쳤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냄새를 별로 안 좋아했다. 어릴 땐 그게 그냥 낡은 냄새인 줄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시간 냄새였다. 오래 묵은 것들이 풍기는, 사람이 함부로 못 건드리는 무게 같은 냄새. 그리고 오늘, 그 냄새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아빠가 나를 부른 순간부터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잠깐 방으로 좀 와봐." 그 한마디에 나는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설마 들켰나. ..뭘 들켜. 들킬 게 뭐가 있다고. 근데 이상하게 그 순간엔 정말로 뭔가 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그 말도 안 되는 일들, 흥분과 공포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던 그 시간들이 다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복도를 걸어가는 몇 초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재판장으로 걸어가는 것 같았다. "앉아봐." 아빠가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가 유독 딱딱하게 느껴졌다. 원래 이 의자가 이렇게 불편했나. "무슨 일이세요."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물었다. 목소리가 좀 떨렸던 것 같은데, 아빠가 눈치챘는지는 모르겠다. 눈치챘어도 티는 안 냈다. 원래 그런 사람이다. 아빠는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뭔가를 찾는 손길이 유난히 느릿했다. 나는 그 몇 초 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진짜로. 저 서랍에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냥 별거 아닐 거라는 안도가 번갈아가며 나를 흔들었다. 이윽고 아빠가 오래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색이 살짝 바랜, 모서리가 둥글게 말린 낡은 사진이었다. 아빠가 훨씬 젊었을 때, 20대쯤으로 보이는 사진. "이거 봐라. 아빠 젊었을 때 사진." 아빠가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 속 아빠는 술에 완전히 취해서 친구들 사이에 널브러져 있었다. 셋인가 넷인가 되는 친구들이 다 같이 웃고 있고, 아빠만 혼자 눈이 반쯤 풀린 채로 소파에 처박혀 있었다. ..뭐야 이거. 너무 뻘쭘해서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나온다는 게 좀 이상했다. 방금까지 그렇게 심장이 쿵쿵대던 사람이, 아빠 젊었을 때 술 취한 사진 한 장에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는 게. "..이게 왜요?" 나는 물었다. 아빠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때 아빠가 니 할아버지한테 술을 완전히 뺏겼던 적이 있었어." "뺏겼다구요?" "응. 아빠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 준비하던 시절에, 매일 술만 마셨거든. 하루도 안 빼고. 그때는 그게 뭐 대단한 스트레스라도 되는 줄 알았지." 아빠가 헛웃음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어느날 아빠 방에 들어와서, 아무 말 없이 냉장고에 있던 술을 다 갖고 나가셨어. 소주, 맥주, 뭐 남아 있던 거 하나도 안 남기고. 그때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라." 아빠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나는 왠지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졌다. 젊은 아빠가 방문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할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술병만 들고 나가는 그림. "화 안 내셨어요? 뭐라고 안 하셨어요?" 내가 물었다. "화냈지. 왜 안 냈겠어. 이게 무슨 짓이냐고, 남의 물건을 왜 마음대로 가져가냐고 소리도 질렀어. 근데 할아버지는 그냥 씩 웃으시더라. 아무 말도 안 하고." "근데 나중에 알았어." 아빠가 이어서 말했다. "할아버지가 그날 밤새 그 술을 다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나한테 그러셨거든. '태호야, 네가 뭘 가지고 있든, 그걸 어떻게 쓸지는 니 몫이다. 근데 그게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나는 그걸 뺏을 거야. 그게 술이든 다른 거든.' 이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숨이 막혔다. ..이게 무슨 우연이지. 세상에 이렇게 딱 맞아떨어지는 타이밍이 있나. 방금 아빠가 한 말이, 마치 내 상황을 다 알고 하는 말처럼 들렸다. 뭘 가지고 있든, 남에게 피해를 준다면 뺏긴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면서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때는 그 말이 그냥 잔소리인 줄 알았는데," 아빠가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살면서 계속 생각나더라. 뭘 가지든, 그걸 어떻게 쓰는지는 내 책임이라는 거." 나는 대답을 못 하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머리는 다른 생각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오늘 갑자기 이 얘기를 왜 하세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아빠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눈빛이 뭔가를 캐내려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냥,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요즘 니가 뭔가 고민이 있는 것 같아서. 표정이 이상하더라." 아빠가 말했다. "밥 먹을 때도 딴 데 보고, 방에서 뭔가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사고 친 건 아니지?" "..아니에요."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너무 빨리 대답한 것 같아서 스스로도 어색했다. "뭐, 무슨 일인지는 안 물어볼게." 아빠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이가 들면 다들 자기만의 짐이 있는 거니까. 근데 하나만 기억해. 뭘 가지고 있든, 그게 힘이든 돈이든 뭐든, 그걸 어떻게 쓰는지가 진짜 너를 결정하는 거야. 사람이 뭘 가졌는지로 평가받는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썼는지로 평가받는 거거든."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아빠가 정말 뭘 알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냥 아빠 특유의 인생 교훈 나눠주기 타임인지 구분이 안 됐다. 원래 아빠는 술 한 방울 안 마셔도 취한 사람처럼 옛날 얘기를 늘어놓는 스타일이니까. 근데 그 말이 이상하게 무겁게 다가왔다. 평소 같았으면 "네네" 하고 흘려들었을 말이, 오늘은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안 넘어갔다.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대가가 따른다. 나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그저 흥분과 공포 사이에서 왔다갔다했을 뿐이지, '이걸로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신기해서 웃었고, 무서워서 떨었고, 다시 신기해서 웃었다. 그게 다였다. 책임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내 머릿속 목록에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 다시 생각했다. 만약 신이 진짜로 나를 지켜보고 있다면, 그 신은 뭘 원하는 걸까. 돈을 늘리는 걸 봤을까. 옷 색깔을 바꾸는 걸 봤을까. 그런 사소한 것들도 하나하나 '점수'가 매겨지는 걸까. 그럼 오늘 하루 동안 내가 한 생각들, 한 말들도 다 채점표에 올라가는 걸까. ..그거 좀 억울한데. 나는 시험지 채점 기준도 모르는데 시험을 치는 셈이다. 이게 무슨 불공정한 게임인가. 야구로 치면 스트라이크존을 안 알려주고 던지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식이면 아무리 잘 던지고 싶어도, 정말 보란듯이 잘 던지고 싶어도, 어디로 던져야 스트라이크가 되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던지는 거밖에 안 된다. ..나쁜 학생으로 찍히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생각이 들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쁜 학생. 시험에서 떨어지는 학생. 벌을 받는 학생. 그 세 단어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딱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도 아니었고, 딱히 나쁜 인간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가끔 착한 척하는 그런 인간. 버스에서 자리 양보 안 하고 자는 척한 적도 있고, 편의점 알바한테 괜히 짜증 낸 적도 있고. 근데 그런 것들도 다 기록되는 거라면. 근데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는 걸까. 모든 생각 하나하나가 시험 문제가 되는 걸까. 밥 먹으면서 짜증 낸 것, 동생한테 짜게 군 것, 그런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다 채점표에 올라가는 거라면, 나는 이미 낙제생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잠이 안 왔다. 이불 속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집었는지 모른다. 왼쪽으로 누우면 창밖 가로등 불빛이 신경 쓰이고, 오른쪽으로 누우면 시계 소리가 신경 쓰였다. 뭘 해도 편하지가 않았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나는 결심했다. 최소한 눈에 띄는 짓은 하지 말자. 필요할 때만 아주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다짐하고 눈을 감았다. 근데 다짐이 얼마나 갈지,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은 다짐을 지키는 것보다 다짐을 깨는 쪽으로 훨씬 재능이 있다는 걸. 특히 나 같은 인간은. 그리고 그 순간, 방 안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뭐지. 나는 눈을 번쩍 뜨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 소리도 다시 들리지 않았다. 착각이겠지. ..그렇겠지.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근데 심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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